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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깨진 바닥, 널브러진 레몬…에르메스에 균열 내는 이방인들 [요즘 전시]
클레어 퐁텐 국내 첫 개인전
‘아름다움은 레디메이드’ 주제
20년간 이민자, 여성 등 사회적 약자에 주목해온 예술집단 클레어 퐁텐의 아시아 첫 개인전 ‘아름다움은 레디메이드’가 서울 청담동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열렸다. 이탈리아 시칠리아 지역 이민자를 의미하는 레몬들이 나뒹굴고 있다. [아뜰리에 에르메스]

[헤럴드경제=이정아 기자]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의 팔레르모 안뜰 바닥을 떠올리게 하는 때묻은 타일. 그런데 금이 가고 깨져 있다. 쨍한 햇살 아래서 자란 듯 보이는 싱그러운 색의 가짜 레몬이 타일 위에 널브러져 나뒹굴 뿐. ‘차라리 하지 않겠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 완벽해 보이는 공간 곳곳에 존재하는 나약해 보이는 사물들이 이렇게 속삭이는 듯 하다.

구역질 나는 세상의 욕망에 떠밀리지 않겠다는 듯 사물들의 다소 소극적인 의지 앞에서, 그렇게 관람객의 동선이 갈피를 잃기 시작한다. 우두커니 선 네온사인이 ‘외국인은 어디에나 있다(Foreigners Everywhere)’라며 조용히 불을 밝힌다.

우리 시대 가장 논쟁적인 작가 중 하나가 서울 청담동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아시아 첫 개인전을 열었다. 이름은 ‘클레어 퐁텐(Clear Fountain)’. 영국 미술가 제임스 손힐과 이탈리아 이론가 풀비아 카르네발레 부부가 지난 2004년 설립한 예술가 집단이다.

‘아름다움은 레디메이드’ 전시 전경. [아뜰리에 에르메스]

영어로 맑은 샘을 뜻하는 클레어 퐁텐에는 현대미술의 새로운 장을 연 마르셸 뒤샹의 남성용 소변기 작품 ‘샘(Fountain)’에 대한 직접적인 경의가 담겼다. 클레어 퐁텐은 “우리는 작가가 아닌 클레어 퐁텐의 조수들”이라고 스스로를 지칭한다. 예술가의 신화적이고 영웅적인 자아를 포기하겠다는 뜻이다.

클레어 퐁텐은 오는 20일 개막하는 베니스 비엔날레의 주제이기도 한 ‘외국인은 어디에나 있다’ 시리즈를 창작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클레어 퐁텐은 “2000년대 초 이탈리아에서 인종차별과 외국인 혐오증에 맞서 싸운 토리노 콜렉티브의 전단지에서 발견한 타이틀”이라며 “역사상 최악의 난민 위기 가운데 열리게 될 베니스 비엔날레의 전시 제목에 이 작품명을 사용한 아드리아노 페드로사 예술감독의 직관이 탁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아드리아노 페드로사는 베니스 비엔날레 역사상 최초의 남미 출신 예술감독으로, 특히 탈식민적 시선으로 우리 안의 타자 문제를 이번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강력한 메시지로 전할 예정이다.

한국어, 영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로 번역돼 제작된 ‘외국인은 어디에나 있다’ 작품들. [아뜰리에 에르메스]

그래서 ‘아름다움은 레디메이드(Beauty is a Ready-made)’라는 제목으로 진행되는 이번 아뜰리에 에르메스 전시는 베니스 비엔날레를 한국에서 만날 수 있는 무대다. 60개의 언어로 존재하는 작품 가운데 한국어, 영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로 번역돼 제작된 작업이 서울에 왔다. 모든 작품 버전은 베니스 비엔날레에 전시될 예정이다.

이 밖에도 가부장적 문화에 맞서 여성의 자유를 꿈꾸고 가능하게 하는 페미니즘 작품 ‘보호’를 비롯해 금이 간 액정 화면 속 르네상스 미술의 선구자로 꼽히는 조토 디 본도네의 ‘그리스도의 애도’를 차용한 위태로운 이미지인 ‘애도’, 불타오르는 지구를 통해 기후 위기를 섬뜩하게 전달하는 작품 ‘오직 4도’ 등 10점도 만날 수 있다. 누구에게나 친근한 이미지를 비틀어 비극적이나 유머러스하게 주제를 풀어낸 점이 특히 눈에 띈다.

‘아름다움은 레디메이드’ 작품. [아뜰리에 에르메스]

클레어 퐁텐은 “(이번 전시는) 아름다움은 우리에게 강요된 것이자, 문화적으로 코드화된 것이라는 고정관념에 맞서는 것”이라며 “그렇지만 바뀌거나 동의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레디메이드의 의미는 여전히 모호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전시장 바닥에 제멋대로 흩어진 레몬은 이국적이나 과도하게 강렬한 존재이기도, 막상 먹을 수 없는 쓸모없는 과일이 되기도, 경제적으로 열악한 이탈리아 남부 이민자가 되기도 한다. 이에 클레어 퐁텐은 “이탈리아 정부는 이민을 범죄화하고 인종차별에 기름을 붓는다”며 “시칠리아로 온 이주민 중 다수가 리비아의 끔찍한 상황으로부터 대피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전시를 기획한 안소연 예술감독은 “‘예술은 정치적 난민들의 장소가 된다’고 믿는 클레어 퐁텐의 작품세계를 통해 정치적 무력감에 잠식된 오늘의 상황을 되돌아보면서도, 작품에 내재된 강력한 이상주의적인 에너지로 현실을 직시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전시는 6월 9일까지.

dsu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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