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절친 ‘음악 단짝’으로 듀오 리사이틀
25년 '절친 듀오' 피아니스트 김태형, 바이올리니스트 이지혜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25년지기면 성격은 잘 맞냐”고 묻자 말 대신 알쏭달쏭한 표정을 짓는다. ‘부정 표현’은 대체로 입에 올리지 않는 ‘선의의 옹호자’ 김태형(39, INFJ). 그의 표정을 간파한 ‘대문자 E(외향형)’ 이지혜(39, ESFP)는 깔깔거리며 호탕한 웃음을 짓는다.
“절대 아니란 얘기예요.” (이지혜) 그러더니 “우린 극과 극으로 다른데 서로를 가장 잘 알게 된 사람 중 하나”라고 말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1998년. 예원학교 1학년 때였다. “친하진 않았지만 존재는 알았던” 사이에서, 시간을 달려와 ‘절친’ 듀오가 됐다. 세 번째 듀오 리사이틀(6월 8일, 예술의전당)을 앞두고 서울 서초구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피아니스트 김태형과 바이올리니스트 이지혜를 만났다.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며 이지혜는 이렇게 말했다.
“눈빛만 봐도 알던 사이에서, 이젠 듣기만 해도 통하는 사이가 됐어요.” (바이올리니스트 이지혜)
두 사람은 예원학교, 서울예고, 한국예술종합학교를 함께 다닌 동갑내기다. 김태형이 기억하는 중학교 시절 이지혜는 “그 때부터 정말 잘하는 친구”였다. 그는 중학교 2학년 때 이지혜가 연주한 에두아르 랄로(1823~1892)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정말 기억에 남는 몇몇 연주자의 곡 중 하나”로 꼽는다.
“어떤 곡을 듣거나 향을 맡으면 갑자기 타임머신을 타고 한 시절로 돌아갈 때가 있잖아요. 랄로를 들을 때면 언제나 그 시절 그(이지혜의) 연주가 생각나요.” (김태형)
25년 '절친 듀오' 피아니스트 김태형, 바이올리니스트 이지혜 |
김태형에겐 강렬한 첫 기억을 남겼지만, 이지혜의 중학교 시절은 김태형에 대한 기억이 많이 남아있진 않았다. “이것도 다른 점이긴 해요. 전 진짜 기억을 못해요. 오늘도 리허설이 있었는데 제가 뭘 물어보면 ‘지혜 교수님 또 물어보네’ 약간 이런 느낌이에요. (웃음)” (이지혜)
두 사람이 처음 호흡을 맞춘 것은 한예종 재학 시절이었다. 김태형은 “2006년경 일본 이시카와 페스티벌에서 프로코피예프 바이올린 소나타 2번을 연주할 때 끊임없이 쏟아내는 (이지혜의) 에너지에 무척 놀랐다”고 했다. 잊지 못할 ‘연주 경험’으로 남았지만, 당시는 서로의 음악과 연주를 알아가던 때였다.
팀을 꾸린 것은 2013년이다. 독일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의 첼리스트인 사무엘 루츠커와 함께 ‘트리오 가온’(Trio Gaon)이라는 앙상블을 만들어 10년 넘게 활동하고 있다. 김태형이 먼저 연락해 ‘함께 하자’고 제안했다. 트리오 가온은 주로 독일을 주무대로 활동하고, 한국에서도 여러 번 관객과 만났다.
“피아니스트는 혼자 하는 직업이기에 실내악 기회가 아예 생기지 않을 수도 있어요. 팀만 생기면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레퍼토리가 브람스 트리오 1번이었어요. 연주를 하고 난 뒤 너무 좋았어요. 정말 기가 막혔죠. 오프닝 몇 분까지는 1000번까지도 들을 수 있겠다 싶더라고요. 그 소중하고 값진 경험을 아직 기억하고 있어요.” (김태형)
25년 '절친 듀오' 피아니스트 김태형, 바이올리니스트 이지혜 |
트리오 결성 이후 2년 즈음 지나자 “맞춰간다는 생각도 들지 않을 만큼 잘 맞았다”고 한다. “그 때부터 말 그대로 눈빛만 봐도 아는 사이가 됐던 것 같아요.”(이지혜) 두 사람이 서로를 ‘음악 단짝’이자, ‘음악적 동반자’라고 말할 수 있는 때였다.
트리오로도 듀오로도 함께 해온 시간이 길다. 긴 시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을 묻자 이지혜는 “오직 인내 뿐”이라며 웃었다. 꼼꼼한 계획형(J) 인간과 유연한 즉흥형(P)이 만났기에, 이들의 관계엔 ‘양보’와 ‘이해’가 필요했다. 하지만 이 둘은 오히려 서로가 ‘이지혜화, 김태형화’됐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계획적 성향’에서 서로를 닮아갔고, 말하는 방식에서 서로에 대한 이해가 높아졌다.
