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조는 2004년 시작한 예술의전당
40대 이상 5060세대 여성이 다수
쉽고 재밌는 해설 더하면 금상첨화
세종문화회관 산하 단체인 서울시합창단의 마티네 공연 ‘우리가곡으로 만나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해설을 맡은 이금희. [세종문화회관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전화 왔어요.”
‘로미오와 줄리엣’의 러브 스토리를 이어가는 도중 벨소리가 울리자, 해설자 이금희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한다. “시작할 때 전화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 줄이는 게 낫죠. 얼마나 다행이에요. 음악 나올 때가 아니라, 제가 이야기할 때 전화가 와서요. 얼른 끄세요. 이제, 이야기 계속 해도 될까요?” 이어 그의 입에서 들려오는 1597년, 무려 ‘명량해전과 같은 해’에 있었던 소년·소녀의 4박5일 간 불멸의 사랑 이야기에 관객은 흠뻑 젖어든다.
지난 21일 오전 11시, 빈 좌석은 단 한 곳도 없는 세종문화회관 산하 서울시합창단의 ‘우리가곡으로 만나는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장. 세종문화회관 관계자는 “서울시합창단에서 처음으로 기획한 마티네 콘서트인데 전석 매진”이라며 “50~60대 관객이 전체의 60% 정도고, 10~40대 관객들도 상당수 찾아왔다”고 말했다.
오전 11시와 오후 3시에 열리는 마티네(matinée, 평일 오전 및 낮 공연)가 새로운 공연 문화로 떠올랐다. 클래식을 시작으로 오페라, 국악, 뮤지컬 등 장르를 불문하고 낮 공연이 속속 등장하고 있는 것. 공연계 관계자들은 “공연 감상이 어려운 중장년 여성 관객을 대상으로 시작한 클래식 음악 공연이 다양한 장르로 확장, 보다 진화한 공연 형식을 만들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예술의전당 11시 콘서트의 7대 해설자 손태진 [예술의전당 제공] |
국내 공연계의 ‘마티네 콘서트’는 2000년대 시작됐다. 원조는 예술의전당 ‘11시 콘서트’. 2004년 9월 모험을 시작한 이 공연은 매월 두 번째 목요일, 관객과 만난다. 정통 클래식 연주에 해설을 더해 입문자부터 애호가까지 보통의 콘서트보다 저렴한 가격대(일반석 3만원)로 관객을 만나고 있다.
예술의전당 관계자는 “평일 오전 시간대인 점을 고려해 어렵고 무거운 분위기보다는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도록 교향곡의 일부 악장을 발췌해 소개하고 있다”며 “2004년 9월 첫 회부터 매진을 기록한 공연”이라고 귀띔했다.
예술의전당 ‘11시 콘서트’의 성공으로 각 공연장엔 이를 벤치마킹한 ‘마티네 공연’이 생기기 시작했다. 성남아트센터의 마티네 콘서트는 2006년 시작, 예술의전당과 함께 오전 시간을 책임지는 1세대 클래식 마티네 공연이 됐다. 이 공연의 콘셉트는 ‘클래식 초심자를 위한 평일 오전 공연’. 예술의전당과 차별화하고자 2020년까진 해마다 한 명의 작곡가를 선정, 그들의 작품 세계를 탐구했다. 2021년부턴 서양 음악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국가별 음악을 소개하고 있다.
성남아트센터 마티네콘서트 [성남아트센터 제공] |
양대 클래식 마티네 콘서트가 음악계에서 차지하는 영향력이 상당하다. 예술의전당이 매월 두 번째 목요일이라면, 성남아트센터는 매월 세 번째 목요일 관객과 만난다. 한 공연계 관계자는 “마티네 콘서트 마니아 관객은 둘째 주엔 예술의전당, 셋째 주엔 성남아트센터를 찾으며 한 달에 두 번, 목요일마다 출석 도장을 찍는다”고 귀띔했다.
클래식과 함께 마티네 콘서트의 적잖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국악이다. 국립국악관현악단은 2009년 5월부터 ‘정오의 음악회’를 시작했다. 관현악과 협주곡, 드라마와 영화 음악을 국악관현악으로 연주한 첫 번째 ‘정오의 음악회’는 유료 관객 27명에 그친 처참한 신고식을 치렀다. 하지만 그 해 9월 ‘스타 소리꾼’ 장사익의 등장으로 만석을 기록, 대표 국악 마티네 콘서트로 자리잡았다. 전통음악과 대중음악, 뮤지컬, 재즈 등의 장르를 결합한 ‘정오의 콘서트’는 객석 점유율이 최고 99%에 달하며, 누적 관객 수는 8만여 명에 달한다.
