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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터뷰] 문훈숙 유니버설발레단 단장 “발레는요? 어쩌면 연꽃이죠”
발레단 창단 40주년 앞둔 열정인생 스토리
진흙탕서 인내 끝에 피우는 연꽃, 그게 삶
세계적 발레리나 우뚝서기까지 연습 또 연습
40돌 기념 ‘로미오와 줄리엣’ 준비로 구슬땀
12년만에 한국무대의 명작 정성으로 준비
고통은 껍질을 벗기고 새 자아를 찾게해줘
문훈숙 유니버설발레단 단장이 지난 2일 오후 서울 광진구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헤럴드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진흙탕에서 인고의 세월을 거쳐 활짝 꽃을 피우는 연꽃을 좋아한다는 그는 연꽃무늬 원피스에 하얀 재킷을 입고 자신의 발레단 40년 인생을 얘기했다. 수많은 고통 속의 연습은 새로운 자아를 찾아가는 작업이었다고 그는 회고한다. 이상섭 기자/babtong@heraldcorp.com

[헤럴드경제=김영상 기자] 만나자마자 그에게 대뜸 물었다. “어떤 꽃을 가장 좋아하세요?” 잠깐 당황하는가 싶더니 연꽃이란다. “모든 꽃을 좋아하지만, 하나를 꼽으라면 연꽃을 사랑합니다. 흙탕물에서도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연꽃. 꽃 빛깔이 너무 아름답고 큰 초록 이파리도 좋아요.” 그러더니 덧붙인다. “연꽃은 어려움을 딛고 일어나 승화하는 인간의 정신(Human spirit), 즉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과 의지의 상징인 것 같아요. 우리나라 역사와 그 역사를 꽃피운 우리 민족의 삶을 잘 표현하는 꽃인 것 같아 더욱 정이 갑니다.”(문훈숙 유니버설발레단 단장)

따뜻한 햇살이 초록 나무들로 물들이며 온몸을 감싸는 계절의 여왕 5월. 흰쌀을 칭칭 감으며 하얀 꽃물결을 출렁이는 이팝나무가 싱그럽게 웃는 5월 둘쨋날. 서울 광진구 유니버설아트센터를 찾았다. 문훈숙(61) 유니버설발레단 단장을 만나기 위해서다. 한국적인 몸짓을 표방하며 발레 불모지 우리나라에 발레 문화를 일으켰던 유니버설발레단은 올해로 불혹(不惑·40주년)을 맞이했고, 역사가 깊은 그 발레단 선두에서 열정을 바쳐온 이가 문 단장이다. 그러니 그의 ‘40년 스토리’를 듣기 위한 인터뷰였다.

꽃 질문을 먼저 던진 것은 그의 삶의 단초를 정갈하게 가늠하고 싶어서였다. 한국적 창작 발레로 발레 대중화 선풍을 일으켰던 〈심청〉을 아껴서일까. “심청을 많이해서 그런지 연꽃이 좋다”는 말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연꽃의 꽃말은 순수(purity)와 우아함(elegant)이다. 진흙탕에서 시련과 고초를 감수한 끝에 순박하고도 우아한 꽃을 피우는 연꽃. 수많은 고통스런 연습 끝에 발레를 완성해갔던 문 단장의 지난날 인생을 오버랩해보면 최애(最愛)의 꽃으로 연꽃을 점찍은 이유가 공감이 간다. 그러고보니 입은 원피스 전체가 연꽃무늬다. 그 위에 하얀색 재킷을 걸쳤는데 하늘하늘하다.

아트센터 주변은 조용했지만 내부는 작품 연습으로 분주했다. 창단 40주년 기념작(로미오와 줄리엣)을 올리기 위해 단원들은 한창 구슬땀을 흘렸다. 40돌 기념작품 케네스 맥밀란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오는 5월10~12일 사흘간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관객과 만난다. 문 단장은 “며칠전 영국에서 연출가가 한국에 왔고, 막판 캐스팅까지 끝냈다”며 “본격적으로 작품을 올리기 위한 무대에서의 실전연습 열기가 불을 뿜고 있다”고 귀띔한다.

