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무용단 ‘몽유도원무’ 확장판 재탄생
2017년 첫 협업 “오랜 팬이자 영감의 원천”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만든 이상적 협업
일렉트로닉 뮤지션 하임, 현대무용가 차진엽, 거문고 연주자 심은용이 국립무용단 ‘몽유도원무’를 통해 만났다. [국립극장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서로가 서로에게 마지막 ‘퍼즐 조각’이었고, 빈틈없이 맞아 떨어지는 톱니바퀴였다.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서로를 채우자, ‘온전한 하나’가 완성됐다.
“오래 전부터 서로의 팬이었고, 영감의 원천이었어요.” (차진엽)
한 사람이 이야기를 꺼내자, 다른 두 사람도 가만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현대무용가 차진엽, 일렉트로닉 뮤지션 하임(HAIHM), 거문고 연주자 심은용(그룹 잠비나이 멤버). 2017년 차진엽의 ‘미인:미인-바디 투 바디(MIIN-BODY TO BODY)’를 통해 첫 협업을 한 이후 지난 8년의 시간동안 인연을 맺었다.
국립무용단의 ‘몽유도원무’(6월 30일까지, 달오름극장)는 세 사람이 함께 한 세 번째 작품이다. 춤은 음악이 되고, 음악은 춤을 이끈다. 춤은 스토리를 엮고, 음악은 스토리가 자리할 공간을 채운다. 무엇 하나 거슬림 없이 맞아떨어져 오묘한 쾌감을 주는 무대. 각자의 자리에서 성취를 일군 개성 강한 사람들이 ‘하나의 작품’을 위해 모인 ‘몽유도원무’는 이상적인 협업의 극치를 보여준다.
최근 국립극장에서 만난 세 사람은 “삐걱거림의 시간을 지나 서로를 탐구하고 탐색하니, 이젠 각자가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알아차리게 됐다”며 웃었다.
국립무용단 ‘몽유도원무’ [국립극장 제공] |
굽이진 고개마다 무거운 걸음을 옮긴다. 천 근의 무게를 짊어진 사람들, 멈출 수 없는 고단한 생(生)의 길. 희뿌연 모래 바람을 맞으며 오르고 또 오르는 길 어딘가에 숨은 ‘몽유도원’으로 향한다.
최초의 키워드는 ‘굽이굽이’였다. ‘몽유도원무’는 조선시대 화가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모티브로 삼은 작품. 현대무용가 차진엽(아트그룹 콜렉티브A(collective A) 대표 겸 예술감독)은 ‘몽유도원무’에서 한국춤을 춰 온 무용수들의 몸을 통해 한 편의 수묵화를 그렸다. 2022년 처음 무대에 오른 40분 분량의 이 작품은 현재 확장판으로 관객과 만나고 있다.
이미 잘 짜여진 작품을 늘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임은 “당시에도 어느 정도 마음에 딱 드는 구성이었다”며 “나름대로 괜찮은 구성 안에서 어떻게 확장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고 말했다.
40분 분량의 ‘몽유도원무’는 현실 세계의 고단함을 그리고, 이상 세계인 몽유도원을 매끄럽게 직조했다. 확장판을 준비하며 더해진 시간은 20분. 차진엽은 새로운 장면을 추가하는 쉬운 방법 대신, 기존 작품에서 보완할 부분을 찾아 손을 댔다. 그는 “40분 버전을 ‘미완성’이라고 생각했다”며 “다만 무엇이 미완인가에 대한 고민은 나의 숙제였다”고 말했다. “움직임을 연구하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와 구현하고자 하는 장면들을 실체화하는 것”은 차진엽 감독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국립무용단 ‘몽유도원무’ [국립극장 제공] |
고심 끝에 찾은 해답은 작품의 핵심을 관통했다. 고난 속에서도 찬란한 별빛을 만날 수 있고, 일상 안에서도 크고 작은 행복을 마주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몸으로 구현하고자 했다. 차진엽은 “‘몽유도원무’에선 거시적 관점과 미시적 관점을 넘나들고 교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며 “고단한 현실을 넘어서 아름다운 이상형을 마주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삶 곳곳에 이상향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했다. 모든 것은 ‘마음 먹기 달렸다’는 가치관이 이 안에서 그려진다. 미처 몰랐던 일상의 찬란함을 깨워주는 작품이다.
메시지를 음악으로 풀어내는 것은 하임과 심은용의 몫이었다. 작업은 하임으로 시작해 심은용으로 이어졌다. 앰비언트 사운드 위로 심은용이 거문고 연주를 입혔다. 하임은 “새로운 장면이 탄생한 것이 아니기에 기존 음악에서 ‘구렁이 담 넘어가듯’ 자연스러운 연결이 필요하겠다고 판단했다”며 “같은 분위기의 음악을 만들기 보다 환기를 줄 수 있는 음악으로 구성했다”고 말했다.
“굽이친 산세를 거시적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 그 안으로 들어와 축축한 이끼, 화사한 꽃과 벌을 마주한 신비로운 장면들을 생각하며 음악을 만들어갔어요.” (하임)
2년 전과의 차이점 중 하나는 심은용이 무대에서 라이브 연주를 하지 않고, 녹음된 음악을 입혔다는 점이다. 심은용은 “각각의 장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거문고 라인을 만들었다”며 “전통악기이지만 현대적인 사운드를 내는 거문고의 다채로운 소리와 기법을 담아 매 장면과 조화롭게 어우러지도록 연주했다”고 설명했다.
