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간 피아노ㆍ바이올린 단짝
최근 듀오 음반 ‘러브 뮤직’ 발매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음악 단짝”
새 앨범 ‘러브 뮤직’(Love Music)으로 돌아온 바이올리니스트 스베틀린 루세브(왼쪽)와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지난 22일 서울 강남구의 한 카페에서 헤럴드경제와 인터뷰를 가지고 있다. 임세준 기자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굳이 눈을 마주칠 필요가 없다. 수 백번 호흡을 맞춰온 것처럼 그들의 귀는 서로에게 향해있다. 애틋하게 빚어내는 바이올린의 선율에 물소리처럼 영롱하고 오케스트라처럼 풍성한 피아노가 어우러지니, 모든 곳에 ‘사랑의 음표’가 내려앉았다. 고전 영화 속 로맨스의 한 조각이 벅찬 감정을 품고 음표 사이를 머문다. 피아니스트 손열음(38)과 바이올리니스트 스베틀린 루세브(48)의 ‘러브 뮤직’(Love Music)이다.
조금 과장을 보태면, ‘단 하나’도 맞는 게 없다. “8시간 이하로 자면 도통 잠을 잔 것 같지 않다”는 손열음, “좀처럼 지치지 않는” 에너자이저인 루세브. 심지어 MBTI에서도 겹치는 것이 단 하나도 없다. 음악도 하고 글도 쓰고 기획도 하는 손열음은 ‘열정적 중재자’이자 예술가, 시인, 소설가, 음악가 직업에 딱 맞는 INFP. 친구도 별로 없고, 일 년에 전화 통화를 1시간도 안 한다는 내향인이다.
반면 교수(파리국립고등음악원, 제네바 국립음대)이자, 악장(고잉홈 프로젝트)이고, 솔리스트인 루세브는 ‘냉철한 판단의 사업가형’인 ESTJ다. 손열음의 1년치 통화량을 하루에 쓴다는 그는 완벽한 외향형에 “MBTI 같은 건 왜 믿냐”고 하는 독보적 ‘T’(이성적 타입)다. 성향은 정반대지만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나.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공기처럼 서로에게 스며들면서 한눈에 서로를 알아봤다.
“스베틀린의 연주를 듣는 순간…그냥 완전히 제 스타일이었어요.” 최근 서울 강남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손열음은 10년 전 만남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2008년 서울시향의 신년음악회. 정명훈 음악감독이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과 서울시향 음악감독으로 있던 시절 루세브를 악장으로 데려와 함께 했다. 협연자와 악장으로 만났던 이 커플은 2014년엔 콰르텟 무대를 꾸몄고, 이듬해 마침내 듀오로 한 무대에 섰다.
당시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손열음은 “그 때 모든 곡을 스베틀린이 골랐는데, 그게 내가 무척 좋아하는 곡들이라 놀랐다”며 “같은 곡을 좋아하는 것을 보니 우리의 음악적 스타일이 비슷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 때 두 사람은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 2번 비롯해 슈베르트 ‘소나티네’와 불가리아 곡 2개를 연주했다. 루세브는 “식사의 메뉴를 정하듯 가벼운 에피타이저부터 묵직한 작곡가의 메인 디쉬로 구성한 것”이라고 했다.
첫 듀오 이후 10년. 지난 긴 시간을 함께 하며 두 사람은 음악에서도 삶에서도 한 방향을 바라보는 동반자가 됐다. 최근 발매한 새 앨범의 타이틀도 하필 ‘러브 뮤직’. “두 사람의 이야기”냐는 질문에 손열음은 “그것과는 관련없는 타이틀”이라며 웃었다.
바이올리니스트 스베틀린 루세브(왼쪽)와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22일 서울 강남구의 한 카페에서 헤럴드경제와 인터뷰를 가지고 있다. 임세준 기자 |
사실 앨범의 시작은 프란츠 왁스만(1906~1967)의 ‘러브 뮤직’ 악보였다. 루세브는 “2001~2002년경 핀란드의 음악 페스티벌에서 이 곡을 연주해 달라고 해서 얻게 된 악보”라고 소개했다.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나오는 ‘사랑의 죽음((Liebestod)’을 편곡한 작품이다.
“누가 썼는지는 모르지만 손으로 쓴 왁스만의 악보가 스베틀린에게 있다고 하더라고요. 처음 듣는 음악이었어요. 전 다른 사람이 안 하는 것을 하고 싶은 욕심이 많은데, 이런 건 1번으로 해야하지 않나 싶어 앨범으로 엮게 됐어요. (웃음)” (손열음)
왁스만으로 시작한 음반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 오스트리아와 독일 지방의 음악으로 채웠다. “이 시대가 낭만주의와 클래식 음악의 끝”이라는 것이 손열음의 생각이다. 20세기로 접어들며 팝, 재즈 등 다양한 음악 장르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왁스만이 문을 연 ’사랑의 음악‘은 코른골트 오페라 ‘죽음의 도시’ 속 소품으로 이어진다. 영화음악계에 의미있는 족적을 남긴 두 사람과 동시대의 연결고리를 찾아 낭만적인 향수를 불러온다.
