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한국 연출작 ‘탄호이저’
“결국 인간의 조건에 대한 이야기”
세계적인 오페라 연출가 요나김 [국립오페라단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쾌락과 금욕, 관능과 순결, 팜므파탈과 성녀, 에로틱과 플라토닉, 밤과 낮… 여성에 대한 이런 극단적인 이분법을 바그너는 과연 몰랐을까요? 전 일종의 실험은 아니었을까 싶어요. ‘탄호이저’는 결국 인간과 인간의 조건에 대한 이야기예요.”
독일 ‘오페라의 아버지’로 불리는 서른 두 살의 청년 바그너가 쓴 ‘탄호이저’엔 바그너 자신이 고스란히 투영돼있다. 시대의 한계와 사회의 시스템에 저항했던 중세 기사이자 음유시인, 가수이자 메신저였던 탄호이저가 ‘환락의 상징’인 베누스의 유혹에 빠지다 순결한 연인 엘리자베트의 진실한 사랑으로 구원받는다는 이야기가 오페라의 큰 줄기다.
오페라의 개막을 앞두고 헤럴드경제와 만난 연출가 요나 김은 “바그너의 여성에 대한 클리셰를 굉장히 싫어한다. 세상은 이분법으로 되지 않기 때문”이라며 “오페라를 찬찬히 뜯어보니 바그너는 이론적 실험을 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의심이 들만큼 이 안에 굉장히 많은 힌트를 숨겨놨다”고 했다.
세계적인 오페라 연출가 요나 김과 바그너가 만나 새로운 해석을 입었다. 국립오페라단이 무려 45년 만에 무대에 올리는 ‘탄호이저’(10월 17~20일, 예술의전당)를 통해서다.
‘오페라 본토’인 유럽 무대에서 활동 중인 요나 김(독일 만하임 극장 상임연출가)은 바그너 오페라만 이번이 9번째다. 요나 김이 손대지 않은 바그너 오페라는 이제 ‘방황하는 네덜란드인’과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뿐이다.
한국 프로덕션과 함께 오페라를 올리는 것은 올해가 두 번째. 세계 무대에서 활동하는 연주자, 지휘자는 많지만 오페라 연출가는 극히 드문 환경에서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요나 김의 무대를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그는 2017년 세계적인 오페라 전문지 ‘오펀벨트’가 시상하는 ‘올해의 최우수 연출가’로 선정됐고, 독일 최고 권위 예술상인 파우스트상에 두 번(2010, 2020) 노미네이트 됐다.
요나 김과 국립오페라단 ‘탄호이저’ [국립오페라단 제공] |
그는 “‘탄호이저’는 청년 바그너의 변곡점 같은 작품”이라며 “바그너 오페라라고 했을 때 굉장히 무거운 철학과정치, 염세주의 세계관을 떠올리기 싶지만, 이 오페라는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즉 인간의 조건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봤다.
요나 김이 바라본 ‘탄호이저’라는 캐릭터는 시대의 작가이자 오피니언 리더, 기사이자 가수, 이야기를 전하는 메신저였다.
“어느 사회에나 탄호이저와 같은 캐릭터는 존재해요. 사회 시스템에 대항하는 사람, 사회와 개인, 정신과 육체 사이의 딜레마에 놓인 사람이죠. 탄호이저는 어찌보면 성공을 갈망했고, 그러면서도 자기 고집이 있어 시대의 벽에 부딪힐 수 밖에 없던 바그너 자신을 상징하기도 해요.”
바그너가 20대부터 구상한 이 작품은 1945년 독일 드레스덴에서 초연한 이후, 몇 번의 개정을 통해 시기마다 새로운 버전을 내놓았다. 1861년 파리, 1867년 뮌헨, 1875년 빈 버전이 나왔다. 하지만 어떤 버전도 그에겐 완성작이 아니었다. 바그너는 자신의 말년에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을 통해 ‘탄호이저’의 마지막 개정판을 올리고 싶어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요나 김은 “지휘자 필립 오갱과 상의해 젊은 시절의 바그너 분위기를 내기 위해 드레스덴과 파리 버전을 절충했다”며 “이번 ‘탄호이저’는 서울 버전”이라고 했다. 요나 김의 오페라에선 베누스의 비중이 큰 ‘파리 버전’을 1막에, 2막과 3막엔 드레스덴 버전을 사용했다.
세계적인 오페라 연출가 요나김 [국립오페라단 제공] |
기존 ‘탄호이저’ 연출과의 두드러진 차이는 ‘두 여성’에 대한 시각이다. 요나 김은 창녀와 성녀에 가까울 만큼 극단적인 이분법으로 설정된 두 여성상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봤다. 그는 “때로는 극단적인 이분법이 더 효과적인 메시지를 전달할 때가 있다. 대부분 독일 문화의 전통이 기도 하다”며 “바그너 역시 이러한 독일 전통에서 억눌린 사람으로 일반적 테마를 극대화하면서도 보다 단순하게 표현하기 위해 테제와 안티테제로 내놓은 것”이라고 봤다.
요나 김은 이 지점에서 새로운 해석을 내놓는다. ‘관능적 여성’의 상징인 베누스와 순결과 구원의 상징인 엘리자베트가 실은 “한 사람의 양면성을 보여주는 캐릭터들”이라는 것이다. 그는 “누구에게나 숨겨진 이면이 있다”며 “엘리자베트는 사회와 시대의 억압으로 인해 ‘착한 여자 콤플렉스’를 안고 살며 희생적인 여성성을 강요당해온 인물이라면, 베누스는 팜므파탈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의 내면엔 사랑을 향한 뜨거운 열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했다. 요나 김이 발견한 바그너가 숨겨둔 인물의 내면이었다. 그는 “바그너가 드디어 그 의미를 찾은 사람이 나왔다고 말할 것 같다”며 웃었다.
이들의 이면을 들여다 보니 관객에겐 완전히 새로운 질문을 던지게 됐다. 요나 김은 이번 작품에서 “두 여성이 서로 마주하며 서로를 이해하는 장면을 넣어 관객에게 새로운 해석을 던져주고자 했다”며 “이 장면이 누군가에겐 여성의 연대로, 또 다른 누군가에겐 대립으로 다가올 수도 있을 거다. 해석은 관객의 몫”라고 했다.
사실 바그너는 만만치 않은 작품이다. 180분에 달하는 긴 분량은 숏폼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취향과는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다.
“오페라를 어렵고 무겁게 생각하지 않아도 돼요. 관람하다 졸리면 그냥 자도 됩니다. 조금 졸다 일어나면 정신이 말끔해져 음악이 더 잘 들려요. 모르면 모르는 대로, 알면 아는 대로 각자 즐기면 되니 오페라를 모른다는 것이 전혀 창피한 일이 아니에요. 정 재미없으면 보다 나가도 괜찮아요. (웃음)”
sh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