험준한 갈지자길 우마차로 운반
득량역서 실려 전국에 팔려나가
일제강점기 채취, 1960년대 전성기
온돌문화 상징, 문화재 가치 커
국내 자연광산 제1호 등록 추진
문화재청 심의가결에 기대감 쑥
국가등록문화재 지정을 추진 중인 전남 보성군 오봉산 구들장밭 전경. [보성군 제공] |
[편집자 주] 전라남도 보성군 득량면 오봉산(해발 343m)은 온돌문화의 핵심 자재인 구들장 국내 최대 산지로, 국내 생산량의 70%를 차지했던 곳이다.
오봉산 구들장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부터 1980년대 초까지 50여년 간 채취돼 전국을 달궜다. 지금도 채석장과 우마차길 등이 보전돼 있다. 이에 보성군이 구들장 채석장으로 유명한 오봉산에 대해 국가등록문화재 등재를 신청했다.
그동안 국가등록문화재는 개별건물이나 다리, 터널 등이 지정된 곳은 있으나 구들장 광산을 지정하는 것은 국내 처음으로 매우 이례적이다. 신청이 받아들여지면 자연 광산으로는 1호가 되는 셈이다.
우리나라 온돌 문화의 핵심 자재인 구들장이 건축 자재로는 처음으로 국가 등록문화재 추진되고 있어 관심이 쏠리고 있다.
[헤럴드경제(보성)=박대성 기자] 김철우 보성군수는 16일 헤럴드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오봉산 구들장 채석장을 국가등록문화재로 등재해야 하는 이유와 추진 과정을 세밀하게 설명했다.
김철우 군수는 온돌문화의 핵심인 구들장 채석장을 “국가 차원에서 관리하고 보전할 필요성이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오봉산 구들장 채석지를 국가등록 문화재로 신청한 이유.
▶득량면 오봉산 구들장은 2018년 제135호 국가문화재로 등재된 ‘온돌문화’의 핵심 자재인 구들장 산지로,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채석 현장을 보존하고 있다. 구들장은 우리민족 주(住)생활의 근간이 되는 중요한 재료로 쓰였고, 구들장 채석지는 어려운 시절 우리 부모의 생활터전이 됐던 곳이다. 이에 국가등록문화재로 신청했고, 지난달 22일 문화재청 심의회에서 가결돼 오봉산 구들장의 우수성을 인정 받았다. 앞으로 지정예고 등 행정절차를 거쳐 5월경 국가등록문화재로 등재 될 예정이다. 평소 직원에게 ‘향토사도 모르면서 세계사를 논하지 말자’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고 있다. 지역의 소중한 유산이자 역사인 오봉산 구들장 채석 현장의 의미를 바로 알고 문화재로 등재하는 것은 매우 가치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김철우 보성군수가 16일 헤럴드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오봉산 구들장 채석장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보성군 제공] |
-보성군의 국가등록 문화재는 몇 건이나 되나.
▶현재 보성군의 국가등록문화재는 기 등록한 3건에 오봉산 구들장 채석지까지 4건으로 앞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등록문화재를 발굴·등재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현재 ‘보성강댐 및 수력발전소, 득량만 방조제’도 학술연구 용역을 통해 국가문화재로 등재하고자 추진 중이다.
-오봉산 칼바위를 비롯해 구들장밭 ,우마차길을 걷는 묘미가 있던데요.
▶현재 도비를 확보해 진행 중에 있는 구들장 힐링파크 조성 사업을 통해 구들문화 체험장을 건립해 볼거리와 즐길거리를 다양하게 제공할 계획이다. 한옥과 온돌방을 체험할 수 있는 숙박 체험관과 전시관을 건립해 채석지의 역사와 채석도구, 우마차·소 모형 등을 전시할 생각이다. 더불어 우마차길 일부를 개방해 당시 소달구지에 구들을 싣고 왕래하던 선조의 삶을 체험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
-보성군에서 지난해 오봉산 구들장 학술대회를 열었는데, 당시 토론자(전문가)들이 밝힌 학술적 가치는.
보성군 득량면에 세워진 소달구지 조형물. [보성군 제공] |
▶오봉산 구들장 채석지가 보성·득량면 지역사에 미친 영향과 천연의 자연자원·지형을 잘 이용한 구들장 운반로의 유구(遺構)가 정교한 석축의 구축방법을 보여주고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했다. 가파른 산에서 채취한 구들장은 우마차로 운반했는데, 능선을 따라 ‘갈지(之)’자 우마차 길이 지금도 남아 있고 파석에 의한 부상을 막기 위해 소에 짚신을 신기고 운반작업을 했다고 한다. 특히 역사·입지·학술적 가치가 뛰어나서 대대로 보존돼야 할 소중한 문화유산임을 모두 함께 공유했고, 국가문화재 지정에 의견일치를 보였다.
-오봉산 구들장이 온돌재료로 선호된 이유는.