“서로를 잘 알아가는 시간은 필요했어요. 말을 했을 때 이해하는 방식이 특히 달랐거든요. 제가 ‘좋다’, ‘싫다’고 표현하며 직관적으로 음악을 듣는 편이라면, 태형은 ‘이건 무슨 색깔 같지 않아?’라며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죠. 그런 점에서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어요.” (이지혜)
트리오의 경험이 쌓여 듀오로 호흡을 맞출 땐 “‘눈빛만 봐도’의 단계를 넘어 듣기만 해도 서로를 감지해낸다”고 김태형은 돌아본다. 그는 “같이 잘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서로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소리만 듣고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이에 이지혜는 “호흡만 들어도 서로를 느껴 이젠 더 대화가 사라졌다”며 웃는다.
정반대의 성향에도 최상의 ‘음악 파트너’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서로의 음악에 대한 신뢰와 존중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지혜는 “성향이 달라 사람 대 사람으로 맞춰가는 과정은 필요했지만, 음악에 있어선 처음부터 불편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며 “워낙 예민한 귀와 센스가 좋은 연주자라 일부러 맞추지 않아도 함께 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했다.
25년 '절친 듀오' 피아니스트 김태형, 바이올리니스트 이지혜 |
서로의 음악 색깔에 대한 질문을 던지자 이지혜는 “(김태형의 음악은) 모네의 그림 같다”고 툭 내뱉었다.
“세상의 모든 색이 다 들어가 있는, 꽃을 많이 그린 그림이요. 가까이 보면 다채로운 색이 들어가 있는데 멀리서 보면 너무나 완벽한 조화를 이룬, 그런 연주자예요.” (이지혜)
‘칭찬 습격’에 한 짐을 짊어진 김태형은 이지혜의 음악 색깔을 “한 소절만 해도 아주 매력적으로 들리는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음악을 감각적으로 받아들이다 보니 같은 연주를 해도 더 끌리는 사람이죠. 음악가로서 마음이 끌리고, 심지어 배우고 싶게 해요. 그래서 이렇게 오래 함께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김태형)
세 번째 듀오 리사이틀에선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제10번’과 쇤베르크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판타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바이올린 소나타 E플랫장조’를 골랐다. 이지혜가 정한 프로그램이다. 동양인 최초, 여성 최초로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제2바이올린 악장으로 임명되어 고(故) 마리스 얀손스(Mariss Jansons)와 수많은 무대를 만들며 그에게 깊은 의미를 남겨준 작곡가들이다.
김태형은 “제안과 통보 사이 어딘가였다”며 “음악적 흐름과 구성이 좋은 프로그램이었기에 다른 의견을 낼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며 웃었다. 이지혜는 프로그램의 관전 포인트에 대해 “베토벤과 쇤베르크는 인생 말년에 쓴 작품, 슈트라우스는 스물셋, 사랑이 넘치던 시절에 쓴 곡”이라며 “삶의 시작과 끝에서 써 내려간 곡을 통해 ‘온도의 차이’를 느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오랜 시간 걸어온 음악의 길은 두 사람에게 매 순간 새로운 미래를 열어주고 있다.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3위에 올랐고, 2015년부터 독일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의 제2바이올린 악장으로 활약해온 이지혜는 지난해부터 한예종 기악과 교수로 학생들과 만나고 있다. 세계 유수 국제 콩쿠르에서 수상한 김태형은 엘리소 비르살라제, 헬무트 도이치, 크리스토프 포펜 등 세계적인 거장들에게 받은 가르침을 경희대에서 학생들을 전하고 있다. 성남문화재단의 마티네 콘서트의 진행자로도 활약하고 있고, 오는 7월부턴 서초문화재단의 실내악 코칭 프로그램(‘서초엠. 스타즈’)의 음악감독으로 함께 한다.
활동 영역을 넓혀가면서도 변치 않는 것은 “음악을 대하는 마음”이다. 이지혜는 “음악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것, 두 사람 모두 음악이 먼저이고, 음악 앞에선 겸손하고 진지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음악을 대하는 태도가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요란하지 않게, 그저 묵묵히 본인의 길을 헤쳐나가는 연주자, 음악가의 길을 바라고 있어요.” (김태형) 김태형의 이야기를 듣던 이지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더했다.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연주자를 볼 땐 무척 행복해 보여요. 요란 떨지 않으면서 자신을 지키고, 올곧게 음악을 하니 가능한 것 같아요. 전 음악을 오래하고 싶어요. 때론 실수도 하고 스트레스도 생기겠지만, 내가 왜 음악을 하고 싶었는지 본질을 잊지 않으면 음악을 오래 하게 될 것 같아요.” (이지혜)
sh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