차 마시는 마티네 공연 정동다음 [국립정동극장 제공] |
정동극장은 클래식과 오페라를 다루는 ‘정동 팔레트’, 국악 장르를 다루는 ‘정동다음’ 등 두 편의 마티네 콘서트로 관객과 만난다. 매달 첫째 주 화요일 열리는 ‘정동다음’은 한옥 공간에서 차를 우려 마시며 즐기는 공연이다.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없는 공간에서 명상과 함께 계절에 어울리는 차를 마셔 인기가 높다. 관객도 단 50명만 받는다.
뮤지컬의 시간대 확장은 ‘마티네 콘서트’의 인기를 반영한 결과다. 특히 길게는 3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장르인 만큼 저녁 7시 30분에 시간을 내기 어려운 관객들에게 안성맞춤이다. 뮤지컬계에선 매주 수요일, 금요일 오후 2시로 낮 공연을 주로 추진 중이다. 최근 막을 내린 서울시뮤지컬단의 ‘다시, 봄’은 지난해엔 오전 11시, 올해는 오후 3시로 마티네 공연을 열며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
뮤지컬을 제외한 마티네 공연의 핵심은 ‘쉽고 재밌는 해설’이다. 클래식, 발레, 오페라, 국악, 합창에 이르기까지 해설자가 등장하지 않는 무대는 없다. 공연 자체가 ‘브랜드’인 경우도 있지만, 해설자의 역할이 공연의 질을 좌우하는 경우도 상당하다.
전통이 깊은 두 클래식 마티네 공연은 다양한 해설자로 관객과 만나왔다. 예술의전당 ‘11시 콘서트’는 피아니스트 김용배(2004~2008)를 시작으로 아나운서 유정아(2009), 첼리스트 송영훈(2009~2013), 피아니스트 박종훈(2014~2016), 조재혁(2017~2018), 비올리스트 김상진(2019~2021), 성악가 손태진(2022)에 이어 현재 배우 강석우가(2023-2024) 해설을 맡고 있다. 예술의전당 관계자는 “클래식 음악의 이해와 접근성을 높이는 해설과 스크린을 활용한 시각적 효과를 더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성남아트센터는 성악가 박종호(2006~2007)를 시작으로 음악평론가 장일범(2008~2009), 바리톤 김동규(2010), 뮤지컬 배우 카이(2011~2014), 배우 김석훈(2015~2021)을 거쳐 현재는 피아니스트 김태형(2022~현재)이 해설을 맡고 있다. 성남아트센터는 “관객과의 교감과 소통, 음악 이야기를 전문적으로 전달하고 공연 진행자로서 희소성이 높은 인물을 진행자로 선정한다”며 “김태형은 ‘연주자 대 연주자’로서 보다 편안한 분위기에서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고 말했다.
클래식 공연 해설의 경우 음악가 진행자와 비음악가 진행자로 구분된다. 각각의 장점이 다르다. 배우, 아나운서와 같은 비음악가는 대중적으로 친근하게 접근한다는 점이, 음악가 진행자는 전문성이 높다는 점이 장점이다. 한 관계자는 “연주자 출신의 진행자는 한층 깊이 있는 클래식 지식을 전할 수 있고, 연주자의 감정을 시선을 이해하며 공감대를 형성해 생생한 음악 이야기를 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아나운서 출신 이금희는 최근 마티네 공연에서 자주 찾는 ‘단골 해설자’다. 이금희는 2021년부터 국립국악관현악단의 ‘정오의 음악회’의 해설을 맡아 낯설고 어려운 국악관현악의 문턱을 낮추는 역할을 하고 있다. 최근엔 서울시합창단의 마티네 콘서트에서도 관객과 만났다. 귀에 쏙쏙 들어오는 전달력과 다정다감하면서도 친절한 해설이 그의 장점이다. 필요에 따라 연기와 생활 유머까지 더해지면 관객들이 한 눈 팔 새가 없다.