문 단장이 2일 오후 서울 광진구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자신만의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상섭 기자

▷발레단 창단 40주년 기념작품은 잘 준비하고 있나요.

-로미오와 줄리엣은 1976년 세종문화회관 개관 공연으로 로얄 발레가 공연을 했고요. 이후 36년만인 2012년에 우리가 국내에서 초연을 올렸고 이번에 12년만에 다시 관객께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해외로 가야만 볼 수 있는 작품인데, 국내에서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니까 많은 분들이 놓치지 않고 이 명작을 보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유니버설발레단 창단 40주년(5월12일)이 다가왔는데요. 발레단 40주년은 우리 사회와 문화에 어떤 의미가 있고, 40주년을 맞아 어떤 준비를 하고 있나요.

-발레단이 창단되던 1984년 당시 한국 발레는 열악한 상황이었습니다. 우리 발레단은 창단을 하면서 국내 최초로 세계적인 교육자와 교육 시스템을 도입했습니다. 최초로 해외 라이선스 작품을 소개하고 해외 공연 진출,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는 창작 발레 개발, 발레 대중화 등에 기여했다고 봅니다. 어떻게 보면 비포장 도로를 가고 있던 한국 발레를 위해 고속으로 달릴 수 있는 도로를 놓고, 우리나라 발레 발전을 앞당긴 견인차 역할을 했다고 자부합니다. 올해 40주년을 맞아 한국발레의 새로운 획을 그었다는 창작발레 〈코리아 이모션 情〉, 대중화를 위한 작품 〈더 발레리나〉 등을 준비했습니다. 관객께서 발레단에 준 사랑을 보답하기 위해 대작 〈로미오와 줄리엣〉과 〈라 바야데르〉도 무대에 올리는 것이고요. 한해를 마무리하는 연말 의식이 된 송년발레 그리고 지역사회를 위한 지역공연으로 40주년을 의미있게 보내려 합니다.

▷발레단이 추구하는 예술적 표방점은 무엇인가요.

-발레단 40년 역사 중 20년은 ‘한국발레 세계 정상’을 목표로 앞만 보고 양적, 질적 성장에 집중에 왔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교육시스템 구축, 창작 발레 개발, 고전 발레, 모던 발레, 드라마 발레 등의 레퍼토리 확장에 주력했습니다. 그 20년은 세계 무대에 한국 발레를 알리고 오늘날의 K-발레의 초석을 놓았던 시간이었지요. 그런 기반 위에 이후 20년은 (제 개인적으론)무용수 은퇴를 하면서 발레 대중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습니다. (발레)문화를 누리지 못하는 분들을 위한 공연 체험 등 사회적 공연문화 확산에 몰두해왔습니다. ‘천상의 예술로 세상을 아름답게’를 비전과 미션으로 삼아 예술을 통해 관객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는 예술의 본질과 역할에 중점을 둬왔습니다.

‘천상의 예술로 세상을 아름답게’가 미션

▷발레단의 사회적책임도 고민해 오셨을텐데요.

-2014년 세계적인 거장 나초 두아토의 〈멀티플리시티〉 초연을 앞두고 세월호 대참사를 겪으면서 예술의 역할과 책임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됐습니다. 당시 많은 공연이 캔슬되고 있던 상황에서 우리도 공연을 해야 되는지 고민을 했지만 결국 강행을 했는데요, 작품을 보시곤 세월호 아픔으로 인해 너무 힘들었는데 발레를 통해 힐링이 됐다는 반응이 많았어요. 이는 2020년 코로나 팬데믹 이후 더 절실해졌고요. 공연 때마다 티켓이 바로 매진되는 것을 보면서 사막에서의 오아시스처럼 예술에 대한 갈증이 생각보다 많구나 싶었어요. 예술의 역할과 중요성을 새삼 느꼈습니다.

▷50주년, 70주년, 100주년의 발레단 모습을 어떻게 그리십니까.

