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월 만에 다시 만난 조슈만
깔끔함의 극치 들려준 ‘운명’
정명훈과 도쿄필, 협연자인 피아니스트 조성진 [크레디아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하나하나 공들인 음표들이 물잔에 떨어진 잉크처럼 서서히 번져갔다. 화려하진 않지만 유려했다. 신중하게 그리고 담담하게 누르는 음표마다 응축된 감정들이 내려 앉았다. 조성진의 슈만은 느릿느릿, 꾹꾹 눌러 진심을 써내려간 손편지였다.
불과 6개월. 지난해 11월 안드리스 넬손스가 이끄는 독일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한 조성진이 이번엔 정명훈이 이끄는 도쿄필하모닉 오케스트라(7일, 예술의전당)와 다시 한 번 같은 곡을 연주했다.
슈만이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인 아내 클라라 슈만을 위해 작곡한 유일한 피아노협주곡인 이 곡은 강력한 피아노의 타건으로 시작을 알린다.
계절의 변화 만큼이나 조성진의 피아노는 완전히 다른 옷을 입었다. 조성진의 완벽주의는 변함이 없었으나, 계절의 변화 때문인지 시간의 흐름 때문인지 이날의 슈만은 다른 사람의 연주인 것처럼 이전과는 또 다른 접근이었다. 6개월 전이 겨울이었다면, 이날은 완연한 봄날이었다.
정명훈과 도쿄필, 조성진 [크레디아 제공] |
차가우리만치 선명하고, 그러면서도 기선제압하듯 포문을 열었던 게반트하우스와의 연주 때와 달리 도쿄필과의 시작은 굳이 앞서나가려 하지 않았다. 강력한 첫인상을 주되 앞으로의 방향에 힌트를 던져주듯, 천천히 자기 고백을 시작했다.
도쿄필과의 호흡이 내내 매끄러웠던 것은 아니다. 조성진은 이전과 달리 느린 호흡으로 음악을 끌고 갔다. 때때로 의도적으로 속도를 늦추며 자신이 쌓아온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던 사이 오케스트라와의 호흡이 어긋날 때도 있었지만, 조성진은 이날 자신의 연주만큼 신중하게 오케스트라의 음악을 충분히 듣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자칫 크게 어긋날 수 있었던 순간마다 악단의 소리를 들으며 때때로 반주자가 되기를 자처했다. 피아노와 목관의 대화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이날의 ‘킬링 포인트’는 1악장 카덴차였다. 박자와 템포를 자유자재로 가지고 놀며 담담하게 전달했던 감정의 속내를 조금 더 끄집어내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의 안에 일고 있는 무수한 변화를 보여준 연주였다.
애끓는 감정들을 시리도록 선명하게 표현, 화려한 기교를 보여줬던 지난해 슈만과는 달리 조성진의 현재는 온화한 조화로움이 돋보였다. 애써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고, 맞서기보다 함께 섞이려 한 협연자의 정서가 고스란히 전달됐다. 때문에 도리어 조성진의 연주와 음색은 도리어 돋보였다. 현악 파트와 대비를 이루는 음색으로 피아노의 감정은 더 큰 진중함과 진정성을 입었다.
정명훈과 도쿄필, 조성진 [크레디아 제공] |
따뜻한 위로는 앙코르에서도 이어졌다. 슈만의 ‘트로이메라이’에서였다. 천천히 누르는 한 음 한 음은 누군가의 고된 어깨를 어루만지기에 충분했다. 기습적으로 이어진 두 번째 앙코르 하이든 피아노 소나타는 앞의 두 곡과는 완전히 다른 음색과 분위기를 들려줬다. 선명하고 청아한 음들이 단 하나의 오차도 없이 화려하게 움직였다. 귀를 간지럽히며 굴러가는 음들의 향연으로 듣는 재미가 큰 곡이었다. 이젠 ‘조이든’이 될 차례였다.
이날 공연의 메인 디쉬는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이었다. 정명훈과 도쿄필은 인연이 깊다. 2000년 처음 호흡을 맞춘 이후 정명훈 지휘자가 서울시향을 떠난 후인 2016년 외국인 최초의 명예 음악감독이 됐다. 당시 노먼 레브레히트는 이를 두고 “한국은 잃고 일본은 얻었다”는 칼럼을 쓰기도 했다. 오랜 인연이 만든 신뢰와 존경의 마음은 ‘운명’을 통해 여실히 드러났다.
정명훈과 도쿄필, 조성진 [크레디아 제공] |
음악 역사상 시대와 세대를 초월한 최고의 히트곡인 ‘운명’은 모두가 다 아는 그 음, ‘빠바바밤’으로 시작한다. 절도있는 지휘동작으로 출발한 ‘운명’은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었다. 악기 하나 하나의 소리가 생생히 살아나면서도 조화로운 소리가 만들어져 하나로 움직였고, 음악 사이사이 치열한 ‘밀고 당기기’로 긴장감이 높아졌다. 호른과 일부 악기군의 실수가 있었지만 악단은 성실하게 지휘자를 따라갔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이날 도쿄필과 정명훈은 한 몸이었다. 악단은 지휘자의 음악적 구상과 이상을 열성적으로 따랐다. 딱 떨어지는 깔끔한 연주는 이날의 도파민 제조기였다.
sh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