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슬기 안무 공연에 강효형 발탁
성향 달라도…“우린 영혼의 단짝”
‘21년 절친’ 국립발레단 솔리스트 강효형, 수석 무용수 박슬기 [국립발레단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텅 빈 무대 위의 남과 여, 사랑을 시작한다. 좋은 날은 짧다. 사랑의 유효기간은 3년쯤. 서로를 위해 모든 것을 내줬으나 서서히 멀어져 가는 그를 다시 붙잡을 순 없었다. 불완전한 사람이 아닌 완벽한 존재(AI, 인공지능)와의 사랑을 찾아 남자는 등을 돌린다. 남겨진 여자 강효형, 그는 무대 위의 드라마였다.
올해로 9주년을 맞은 국립발레단 안무가 육성 프로젝트인 ‘KNB 무브먼트 시리즈9’을 통해 선보인 박슬기(38·국립발레단 수석)의 ‘OS’. “책임감이 강하고 열정적인 무용수”인 강효형은 박슬기의 첫 선택이었다. 어느덧 무용수의 모습보다 안무가로 더 많은 활동을 하고 있지만, 강효형(36·국립발레단 솔리스트)의 기량과 풍부한 감성은 여전했다.
최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만난 강효형은 “사실 부담이 컸는데 티는 안냈다”며 “워낙 (박슬기) 언니의 기준이 높다는 것을 아니까, 거기에 부합할 수 있을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털어놨다.
두 사람의 인연은 어느덧 20여 년. 2003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예비학교 시절에 처음 만나 한예종을 함께 다녔고, 한 해 차이로 나란히 국립발레단에 입단(박슬기 2007년, 강효형 2008년)했다. 두 사람은 국립발레단에서도 유명한 ‘절친’이다. 해외 투어를 다닐 때도 한방을 쓰고, 밤새 대화가 끊이지 않는 ‘영혼의 단짝’이다. 강효형의 이야기를 듣던 박슬기는 “왜 몰랐겠냐, 그 마음이 얼마나 부담스러웠을지 잘 안다”며 눈을 맞춘다.
“안무를 시작하면서 무용수로의 효형이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조금씩 줄어드는 것 같았어요. 안무와 무용을 50대 50으로 똑같이 하기는 힘드니까요. 하지만 무용수로도 큰 역량을 가진 친구라는 걸 알기에 아쉬운 마음이 드는 때가 많아 이번 무대에서 효형이의 춤을 보고 싶었어요.” (박슬기)
눈빛만으로도 서로의 마음을 읽어내는 그들이지만, 입으로 발화돼 날아든 진심은 더욱 감동적인 법. 박슬기의 속내를 들은 강효형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2015년 케이블 채널 엠넷 ‘댄싱9’에 출연하며 얼굴도 알렸지만, 새로운 길을 개척한 이후 무용수 강효형의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긴 쉽지 않았다.
강효형은 “무대에 오르는 순간까지 부담이 컸고, 잘 해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특히나 국립발레단의 간판이자 스타 무용수인 박슬기는 안무가로 확장한 강효형 작품의 ‘원픽’ 주인공이다. 강효형은 ‘호이 랑’, ‘허난설헌-수경월화’ 등 국립발레단의 대표작을 무대에 올렸다. 그는 “박슬기는 누구라도 0순위에 꼽는 무용수”라며 “덕분에 제 작품의 ‘격’이 높아졌다고 생각해 저도 품앗이를 하고 싶었다”며 웃었다.
21년 우정 나눈 절친 국립발레단 솔리스트 강효형, 수석 무용수 박슬기 [국립발레단 제공] |
이번 작품은 박슬기의 여섯 번째 안무작이다. 박슬기 작품엔 언제나 ‘지금 오늘’의 우리 사회가 담긴다. 이번에 무대에 올리는 ‘OS’도 마찬가지다. 20분의 발레엔 일상 곳곳에 침투한 AI를 주제로, 사랑 이야기를 풀어냈다. 자신에게 가장 완벽한 사랑은 AI 여인이라고 믿는 남자의 이야기다. 인간 남녀의 사랑과 이별, AI를 만난 남자의 사랑, 넘지 못할 인간과 기계의 사랑에 절망한 남자의 이야기가 20분 안에 촘촘히 담겼다. 강효형은 불완전한 인간 여성으로 남녀의 사랑을 보여주고, 완벽한 AI 중의 하나로 무대를 메운다.
연습 현장에선 매순간 열정이 넘쳤다. 임신 5개월차에 시작된 연습에서 박슬기는 “태교는 둘째치고 호르몬 때문인지 감정 컨트롤이 안돼 쉽지 않았다”며 웃었다. 정제된 언어로 조근조근 이야기하다가도 어느 순간 본성을 드러내는 박슬기는 ‘호탕함의 대명사’다. 털털한 성격에 연습 중엔 의자에 올라가 무용수를 진두지휘하기도 하고, 종종 소리도 지른다.
“밤마다 무용수들한테 ‘소리 질러 미안합니다. 내일은 잘해봅시다’ 하고 문자를 보내기도 했어요. (웃음)”
절친의 성향은 사실 정반대다. MBTI로 치면 내향형으로 보이는 강효형은 ENFJ, 활발한 외향형처럼 보이는 박슬기는 의외로 INFP다. 한 곳에 빠지면 다른 곳을 보지 못하는 박슬기는 ‘몰입형 인간’이나, 한 번에 여러 가지 작업을 뚝딱 해내는 강효형은 ‘멀티형 인간’이다.
강효형은 “슬기 언니를 존경한다”며 “어릴 때부터 본 언니는 굉장히 성실하고 열정적이라 장난처럼 ‘수석의 품격’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고 했다.