-미국의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 영국의 로열 발레단은 민간으로 출발했지만 역사와 기여도를 인정받아 국가를 대표하는 단체가 됐습니다. 태생이 유사한 유니버설발레단 역시 우리나라 문화 발전에 계속 기여하고 싶습니다. 차세대 단장과 지도자들이 클래식 전통을 이어 나가면서 관객과 사회의 니즈에 부응하며, 새롭게 창의적인 작품으로 나가는 발레단이 되는 게 소망입니다.

▷유니버설발레단 하면 떠오르는게 가장 한국적인 작품 〈심청〉인데요. 그것이 표방한 울림은 무엇입니까.

-심청은 1986년 초연된 작품인데요. 창단하자마자 이 작품을 기획한 애드리언 델라스 초대 예술감독님의 안목과 비전을 엿볼 수 있습니다. 〈심청〉은 발레단과 함께 38년 동안 수정·보완을 거치며 함께 성장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사실 발레단 하면 떠오르는 간판 작품이기도 하고요. 〈백조의 호수〉가 처음엔 창작 발레였지만 오늘날 고전이 된 것처럼 〈심청〉은 우리 발레단의 고전이 된 발레입니다. 클래식 발레는 보통 남녀간의 사랑을 다루는데 비해 〈심청〉은 효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그게 차별화 포인트라고 봅니다. 미국 공연을 마치자 한 평론가가 “심청의 스토리텔링과 화려함은 인상적이었다. 춤의 근본 휴머니티를 잃어가는 이 시대에 유니버설발레단의 심청은 관객의 심금을 울리고 감동을 준 것은 확실하다”는 평을 써주셨어요. 지난해 만난 아부다비음악예술재단(ADMAF) 설립자이자 아부다비 페스티벌 이사장인 후다 여사도 2012년 오만 로열 오페라하우스 개관 공연에서 올린 〈심청〉이 11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회자되고 있다는 얘기를 해주셨어요. 심청에서 볼 수 있는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과 ‘효’라는 정신, 즉 K-Spirit과 조화를 이루면서 외국인들에게도 신선한 충격과 깊은 인상을 주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 우리 발레단의 존재 의미가 있다고 봐요.

불평은 병, 감사는 만병통치 그게 깨달음

딱딱한 사무실을 벗어나고자 서울어린이대공원으로의 산책을 청했다. 아트센터는 어린이대공원을 바로 코 앞에 두고 있다. 센터앞 공원 후문진입로는 선형공원 조성공사로 한창 어수선하다. 하늘색 머플러를 걸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문 단장은 “정말 날씨 좋은데요. 공원이 엎드리면 코 닿을데에 있는데 올해 처음 가요”라고 한다. 40주년 준비로 올초부터 얼마나 바빴을지 짐작이 간다. 공원을 돌아다니면서 이야기도 하고, 중간 카페에서 커피 한잔 하자고 하니 들뜬 표정이다. 속에 있는 얘길 편하게 꺼내기 위해선 산책토크만큼 좋은 것은 별로 없다.

문 단장이 2일 오후 서울 광진구 유니버설아트센터의 한 복도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상섭 기자

사실 문 단장은 한달여쯤 우리 언론사를 방문한 적 있고, 그때 선약을 잡았었다. “5월초쯤이면 대공원 날씨도 좋고 꽃도 활짝 피었을테니 그날 꽃구경 하면서 거기서 인터뷰 하시죠”라면서. 그렇게 성사된 대공원행이다. 기후변화 탓일까. 이른 더위로 일찍 핀 벚꽃은 일찌감치 졌고, 제철 철쭉꽃도 서둘러 폈다가 시들해졌다. 대신 온통 하얌을 무장한 이팝나무가 싱그러움을 자랑하고 있다.

“아까 말씀하신 연꽃 말인데요. 저도 좋아하는데, 인생이 담긴 것 같아요.” 문 단장이 받아친다. “그렇죠? 인생은 고통의 연속입니다. 하지만 고통은 (나를)벗기우는 것 같아요. 고통이 반복될때마다 내 자아의 껍질이 하나씩 벗겨지면서 새로운 자아를 찾아가는 것 같아요. 번민과 인내 없이는 절대로 (앞으로)나아갈 수 없는게 인생이죠. 그래서 진흙탕이라는 번뇌 속에서 마침내 화려한 꽃을 피우는 연꽃이 우리들 인생 같아 좋은 것입니다.” 발레는 어쩌면 연꽃이라는 말을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발레를 하겠느냐는 물음엔 명쾌한 답을 내놓는다. “(발레하기 좋은 몸으로) 현재의 몸보다 낫게 태어난다면 예스(Yes), 현재의 몸으로 태어난다면 노(No)입니다. 하하하.”