심은용은 술대로 현을 치고, 비비고, 두드리며 만드는 소리, 술대가 아닌 활로 켜는 주법으로 다양한 음악색을 냈다. 새로 추가된 장면에선 심은용의 즉흥연주도 들을 수 있다. 그는 “스스로 몽유도원 안에 들어간 생물체가 된 기분이 들었다”며 “만들어진 음악 안에 생명력을 불어넣고자 했다”고 말했다.
국립무용단 ‘몽유도원무’ [국립극장 제공] |
잔뜩 웅크린 어깨, 각자의 봇짐을 짊어진 아홉 명의 무용수. 삶은 춤이 됐다. 매일 오전 본격적인 연습 전 차진엽과 무용수들은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차진엽이 모든 작업을 할 때마다 시도하는 방식이다. 그에겐 “한 사람 한 사람을 관찰하고 알아가는 것이 영감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초연 이후 2년의 시간을 보낸 뒤 다시 만난 무용수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삶의 변화를 맞았다.
“누군가는 아이 엄마가 돼 육아의 시간을 보냈고, 누군가는 시간만큼 몸의 변화를 느끼기도 했어요. 내밀하고 사적인 대화를 주고받으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어떤 마음으로 춤을 대하는지 이야기를 나눴어요.” (차진엽)
국립무용단에 따르면 무용수들은 이 과정을 통해 짜여진 안무의 학습이 아니라 마음 깊이 와닿은 이야기를 몸으로 꺼내게 됐다. 무용수 한 명 한 명이 하나의 주제 안에서 자신의 감정들을 자연스럽게 풀어낸 것이다. ‘몽유도원무’가 국립무용단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차진엽의 예술적 방향성과 색깔을 담아낼 수 있었던 것은 이 과정 덕분이었다. 차진엽은 “컨템포러리 댄스를 한국 춤에 접목할 때, 그것(한국 춤)을 해체하거나 해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며 “어떻게 하면 이들과 융화될 수 있을지, 한국 춤의 몸성을 나의 방법론으로 수용할 수 있을지를 더 고민했다”고 말했다.
‘대화’는 모든 협업의 첫 단계였다. 무용수들은 물론 차진엽과 두 음악가가 작업하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서로가 서로의 팬”이었지만, 사실 “일로 만난 사이”였던 차진엽과 두 음악가 하임, 심은용은 매 작업 무수히 많은 대화의 시간을 가진다.
국립무용단 ‘몽유도원무’ [국립극장 제공] |
첫 만남 당시를 떠올리던 하임은 “협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가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라며 “우리 세 사람이 좋은 협업 파트너인 것은 서로가 원하는 지점에 대한 교집합이 일치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단계에 다다르기 위한 ‘노력의 시간’이 있었다. 하임은 차진엽과의 첫 협업 당시 나눴던 모든 대화를 녹음해 음악으로 만들었다. 차진엽은 “언어는 오류를 만들 수 있기에 (그것이) 어떤 의도와 뉘앙스로 표현했는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너무나 감동적이었던 것은 하임 감독님이 당시 모든 대화를 녹음해 작품과 딱 맞는 음악을 만들었고, 녹음 보이스 중 일부 대화 내용은 ‘미인’의 음악으로 차용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대화의 시간은 서로의 아이디어를 나누며, ‘좋은 작품’이라는 하나의 목적을 향해 나아가게 했다. 심은용은 “이젠 일을 하는 파트너이기 전에 사적으로 친한 언니 동생 사이가 됐다”며 “서로의 인생 이야기를 나누며 인격적 신뢰가 쌓였다. 두 사람과의 작업은 언제나 기다려지게 된다”고 말했다.
대화를 통해 터득한 ‘온전한 협업’은 서로를 향한 존중을 바탕으로 한다. ‘완벽함’에 다가서기 위해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지 않으면서”(심은용), “어느 한쪽에 일방적으로 맞추기 보단 서로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차진엽)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
이 과정을 거친 작품엔 어느 한 사람이 아닌 모두의 정서가 담긴다. ‘몽유도원무’ 역시 ‘모두의 이야기’가 채워졌다. 동시대 무용 안에 개인과 우리를 실어온 차진엽, 정통 클래식을 전공해 일렉트로닉 음악으로 확장한 하임, 전통음악과 대중음악의 선을 넘나든 심은용이 만나 한국의 전통춤을 기반으로 동시대 춤의 세계로 지평을 넓혀온 무용수들의 여정을 풀어냈다. 장르의 경계를 허물어 이질감 없는 조화를 만들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색깔이 ‘몽유도원무’라는 팔레트 안에 담겨 아름다운 어울림을 만들었다.
‘화룡점정’의 역할을 한 것은 국립무용단이었다. 차진엽은 “마지막 한 겹은 언제나 무용수”라며 “스스로 탐구하고 연구하면서 춤을 통해 또 다른 경지에 다가서려는 무용수들을 통해 숭고한 아름다움과 감동을 느꼈다. 이 사람들이었기에 ‘몽유도원무’가 완숙한 작품이 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심은용은 ‘몽유도원무’로 향했던 길을 이렇게 말했다. “모든 것의 ‘연결’이었어요. 안무, 음악, 조명, 영상 등 모든 스태프와 무용수 한 사람 한 사람이 연결돼 원팀(One team)이 된 긴 과정이 놀랍고 감동적인 ‘아름다운 연결’이었어요.” (심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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