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보훈의 의미…올해는 모차르트 레퀴엠
학구적 지휘자 김선아·모험적 MZ 지휘자 진솔
모차르트 레퀴엠으로 각기 다른 무대를 만든 진솔, 김선아 지휘자(왼쪽부터). 두 사람은 국내 클래식 음악계를 대표하는 여성 지휘자이자, 합창 지휘로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인연을 맺은 ‘스승과 제자’ 사이이기도 하다. 고승희 기자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저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Requiem aeternam dona eis Domine)’. (레퀴엠 ‘입당송’ 중)
‘치유의 합창’이 시작되는 계절이다. 슬픔과 위로의 음악인 ‘레퀴엠(Requiem)’. 유럽에선 매년 11월, 합창단과 오케스트라가 빚어내는 진혼곡을 만나지만, 한국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지금 이 계절, 이달에 ‘레퀴엠’이 슈퍼스타로 떠오른다.
부천시립합창단을 이끌고 있는 김선아 지휘자는 “유럽과 달리 한국은 아주 특수적으로 매해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레퀴엠’을 연주해온 전통이 있다”고 말했다. 지난 12일 지휘자 진솔이 이끄는 아르티제를 시작으로 부천시립합창단(6월 20일, 부천아트센터), 부산시립합창단(6월 27일), 인천시립합창단(6월 27일)이 레퀴엠을 부른다.
고전 시대의 모차르트, 낭만 시대의 베르디·브람스·포레, 근현대의 리게티·브리튼·펜데레츠키·한국인 작곡가 류재준까지 수많은 작곡가들이 ‘죽은자를 위한 미사곡’을 썼다. 올해 대세는 모차르트의 미완의 역작 ‘레퀴엠’이다. 세 단체(아르티제, 부천, 인천)가 3주간 바통을 이어받듯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해석한다. 김선아는 “서로 짠 것도 아닌데 올해는 모차르트로 통일”이라며 웃었다. 부천시립합창단의 경우 2023년엔 포레, 2022년엔 브람스의 레퀴엠을 올렸다.
모차르트 레퀴엠으로 각기 다른 무대를 만든 김선아(54), 진솔(37) 지휘자와 ‘6월의 진혼곡’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두 사람은 국내 클래식 음악계를 대표하는 여성 지휘자이자, 합창 지휘로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인연을 맺은 ‘스승과 제자’ 사이다.
두 지휘자의 방대한 음악 세계를 ‘레퀴엠’에 한정할 순 없다. 그럼에도 ‘레퀴엠’에 한정해 표현하자면 진솔은 ‘레퀴엠 새싹’, 김선아는 ‘레퀴엠 장인’이다.
부천시립합창단을 3년째 이끌고 있는 김선아는 사실 ‘고음악 연주’의 대가다. 2007년 바로크 음악 전문 합창단인 ‘콜레기움 보칼레 서울’을 창단해 한국 클래식 음악계에 굵직한 족적을 써내려가고 있다. 국공립 단체를 동시에 매만지는 흔치 않은 음악가다.
그가 레퀴엠을 처음 연주한 건 2015년. 20세기 프랑스 작곡가 모리스 뒤뤼플레의 ‘레퀴엠’이 시작이었다. 김선아는 “오르간만 가지고도 할 수 있는 공연이었던 뒤뤼플레를 시작으로 모차르트, 브람스, 포레로 이어왔다”고 말했다.
진솔은 올해 ‘모차르트 레퀴엠’으로 10년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2012년 창단해 그가 이끌고 있는 아르티제의 ‘레퀴엠 시리즈’다. 한 해에 한 명씩, 10명 이상의 작곡가로 기획했다. 합창을 통해 지휘자에 입문해 클래식은 물론 게임 음악까지 영역을 확장한 그는 “스스로 발전하며 꾸준히 이어갈 수 있는 프로젝트이자 또래의 젊은 사람들이 함께 위로 받을 수 있는 시리즈”라며 “고단한 세대들을 위로하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했다”고 말했다.
부천시립합창단을 3년째 이끌고 있는 김선아는 사실 ‘고음악 연주’의 대가다. 2007년 바로크 음악 전문 합창단인 ‘콜레기움 보칼레 서울’을 창단해 한국 클래식 음악계에 굵직한 족적을 써내려가고 있다. [부천시립합창단 제공] |
그 선택이 ‘레퀴엠’이라는 점은 의외다. 대작 프로젝트를 향한 ‘과감한 도전’인 데다, 클래식 애호가가 아니라면 상당히 낯선 음악이기 때문이다. 진솔은 그러나 “의외로 ‘레퀴엠’이라는 단어가 영화, 게임, 애니메이션에도 많이 등장해 젊은 세대에게도 진입 장벽이 낮다”고 귀띔했다. 배우 송혜교가 주연인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에도 포레의 레퀴엠 제4곡 ‘피에 예수(Pie Jesu)’가 곳곳에 담겼다.
10년의 시간을 두고 ‘레퀴엠’의 세계를 펼쳐내고 있는 두 지휘자는 나란히 새 역사를 쓰는 중이다. 김선아는 ‘최초’의 아이콘이다. 그가 음악감독으로 콜레기움 무지쿰 서울이 연주하고 콜레기움 보칼레 서울이 합창한 ‘모차르트 레퀴엠’은 국내 최초로 음반으로 담겼다. 진솔의 최근 공연은 김선아에 이어 두 번째 모차르트 레퀴엠 음반이 될 예정이다.