문 단장은 사실 무용수가 되기 위한 최적의 몸은 아니었다고 고백한다. 수많은 연습,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수없이 반복된 연습으로 세계적인 발레리나가 됐기에 그 고통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발레를 끊을 수는 없었단다. “공연 전에는 이렇게 곱씹어요. ‘다시는 공연 안하겠다’고. 하지만 발레 공연이 끝나자마자 연습실로 달려가는 나를 통제할 순 없었어요. 발레리나의 인생이 그런 것이죠.”

▷발레리나 입문 계기는.

-어릴 때부터 리틀엔젤스예술단과 선화예술중·고등학교를 운영하신 아버지(박보희 전 한국문화재단 이사장) 밑에 자라다 보니 리틀엔젤스 단원으로 한국무용을 하기도 했어요. 모두가 해외유학을 꿈꿀때 저는 거꾸로 한국으로 유학을 오게 됐습니다. 선화예중에 입학하면서 미국인 발레 선생님인 애드리언 델라스와의 인연이 시작됐고, 그 분의 지도하에 1976년 영국 로얄발레학교와 모나코 왕립무용아카데미로 또 다른 유학의 길을 가게 됐습니다. 지금은 우리 어린 영재들이 장학금을 받고 유학가는 게 흔한 일이 되었지만 그 당시엔 꿈만 같은 일이었죠. 저는 가족이 있는 워싱턴 발레단에서 춤을 추다가 1984년 델라스 선생님이 길러낸 제자들과 재학생들로 구성된 유니버설발레단이 창단돼 다시 한국에 오게 되었습니다.

▷문 단장님은 글로벌 발레리나이자, 현재는 경영자인데. 무엇을 추구했고, 최종 목표점은 무엇입니까.

-문선명·한학자 총재는 문화예술의 중요성을 일찍 간파하신 분들이죠. 영국 여왕 앞에서도 공연을 한, 최초 한류라 볼 수 있는 리틀엔젤스예술단을 1962년, 발레단을 1984년 창단했습니다. 발레단은 두 분이 ‘팔길이 원칙’(지원은 하되 그 운영엔 간섭하지 않고 자율권을 보장하는 것)으로 후원해주시지 않았다면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이를 기반으로 발레단은 한국 문화를 세계로 나가게 하고, 세계의 문화를 한국으로 들여오는 데 기여했습니다. 제 경영은 개인이 아니라 공적으로 임하는 것입니다. 40년 발레단의 귀한 역사와 전통이 계속 차세대와 사회를 위해 활용이 되고 이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런 면에서 아버지와 밀접한 리틀엔젤스 역시 의미가 크겠네요.

