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에서 나고 자란 MZ 탈꾼
왜곡된 시선 뒤집는 탈춤의 전복
“탈은 나를 보여주고 표현하는 도구”
“서울 강남 테헤란로에서 탈춤을 추고 있지만, 황해도엔 한 번도 가보진 못했다”는 탈꾼 박인선의 탈춤엔 동시대 장르로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고민이 담겼다. [국립극장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서울 강남 테헤란로에서 탈춤을 추고 있지만, 황해도엔 한 번도 가보진 못했어요. (웃음)”
1992년생, 테헤란로에서 나고 자란 ‘강남 사람’이다. 그는 황해도 강령에서 전승된 중요무형문화재 제34호 강령탈춤 이수자. 주변에선 “탈춤을 추면 쌀이 나오냐 돈이 나오냐”며 숱하게 묻는다. 그래서 만든 랩이 있다. “연습실 9층에서 연습을 하면 밖에서 외제차들이 뛰뛰빵빵 비웃어. 하지만 난 똑딱이 똑딱 탈춤을 춰.” 연습하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마천루를 올려다 볼 때면, 문득 생각에 잠기곤 한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지?” 그러다가도 피식 웃고 만다.
그는 ‘잘 노는 탈꾼’이다. 여럿이 해야 하는 집단 장르인 ‘탈춤’을 ‘원맨쇼’로 뒤바꾼다. “여러 명이 해야 하니 시간 맞추기가 힘들어 나 혼자 다 해보고 싶었다”며 민망한듯 웃는다. 춤도 추고, 노래도 하고, 장구도 치고, 랩도 한다. 예닐곱 개의 탈들을 바라보며 그 안에서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한다.
박인선(32)의 탈춤은 발칙하다. 이 안엔 저항과 해방이 담겼다. ‘내 속에 무수히 많은’ 자아를 발견하는 시간이자, 탈춤의 세계관을 전복하며 통쾌함을 안긴다. 수많은 전통장르 중에서도 가장 ‘소외된 장르’를 ‘요즘 장르’로 치환한다.
박인선이 자신의 이름을 건 공연으로 관객과 만난다. 국립극장의 여름 축제인 ‘2024 여우락 페스티벌’의 ‘박인선쇼’(7월 22일, 하늘극장)를 통해서다. 최근 국립극장에서 만난 그는 자신의 공연을 “‘탈춤 다시쓰기’ 작업의 연장”이라고 했다.
탈꾼 박인선. [국립극장 제공] |
탈춤을 처음 만난 건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기막힌 우연이었다. 이런게 숙명일지도 모른다. ‘방과후 활동’으로 사물놀이와 탈춤을 배우다 재미를 붙였고, ‘우연히’ 집 앞에 ‘국가 무형문화재전수교육관’이 있길래 찾아가게 됐다. 강령탈춤을 만난 것은 이곳을 지키는 경비아저씨의 조언이었다.
“전국에 보존 단체가 굉장히 많아요. 탈춤 보존회만 해도 15개가 있고요.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멀뚱멀뚱 서있는데 경비 아저씨가 ‘강령탈춤보존회’로 가라고 하더라고요. 거기 가면 춤도 추고, 노래도 하고, 장구도 칠 수 있다고요.”
그날부터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다. 박인선은 ‘전통의 세계’ 안에서 착실하게 지내왔다. 중학교 때부터 본격적으로 탈춤을 추게 됐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졸업 후 공연활동을 해오며 자신의 길을 가는 예술가로의 고민에 봉착했다.
그는 “전통예술 장르는 선생님의 것을 그대로 답습해야 하는 도제식 교육”이라며 “선생님의 목소리, 선생님의 캐릭터, 선생님의 음역대를 흉내내다 보니 어느 순간 나만의 것은 뭘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나의 것’에 대한 고민과 함께 그를 가장 괴롭혔던 것은 탈춤 안에 담긴 여성과 장애인을 향한 왜곡된 시선과 차별이었다. 탈춤이 그리는 여성상은 단 둘 뿐이다. 박인선은 단어를 고르는 데에도 신중했다. 그는 “이게 맞는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름답다’고 표현해보겠다”고 했다.
“아름답고 순종적이며 남성의 요구를 충족시켜야 하는 무언(無言)의 캐릭터”인 소무, “아름답지 않고 자기 주장이 뚜렷하며 남성들에게 배척 당해 스스로 죽음을 택하거나 죽임을 당하는 캐릭터”인 미얄할미는 탈춤의 상징적인 여성 캐릭터다. 박인선은 “지금의 관객들에겐 가닿지 않는 지점이 있는 인물들”이라고 봤다. 북청사자놀음의 꼽추춤, 하해별신굿탈놀이의 이매탈, 고성오광대의 문둥이 등 장애를 드러내는 캐릭터도 마찬가지였다.
“전통이라고 해서 관객들이 불편해하는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가도 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은 박인선의 ‘탈춤 다시쓰기’ 작업으로 이어졌다. [국립극장 제공] |
뿌리깊은 가부장제와 편견이 만든 캐릭터는 ‘동시대 관객’을 불편하게 하는 요소가 되리라 봤다. 미녀와 추녀의 설정, 본첩과 처첩의 갈등, 남성들의 여성 희롱, 장애의 속성만 드러내는 방식은 ‘현재의 시선’에선 불쾌감을 주는 요소였다.
박인선은 “사극이나 영화에선 자기 주도권을 가지지 않은 여성이나 소수자가 등장해도 그것을 전통의 모습으로 바라봐 크게 불편해하지 않는데, 왜 탈춤에선 유독 불편하게 다가오는지 고민이 많았다”며 “전통이라고 해서 관객들이 불편해하는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가도 되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지금의 관객들에게 와닿는 이야기로 치환하기 위해 고심한 것이 ‘탈춤 다시쓰기’의 시작이었다”고 말했다.