▶용역에 따르면 응회암 성분인 오봉산 구들장의 광물학적 특성은 압축강도가 148㎫로, 제주 현무암(115㎫)이나 옥천판석(115~148㎫) 구들장보다 높다. 응회암은 일명 맥반석으로 밀도가 작고 흡수율이 높지만 압축강도와 휨강도가 강하고 무게는 가벼워 구들작업이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어 선호된다. 특히 열전도도(熱傳導度)가 가장 낮아 방바닥 열을 가장 오래 간직할 수 있는 특성이 있어 구들장 용도로서 가장 우수한 특성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구들장 원석 채석과정을 보면, 분리층이 있는 암석의 상부 석층은 정과 망치를 이용해 돌뜨기 작업을 통해 채취한 뒤 암석 하부는 남포(다이너마이트)라는 충격을 가해 층으로 쪼개지는 판돌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오봉산이 소재한 득량면이 고향이라면서요. 어릴적 추억이 있다면.
▶1970년대 선친이 구들장 채취업을 직접 해서 생생하다. 표면에 노출된 켜켜이 쌓인 구들은 떼어내면 되지만, 땅속 구들장은 발파를 해서 떼어내게 되는데 아버지께서는 항상 고사를 지내셨다. 제수용품 들고 산에 따라다니던 기억이 남아 있다. 내가 군의원 당시 소중한 자원인 오봉산을 뭔가를 남겨야겠다는 생각에 돌탑을 쌓기 시작했다. 돌탑이 70여개 있는데, 내가 군의원 때 쌓은 것이다. 구들장을 채취하고 남은 편석을 이용해서 기남마을 이장(이춘선)에게 전화해서 ‘오봉산에 돌탑을 쌓고 싶다’며 사람을 동원해서 쌓은 돌탑인데 다 구들장 뜯고 남거나 흘러내리는 돌로 쌓은거다. 우리가 동방예의지국으로서 손님이 오면 따뜻한 아랫목으로 모시는 풍습이 있는데 방이 차가우면 어떻게 좌식문화가 됐겠나. 우리 온돌문화는 세계적으로 대단한거다. 연탄·기름보일러가 나와도 물을 데워서 방을 순환시키는 원리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국가등록문화재 지정을 추진 중인 전남 보성군 오봉산 구들장밭 전경. [보성군 제공] |
-득량면이 구들장 산업이 어떻게 발달했나.
▶득량면은 돌이 많은 지형 특성상 비가 와도 땅에 물이 고이지 않아 농사짓기 어려운 환경이어서 농사보다는 오봉산 구들장의 채석 산업에 대부분의 가구가 종사했다. 어려운 시절 구들장 채석지에서의 수입은 꽤 높은 편으로 오봉산의 구들장 채석사업은 1930년대 시작돼 1980년도 초까지 약 50여 년 동안 이뤄졌는데, 1960년에서 70년 초를 전성기로 꼽을 수 있다.
-구들장이 주로 보성이나 전남 지방에서만 사용됐는가.
▶그 당시 구들장 채석에 참여했던 이들의 구술 증언에 따르면 80t 가량의 구들을 실을 수 있는 화물차량 8량 정도가 항상 경전선 득량역에 대기하고 있었다고 한다. 한 달 평균 4000t 가량의 구들장 돌이 전국 각지로 팔려 나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5, 10, 15일 간격으로 두칸에서 세칸(1칸 40t) 정도의 양이 나갔으며 용산, 부산을 비롯해 주로 광주, 여수로 나갔다고 구술 인터뷰(이명순)를 통해 증언하고 있다. 당시 대한통운을 운영했던 전광찬 씨에 따르면 광주, 순천, 여수 등 전라도 지방 전역에 공급됐다고 한다. 오봉산 구들장이 불에 강하고 얇으면서도 공극률이 좋아 따뜻한 공기를 오래 품고 있어서 찾는 사람이 많았다.
온돌학회 학술회 때 전문가들의 현장 견학사진. [보성군 제공] |
-구들장 채취가 언제부터 언제까지 채취됐고, 구들장 명맥이 끊긴 시기는.
▶구들장을 채석했던 황남주, 정남수 어르신의 말씀에 따르면 1945년 해방 전인 일제 강점기 1930년대 후반부터 오봉산 채석이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가장 마지막까지 부친이 채석사업을 했던 이영훈 씨의 증언에 따르면 1980년도 초반에 오봉산 구들장 사업이 막을 내린 것으로 추정된다. 즉 오봉산의 구들장 채석사업은 1930년대 시작돼 1980년도 초까지 약 50년간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보일러가 보급되면서 구들장 수요가 줄어 자연스럽게 구들장 채석이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오봉산 구들장의 매장량은 어느 정도이며 앞으로의 계획은.
▶오봉산 구들장 매장량은 현재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전국 생산량의 70%를 차지했으며, 현재도 그 현장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많은 양의 구들장이 매장돼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현재 보성 오봉산 구들장 채석지가 국가등록문화재로 등재되면 문화 재활용사업 등 보존·관리에 최선을 다 할 것이고, 역사·문화·교육적 자산으로 그 가치를 높이고 알리는데 힘을 쏟을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