-아버지는 1960년대에 워싱턴 DC에 있는 한국 대사관에서 무관으로 일 하셨어요. 당시 한국을 아는 사람이 없었고 안다하더라도 한국 하면 전쟁, 구호물자, 고아로만 인식하고 있었지요. 한국을 알리기 위해 평화의 상징인 어린이 예술단이 설립됐습니다. 척박했던 시절, 예술단을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우여곡절 많았습니다. 미국은 커녕 국내 공연도 할 수 없는 아이들 무용 수준을 끌어 올리기 위해 아버지는 책임자로서 스스로 회초리를 맞으며 아이들과 선생들에게 동기를 부여했습니다. 1965년 아이젠하워 대통령 앞에서의 첫 해외공연은 성공적으로 마쳤으나 모든 비용을 외상으로 진행했습니다. 빚더미에 올라섰죠. 직원을 둘 예산이 없어 우리 집 지하실이 후원회 공장이 돼 후원자를 찾기 시작했어요. 후원을 요청하는 전단지를 봉투에 넣어 우표와 주소지까지 부쳐 매주 1만장 정도 보냈는데, 저 역시 어린 나이에 우표를 열심히 부치던 기억이 납니다. 지성이면 감천이었을까요. 후원 편지로 나간 수 만장 중 한 분이 후원을 해주시기로 하셨는데, 그 분이 바로 리더스 다이제스트 오너인 라일라 월리스(Lila Wallace) 여사였습니다. 너무도 감사했죠. 2만 달러의 수표를 받은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통곡했습니다. 여사님은 돌아가시는 날까지 매년 후원해주셨습니다. 아버지는 육사 출신이다 보니 미국에 웨스트포인트(West Point)라는 육군사관학교가 있다면 리틀엔젤스예술단은 문화 예술의 사관학교라고 늘 말씀하셨죠. 리틀엔젤스예술중고등학교가 1977년에 선화예술중고등학교로 명칭이 바뀌면서 그 전통과 정신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지난 5월1일 리틀엔젤스예술단은 한국-쿠웨이트 에너지협정 60주년 기념으로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쳤습니다.

발레, 기술 만큼 중요한 것은 인성과 인품

▷발레리나를 꿈꾸는 후학에 어떤 조언과 충고를 해주시겠습니까.

-저는 사실 (발레를 위한) 좋은 신체 조건이 아니었습니다. 감사하게도 좋은 코치(제타 콘스탄티네스쿠)를 만나 그 분의 사랑과 지도로 무용수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코치님은 제 체형을 바꾼 요가를 가르쳐 주셨고 정성껏 지도해 주셨습니다. 그 지도는 연습실에서 끝나지 않았고 복도, 식당, 집은 물론 해외공연땐 호텔 로비, 버스안 등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이뤄졌습니다. 고통스런 연습이었지만, 오기로 버텼습니다. 그땐 정말 발레에 미쳐 살았습니다. 코치는 가장 예쁘고 완벽한 체형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네가) 가진 체형과 신체 조건을 어떻게 하면 가장 아름답게 보이게 하느냐가 중요하며 발레는 신체를 가지고 디자인하는 예술이니 어떻게 하면 더 아름다운 선을 만들수 있을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연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위대한 예술가는 겸손을 잃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면의 아름다움도 중요합니다. 인품은 결국 나의 격을 말해주는 것이니 외적인 기술 연마만큼 중요한 것이 인성과 인품이라는 것을 꼭 기억하길 바란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가장 좌절했던 시기의 삶과 그 곳에서 얻은 희망스토리가 있다면.

-최고로 고통스럽고 죄절했던 시기는 바로 자녀가 아파 고통에 있을 때인 것 같아요. 대신 아프고 싶어도 그럴수 없고…. 부모로서 아이의 고통을 보며 자신의 부족함, 무지함과 어리석음으로 탓하고 자책할 때가 가장 힘들었던 것 같아요. 이런 어려움을 겪으면서 눈에 보이는 외적인 세계 보다 무한한 가능성과 힐링 그리고 창조력이 있는 ‘보이지 않는 내면’의 세계의 중요성을 더욱 배우고 알게 되었지요. ‘불평은 병이고 감사는 만병통치’라는 아버지의 훈계를 머리가 아니라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는 계기가 됐습니다.

문 단장이 2일 오후 서울 광진구 서울어린이대공원에서 산책하고 있다. 그는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발레를 하겠느냐는 물음에 “(발레하기 좋은 몸으로) 현재의 몸보다 낫게 태어난다면 예스(Yes), 현재의 몸으로 태어난다면 노(No)”라고 말했다. 핸디캡을 극복하는 과정에서의 인내와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 들여다보이는 답이다. 이상섭 기자

발레단은 불혹이 됐고, 문 단장은 그 불혹에서 2분의1의 삶을 더 살았다. 발레리나가 아닌 한 개인으로서 인생을 어떻게 정의할까. 선문답 같지만 인생은 무엇이고,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물었다.