마티네 공연의 인기 이유는 중장년 세대의 공연 갈증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시간대 공연장을 찾는 관객층은 대부분 중장년 세대 여성 관객. 예술의전당 ‘11시 콘서트’의 경우 40대가 31.8%, 50~60대가 40%다. 성남아트센터는 40대가 30.4%, 50대가 23.9%다. 국립정동극장의 클래식 마티네 공연인 ‘정동팔레트’는 40대가 34.8%, 50대가 30.3%다. 특히 국립극장 ‘정오의 음악회’는 장르 특성상 50~60대가 73%나 차지할 만큼 압도적이다. 각 공연의 여성 관객 비율은 전 세대 아울러 80% 안팎이다.
물론 공연의 장르와 특성, 회차에 따라 관객의 연령대와 성별 분포는 달라진다. 예술의전당 관계자는 “평일 오전 시간대를 이용하여 50~60대 여성 관객와 저녁 공연 감상이 어려운 대상으로 기획했는데, 현재는 청년과 중년 관객의 비율이 증가하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예술의전당 ‘11시 콘서트’는 20~30대가 23.2%나 된다.
흥미로운 것은 재관람 비율이다. 각 공연장에 따르면 마티네 공연의 경우 재관람 비율이 평균 80% 안팎에 따른다. 성남아트센터 관계자는 “‘마티네 콘서트’의 재관람 관객 비율은 80% 이상으로 한 시즌 10회 공연을 모두 관람할 수 있는 시즌권 판매량도 전체 티켓 판매량의 6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충성 관객의 비중이 높다”고 말했다.
서울시뮤지컬단의 ‘다시, 봄’ [세종문화회관] |
뮤지컬의 경우 낮 시간대 공연에 학생들도 많이 찾는 편이다. 애초 중년 여성들의 이야기를 소재로 가져온 ‘다시, 봄’은 뮤지컬 시장에서 소외됐던 중장년 여성 관객들을 극장으로 불러온 공연으로 이름을 올리게 됐다. 김덕희 서울시뮤지컬단 단장은 “오전 11시 공연에 이어 오후 3시 공연을 시험 삼아 시도하면서 이 시간대에 수요가 있을지 확인해보고 싶었다”며 “저녁 공연과 병행하는데도 가장 먼저 매진된 공연이 오후 3시였다”고 말했다. ‘다시, 봄’의 경우 30~40대가 38%, 50~60대가 59%나 차지했다.
전 장르를 아우른 마티네 콘서트의 가장 큰 성취는 공연 문화 확산과 관객 확장에 있다. 예술의전당 ‘11시 콘서트’의 경우 중장년 관객을 넘어 방학 시즌이 되면 클래식을 처음 접하는 청소년 관객들의 단체 관람이 늘어난다. 예술의전당 관계자는 “클래식 입문자를 시작으로 애호가까지 다양한 관객층을 아우르며 관객 연령의 다양화, 세대 확장에 긍정적 역할을 하고자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오전 시간대 관객과 만난 국립국악관현악단의 ‘정오의 콘서트’는 전통음악과 대중음악의 경계를 허물며 국악관현악에 대한 편견을 깼고, 서울시합창단은 로미오와 줄리엣, 한국 가곡을 엮은 마티네 콘서트로 수요가 적은 합창 장르를 알리며 다양한 관객을 수용했다.
세종문화회관 산하 단체인 서울시합창단의 마티네 공연 ‘우리가곡으로 만나는 로미오와 줄리엣’. [세종문화회관 제공] |
클래식 마티네 공연의 또 다른 기여는 차세대 음악가들이 설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고, 합리적인 티켓 가격으로 질 좋은 연주를 들려준다는 데에 있다. ‘11시 콘서트’에선 마린 알솝의 제자로 클래식, 국악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약 중인 정예지(6월), 2024 루마니아 에르히 베스켈 지휘 콩쿠르에서 입상한 박근태(7월)와 같은 젊은 지휘자의 무대를 볼 수 있다. 성남문화재단의 ‘마티네 콘서트’에선 이승원, 홍석원, 김광현, 최수열 등 국내 클래식계를 이끌고 있는 지휘자들과 베를린 슈타츠카펠레 최초의 동양인 여성 종신 악장인 바이올리니스트 이지윤(6월), 핀란드 방송교향악단 종신 제1수석 오보이스트 함경(11월), 2018년 윤이상 국제음악콩쿠르 우승에 빛나는 첼리스트 이상은(12월)의 공연이 대기 상태다.
업계 관계자들은 “신진 연주자와 지휘자를 발굴, 이들이 성장할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하면서도 기존 저녁 시간대 공연보다 월등히 저렴한 티켓 가격으로 최정상급 연주자들의 무대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 클래식 마티네 공연의 장점”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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