통쾌한 ‘탈춤의 전복’은 여기가 출발이었다. 집 나간 영감을 찾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 헤매다 새 애인이 생긴 것을 알고 강물에 몸을 던지는 미얄 할미는 ‘자신만의 인생’을 찾아 떠난다. “언제까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영감을 찾아 다녀야 하냐”며 ‘영감 찾기’를 중단하는 미얄 할미에게 비욘세를 입힌다. ‘얼평’(얼굴 평가)에 적나라한 희롱을 일삼는 취발이에게 아무런 말도 못하고 순종하는 소무는 ‘힙합 여전사’가 된다. 일명 ‘흑화’한 소무다. 탈춤의 풍자와 해학 기능으로 탈춤 스스로를 비틀었다.
“난 침묵의 전사 넌 그저 소음, 내 눈빛은 번개 넌 그저 어둠, 내 눈빛이 나의 말, 이 눈빛이 너의 말을 지워 쉿, 취발이의 개소리는 그저 불꽃놀이, 한순간에 재만 남을 한낱 쥐불놀이.” (박인선쇼 ‘블랙소무’ 중)
“서울 강남 테헤란로에서 탈춤을 추고 있지만, 황해도엔 한 번도 가보진 못했다”는 탈꾼 박인선의 탈춤엔 동시대 장르로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고민이 담겼다. [국립극장 제공] |
신시사이저 한 대를 두고 자신만의 쇼로 2021년 처음 선보인 ‘탈춤의 목적’이 시대와의 소통을 위한 ‘탈춤 다시쓰기’의 첫걸음이었다면 그 작업의 연장이자 진화인 ‘박인선쇼’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탈춤에 그의 이야기를 담았다.
“저마다의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모두가 한 번쯤 나의 또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보게 되잖아요. 저도 그랬어요. 탈춤을 하고 있지만, 나의 또 다른 적성과 가능성을 찾아보고 싶었어요. 탈춤보다 더 즐겁고 행복하게 할 수 있고 나를 잘 표현해낼 수 있는 무언가가 있을 것 같았죠.”
탈춤 안에 등장하는 수많은 캐릭터는 박인선이 찾아가는 또 다른 가능성이자 미처 몰랐던 자아였다. 옴니버스 식으로 구성된 강령탈춤은 총 7과장으로 구성, 6~7명의 캐릭터가 등장한다. 이들에게 ‘박인선식 해석’을 입힌다.
그는 “양반을 조롱하고 비판하는 하인 말뚝이는 자유를 찾아 헤매는 인물로, 탈춤 안에서 부해하고 무지한 인물로 나오는 셋째 양반은 자신을 다 풀어헤치고 놀 줄 아는 인물로 재창조하며 박인선의 삶을 빗대 표현한다”고 했다. 박인선의 이야기를 입은 탈춤은 멀리 떨어진 전통이 아닌 어느덧 너와 나, 우리의 이야기가 된다.
“탈춤꾼이라고 하면 뭔가 특이한 직업, 그래서 특이한 삶, 그러면서도 가난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저도 똑같아요. 저의 정체성을 고민하고 저의 삶을 고민해요. 그것이 탈춤의 어떤 캐릭터로 투영되며 박인선이라는 사람이 중첩되는 거죠. 박인선이라는 사람이 탈춤 속 캐릭터를 쓰면서 박인선과 탈의 이야기를 동시에 표현하는 거예요.”
박인선은 “탈춤의 가치를 알리고 탈춤을 보존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탈춤을 추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사건이 “탈춤을 시작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국립극장 제공] |
저마다의 탈엔 박인선과 우리가 있다. 사회와 규범 안에서 요구한 모습 안에 꽁꽁 감춰둔 나이기도 하다. 그는 “누구나 고정된 나만의 탈을 가지고 산다. 하지만 친절하고 정제된 모습 안에 화내고 싶은 나, 짜증내고 싶은 나의 모습이 있기도 하고 기쁨을 마음껏 분출하고 싶은 나도 있다”며 “일상에선 한두 가지의 모습을 보이지만, 내 안에 수많은 탈들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고 했다. 그에게도 탈춤은 스스로를 보여주는 도구다.
사실 젊은 여성 탈꾼은 흔치 않다. 탈춤 자체가 ‘소외 장르’다. 그래서 박인선은 ‘블루오션’이라고 했다. “잘만 하면 꽤나 독보적일 수 있겠다”는 야심도 품었다. 하지만 꽤나 무거운 탈을 쓰고 작은 구멍 안으로 숨을 내뱉으며 말을 하고 노래를 하고 연기도 하며 춤을 추는 일은 만만치 않다. “사람들은 탈춤 하면 덩실덩실 춤만 추는 거라 생각하는데 사실 탈 안에선 힘든 일이 많다”며 웃었다. 육체노동에 예술성까지 더하는 일이다.
일찌감치 접어든 길이나, 그는 “탈춤의 가치를 알리고 탈춤을 보존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탈춤을 추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사건이 “탈춤을 시작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초등학교 때 엄마 손을 잡고 무형문화재전수교육관에 가지 않았다면 지금의 난 무엇을 했을까 궁금해져요. 나의 또 다른 가능성을 알고 싶었는데, 탈춤으로 이야기를 풀어낼수록 박인선은 ‘탈춤을 참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명확해져요. 전 그저 행복하고 즐겁고 잘 노는 사람이고 싶어요. 그래야 관객에게 가닿는 이야기도 즐겁고 행복할 거 같아요.”
sh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