“누구나 행복하고 싶습니다. 물론 바라고 원하는 그 행복의 모습은 저마다 다른 법이죠. 하지만 요즘 세상을 보면 극과극을 달리는 것 같아요. 살면서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 혼돈되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라면 지켜야 하는 보편적인 가치관 보다는 외적인 행복을 쫓는 것 같아요.” 말을 이어간다. “그리고 음…. 요즘엔 저를 포함해서 우리가 사는 하나 밖에 없는 지구가 파괴될 정도로 인류공동체로서 무책임하게 살고 있는 것 같아요. 인생이라는 것은 저마다의 삶의 경험을 통해 내가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사는지를 알아가는 여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스스로의 고민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세계적인 발레리나 소리를 듣는 문 단장. 예술가 취미는 특별한 게 있을까 싶어 물어봤더니 지극히 평범하다. “발레 외 취미는 가사 일을 하는 것입니다. 집안 일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것 같아요. 주변 환경을 깨끗하게 정리 정돈하는 게 제 소확행입니다. 앞으로 여가 시간이 더 생긴다면 여행을 하면서 인문학 공부를 하고 싶네요.”

헤어질 무렵, “지금 행복한가요?”라고 했더니 내공이 섞인 답이 돌아온다. “너무 흔한 말이지만 행복한 삶의 키는 감사한 마음인 것 같아요. 30~40대엔 이 말을 수 없이 들었지만 머리로만 이해되고 가슴엔 닿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살다 보면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닌데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바라보느냐가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어렵고 힘든 일들을 어떻게 승화시키느냐가 살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가 아닐까요? 이 말은 쉽지만 실천은 쉽지 않기에 의식수준을 높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봅니다.”

■문훈숙 단장은=미국 워싱턴 출생. 선화예술학교, 영국 로열발레학교, 모나코 왕립발레학교를 거쳐 미국 워싱턴 발레단에서 활동 후 1984년 국내 첫 민간 발레단인 유니버설발레단이 창단되면서 창단 멤버이자 프리마 발레리나로서 한국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1989년 동양인 최초로 러시아 마린스키 극장에 초청돼 키로프발레단의 〈지젤〉 객원 주역으로 공연, 일곱차례의 커튼콜을 받으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후 재초청을 받아 〈돈키호테〉(1992), 〈백조의 호수〉(1995)를 공연, 한국발레의 위상을 발레의 본고장에 각인시켰다. 2002년부터 예술경영인으로서 한국 발레 최초로 실시한 ‘공연 전 발레 감상법 해설’, ‘공연 중 실시간 자막 제공’은 지금도 관객에 큰 호응을 얻으며 ‘발레 대중화’에 기여하고 있다. 2009년 한국발레협회 대상, 2010년 대한민국정부 화관문화훈장, 2011년 경암문화재단 경암학술상, 2012년 국제공연예술협회(ISPA) ISPA AWARD-최고 경영자상과 한국발레협회 발레 CEO상, 2014년 문화체육관광부 여성문화인상과 한국공연예술경영인협회 공연예술 경영상-대상, 2017년 문화체육관광부 세종문화상, 2018년 서울특별시 문화상, 2019년 한국무용협회 예술대상을 수상했다.

■유니버설발레단은=‘천상의 예술로 세상을 아름답게’를 비전으로 1984년 5월12일 창단된 한국 최초의 민간 직업 발레단. 제1회 공연인 신데렐라를 필두로 국내를 비롯한 세계 25개국 3100여회의 공연을 선보이며 한국의 대표 발레단으로 성장해 왔다. 러시아 발레의 화려하고 웅장한 고전발레 레퍼토리 뿐만 아니라 한스 반 마넨, 이어리 킬리안, 월리엄 포사이드, 하인츠 슈푀얼리, 오하드 나하린, 나초 두아토, 크리스토퍼 휠든 등 모던 발레 안무가들과의 교류로 레퍼토리를 확장하고 있다. 한국 고유의 전통을 바탕으로 한 창작 발레 개발에도 주력, 1986년 한국 창작발레 최초의 작품 심청을 제작했다. 그 외 춘향과 발레뮤지컬 심청, 코리아 이모션, 더 발레리나 등을 통해 발레단의 독창성 개발에 힘쓰고 있다.

ys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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