“저 정도로 쏟아부어야 지금의 타이틀을 유지할 수 있는 거구나 싶어요. 사실 언니는 발레 빼고 모든 것에선 다 덤벙거리는데, 무대에 섰을 때 뿜어져 나오는 감정과 에너지, 동작 수행에 있어 안정감과 몰입도, 집중도가 엄청나요. 매번 본받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그의 이야기를 듣던 박슬기는 다시 호탕하게 웃으며 “멀티가 잘 안돼 안무가로는 고충이 많다”며 “여러 무용수를 한 번에 봐야 하는데 한 사람에 집중하면 다른 사람을 잘 보지 못한다”며 웃었다.
자신의 몸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무용수와 다른 사람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안무가는 역할이 완전히 다르다. ‘콰르텟 오브 더 소울’(영혼의 사중주)로 첫 안무에 도전한 박슬기는 이후 ‘스몸비’, ‘이매진’, ‘컬러링 유어 라이프’, ‘프롬 어 휴먼 빙’ 등 대여섯 편의 안무작을 무대에 올렸다.
강효형은 그의 작품에 대해 “짧은 시간에도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분명하고, 끝나고 나서도 한 번 더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라며 “무브먼트에서도 통찰력이 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번 작품 역시 짧은 시간 안에 촘촘한 기승전결로 완벽한 서사를 만들었다.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영화처럼 그려지는 전달력이 뛰어나다.
박슬기는 하지만 “아직은 안무가보다는 무용수로 표현하는 것이 더 편하다”고 했다. 안무가로 작품을 볼 땐 물가에 내놓은 애들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한다. “‘차라리 내가 하고 말지’라는 생각도 한다”며 웃는다. 오랜 시간 무대에 서며 수석 자리에 오른 만큼 무용수의 마음을 잘 헤아릴 수 있어서다.
21년 우정 나눈 절친 국립발레단 솔리스트 강효형, 수석 무용수 박슬기 [국립발레단 제공] |
“전 아직도 무대에 설 때마다 떨려요. 늘 긴장과 설렘의 복합적인 감정이 오가고 아르레날린이 올라올 때 좋은 공연을 만들 수 있어요. 무용수들이 이 과정을 힘들게 해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그들의 이상을 알기에 마음이 더 조마조마해요. 더 좋은 움직임을 뽑아내는 것은 안무가의 몫이기도 하고요. 안무에 함께 하는 무용수를 볼 때마다 대견하고 고마워요.” (박슬기)
강효형은 무브먼트 시리즈의 ‘요동치다’를 통해 안무가로 첫 발을 디뎠다. 전통음악 창작그룹 푸리의 곡을 통해 한국적 요소를 살려 휘몰아치는 움직임을 풀어낸 이 작품은 국내외에서 엄청난 효평을 받았다. 한국적 색채의 작품은 그의 강점이다. 박슬기는 “한국적인 호흡과 라인,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무브먼트가 안무가 강효형의 색깔을 보여준다”고 했다.
올해로 아홉 번째 시즌을 맞은 무브먼트 시리즈에서 강효형은 총 네 작품, 박슬기는 다섯 작품을 선보였다. 이 시리즈에 오른 많은 작품이 해외 공연을 가며 한국 발레계의 기반을 다질 안무가를 키워내고 있다. 강효형의 ‘요동치다’는 2020년 세계적 권위의 무용상인 ‘브누아 드 라 당스’ 유튜브 프로젝트 라인업에 선정됐고, 박슬기의 ‘콰르텟 오브 더 솔’은 지난해 일본 공연에 다녀왔다. 박슬기는 “무브먼트 시리즈를 통해 새로운 기회에 도전하고, 주어진 것이 아닌 내가 원하는 움직임과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갈증을 풀 수 있었다”며 웃었다.
강효형은 무브먼트 시리즈의 최대 수혜자다. 2015년 첫 안무 이후, 강효형은 오랜 시간 꿈꿔온 안무가로의 길로 접어들 수 있었다. 첫 작품 ‘요동치다’ 호평 이후 안무가 강효형에겐 많은 기회들이 찾아왔다. ‘호이 랑’, ‘허난설헌’과 같은 대작도 만들게 됐다. 그는 “무브먼트 시리즈는 안무가의 등용문이자 무용수 발굴의 장”이라며 “발레 안무가의 입지가 적은 한국에서 이러한 시도로 안무에 재능을 가진 창작자들을 육성하고 피라미드 계급의 발레단에서 보석같은 무용수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지금 강효형은 무용수이자 안무가로 자신의 세계를 넓혀가고 있다. 창작자로서 고민도 많다. 강호형은 “여러 작품들을 통해 심리적 번아웃을 겪으며 창작자의 길로 들어선 것 같다”고 돌아봤다.
“예술은 늘 경계선에 있더라고요. 초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리바이벌 돼야 클래식으로 살아남는데, 그러기 위해선 대중의 인정을 받아야 하니까요. 내 스타일을 구축하면서 같은 방식을 탈피해야 하고, 새로운 것을 찾아야 하는데 변화는 쉽지 않아 재능에 대한 의구심이 들 때도 많지만 이런 과정을 거쳐 제가 원하는 길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강효형)
강효형의 이야기에 박슬기는 대견한듯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출산 예정일이 석달 앞으로 다가와 나날이 배가 불러오지만, 박슬기는 매일 같이 발레단 연습실로 향한다. 늘 하던 대로 몸을 풀며 오늘을 준비한다. 국립발레단을 상징하는 ‘성실의 아이콘’이다. 그는 “걸을 수 있을 때까진 계속 나올 생각”이라며 “출산 후에도 상황이 허락하면 바로 복귀할 계획”이라며 웃었다.
sh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