두 지휘자가 말하는 레퀴엠은 ‘위무(慰撫)의 음악’이다. 김선아는 “레퀴엠이 부각된 것은 바로크 시대로, 무반주 합창과 단선율로 연주했던 이전과 달리 바로크 시대로 넘어오며 기악과 함께 연주해 가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며 “드라마틱한 음악에 위로의 메시지를 강조하며 관객을 어루만지는 곡이라는 점이 ‘레퀴엠’의 힘”이라고 했다.
사제이고 선후배인 두 지휘자의 성향은 완전히 다르다. 김선아가 ‘계단식 성장’을 추구하는 ‘학구적 지휘자’라면, 진솔은 대범하게 도전하는 ‘모험적’ MZ(밀레니얼+Z) 지휘자다.
김선아는 콜레기움 보칼레 서울의 창단 이후, 단원들에게 ‘음악적 성장’과 비전을 제시하며 ‘악파 도장깨기’를 시작했다. 그는 “도를 닦는 사람처럼, 바로크 시대부터 독일, 이탈리아 등 다양한 악파를 훑었다”며 “음악이 좋아 공부하려고 모인 사람들이니 우리끼리 공부해 발표하겠다는 마음이었다”고 돌아봤다.
그는 정석대로 ‘정도(正道)’를 걸었다. 성큼성큼 뛰어넘기 보다 한 계단 한 계단 착실히 걸었다. 가급적 A부터 시작해야 마음에 찝찝함이 남지 않는 타입이다. 김선아는 “만약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1868년)을 연주하려면 ‘두 개의 모테트’(슈만의 죽음 이후, ‘죽음의 음악’을 명제로 숙고하던 중 ‘레퀴엠’ 구상의 뿌리가 된 곡·1860년 완성) 반드시 거쳐야 하고, 멘델스존의 ‘엘리야’(1846년)를 하기 위해선 ‘시편’(1843년)을 먼저 연주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한 단계씩 거슬러가는 방식을 선호한다”고 했다.
“그 과정이 제겐 피와 살이 됐어요. 지난 10년을 돌아보면 매 연주를 통해 좋은 작품을 만나며 성장할 수 있었어요. 콜레기움 보칼레 서울이 잔근육을 키우는 시간이었다면, 같은 시기 바흐 솔리스텐 서울로는 겁 없이 매년 큰 작품을 올리며 커나갈 수 있었어요.” (김선아)
그의 이야기를 듣던 진솔은 “나이와 분야를 불문하고 많은 예술가들이 김선아 선생님의 학구적인 모습과 근거에 기반한 해석, 깊이 있는 탐구를 굉장히 존경한다”고 말했다.
시대의 변화와 풍파 속에 내던져진 30대 여성 지휘자 진솔의 도전은 청년 세대의 고민과 닮았다. 그는 “제 또래 예술가들은 여유가 없다”며 “무모해 보이는 프로젝트를 설정하고, 그것을 완성해나가는 과정을 통해 나의 세계를 단단하게 구축해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지휘자 진솔. 이상섭 기자 |
진솔은 ‘레퀴엠 시리즈’에 앞서 구스타프 말러 교향곡 전곡을 연주하는 ‘말러리안 프로젝트’를 시작, 지금도 이어가는 중이다. 이 시리즈는 말러리안(말러 팬덤)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으며 클래식 음악계에 신선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덕분에 지휘자 진솔은 예술가로서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는 한편, 스타 위주의 시장에서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계기도 됐다.
물론 ‘레퀴엠 시리즈’ 도전엔 고민이 많았다. 그는 “현대 레퀴엠은 시도 자체에 의미가 있지만, 모차르트의 경우 성역을 건드린 느낌이 있었다”며 “해석에 있어 많은 고민을 했다. 다른 레퀴엠에 대해서도 (김선아) 선생님께 조언과 도움을 구하고 싶은 마음”이라고 고백했다. 제자의 이야기를 듣던 김선아는 “엄마이자 선생의 마음에서 굉장히 대견했다”며 “(진솔의 공연에서) 드라마틱한 음악 해석과 추진력 있게 끌고 가는 힘이 강하게 느껴졌다. 설득력을 갖춘 해석 능력이 돋보였다”며 칭찬했다.
꾸준한 도전이 쉽지 않은 것은 매순간 한계를 마주하기 때문이다. 특히 민간단체를 이끌며 원하는 음악을 만들어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대관부터 연주까지, 현실적 난관이 도처에 산재하고 있다. 진솔은 “하나의 시리즈를 위해 모인 사람들이기에 단 몇 번의 리허설로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 설득하는 과정이 쉽지는 않다는 것을 느낀다”며 “내가 추구하는 음악이 근간을 이뤄야 한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고 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도전엔 멈춤이 없다. 김선아는 “급진적이든 단계적으로 하든 무언가를 추구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이 과정들을 통해 연주자는 성장하고, 성장의 폭 역시 달라진다”고 말했다.
아직 ‘못다 이룬 꿈’도 많다. 김선아는 “은퇴하기 전까지 고악기로 고전시대 음악을 모두 연주하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그 시대의 악기로 당시의 음악을 연주해야 당대의 음악과 가장 가까운 음악이 될 수 있다는 신념 때문이다. 진솔은 “허리세대의 예술가로서 윗세대와 아랫세대를 연결”하는 음악가가 되고 싶다”며 “클래식 음악에서 멀어진 젊은 관객들이 공연장으로 찾아올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젝트를 통해 장르의 지평을 넓히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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