“이 음반은 낭만의 절정이다 보니 오히려 끝이라는 느낌이 많이 들었어요. 클래식 음악이 한계에 다다라 더는 갈 데가 없는 막다른 곳에 당도한 느낌이죠. 그래서 전반적인 무드는 낭만이지만, 한편으론 슬픈 정서도 담겼어요.” (손열음)
앨범의 구성은 독특하다. 다소 낯선 작곡가로 시작해 지극히 대중적인 음악이 한 음반에 실려있다. 크라이슬러가 대표적이다. 손열음은 “제가 볼 때도 좀 드문 형태의 레퍼토리”라며 “우리 둘 다 앞으로도 알려진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을 잘 섞는 활동을 하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잘 맞는 듀오다. 이들이 함께 해온 긴 시간이 켜켜이 쌓여 서로의 음악 언어를 가장 잘 이해하는 파트너가 됐다.
루세브는 오랜 시간 지켜본 손열음에 대해 “악기를 다루는 방식이 굉장히 쉽고 자연스러우면서 유기적으로 흐른다”며 “(손)열음은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음악적 커뮤니케이션의 과정이 쉬운 파트너”라고 했다.
물론 두 사람 모두 다양한 음악가와 호흡을 맞춰왔다. 둘을 거쳐간 다른 사람들보다 서로가 특별한 것은 “편안한 상대”이기 때문이다. 루세브는 “열음은 억지스럽게 맞춰가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맞춰지는 무척 편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던 손열음도 고개를 끄덕이며 “지금 내 삶에선 편안하고 마음 맞는 사람과 인간적인 교감을 나누는 음악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런 그에게 루세브는 “편안하면서도 좋아하는 연주 스타일의 바이올리니스트”다.
“얼마전 라디오에서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연주가 나왔는데, 너무 좋아서 이 사람 누굴까 생각했어요. 알고 보니 스베틀린이더라고요. 스베틀린의 연주는 슬라브의 애수가 깃든 ‘러시안 올드 스타일’과 ‘요즘 사람들’처럼 모던한 스타일이 아닌 올드스쿨의 프렌치 바이올린이 섞인 독특한 스타일이에요. 듀오로도 편한 파트너가 맞지만, 제가 너무 좋아하는 연주에요.” (손열음)
다른 성향의 두 사람이 만났으니 음악을 나누는 과정에서도 의견 충돌이 있을 법 하나 둘 사이엔 ‘이제는 말할 수 있는’ 에피소드도 없다. 서로 다른 성향이 둘의 작업에선 시너지를 냈다.
바이올리니스트 스베틀린 루세브(왼쪽)와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22일 서울 강남구의 한 카페에서 헤럴드경제와 인터뷰를 가지고 있다. 임세준 기자 |
손열음은 “전 구조를 풀어나가는 것을 좋아해 전체 곡에서도 각각의 역할을 살핀다면, 스베틀린은 좀 더 본능적으로 생각한다. 가끔 충돌 아닌 충돌 있기도 하지만, 늘 자연스럽게 맞춰나간다”고 말했다.
특히 박학다식한 루세브는 ‘백과사전형’, 기획자 손열음은 ‘편집자형’이다. 손열음은 “스베틀린은 아는 게 많은 사람이라 이것저것 지식을 늘어놓으면 내가 그것을 연결하고 묶고 편집한다”고 말했다. 이번 음반이 각자의 역할이 더해진 시너지의 총체다.
함께 하는 시간은 서로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두 악기의 만남에서 피아노는 반주의 개념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루세브는 늘 손열음의 의견과 생각을 물었다. 손열음은 “사실 전 피동적인 사람이라 따라오라고 하는 게 더 편하다”고 웃으면서도 “덕분엔 다른 사람과 할 때와는 달리 의견도 많이 내고 조금 더 능동적으로 할 수 있었다”고 했다. 루세브는 “열음은 나를 더 나은 음악가,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해준다”며 “함께 음악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통해 진화하고 있다”고 돌아봤다.
밀양에서 시작해 서울, 대구(27일), 인천(30일)로 이어지는 리사이틀을 마치면 두 사람은 본격적인 고잉홈 프로젝트 준비에 돌입한다. 한국을 떠나 활동하는 한국인 음악가, 한국과 인연이 깊은 외국인 음악가들이 모여 만든 악단인 고잉홈 프로젝트는 오는 7~8월 관객과 만난다. 손열음은 “우리가 안 해도 하등 상관없는 일인데 피아노 밖에 못 치던 내가 많은 음악가와 함께 하며 외연이 확장되고 음악적 경험이 성장하는 느낌”이라고 했고, 루세브 역시 “나의 음악적 커리어 중 가장 익사이팅하고 책임감이 많이 느껴지는 일”이라고 말했다. ‘고잉홈 프로젝트’를 상설 오케스트라로 만드는 것은 두 사람의 포부이기도 하다.
같은 길을 걷는 두 사람은 각자의 음악적 도전도 멈추지 않는다. 음악가로의 바람은 그것 자체로 이들이 걸어가는 지향점이자 목표다.
내향형치고는 왕성한 활동을 하는 손열음은 음반 준비에도 힘을 쏟을 생각이다. “어려서부터 엄청나게 많은 음반을 남긴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는 이미 해마다 꾸준히 음반을 내고 있다. 지난해엔 모차르트 소나타 전집, 올해엔 ‘러브 뮤직’, 내년엔 라벨이 될 예정이다. 손열음은 “막상 살아보니 능동적으로 작정하지 않으면 앨범을 내는 게 너무 어렵더라”며 “약간만 게으르면 몇 장 못 내고 죽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박차를 가하려 한다”고 귀띔했다.
바이올리니스트 스베틀린 루세브(왼쪽)와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22일 서울 강남구의 한 카페에서 헤럴드경제와 인터뷰를 가지고 있다. 임세준 기자 |
루세브는 요즘 음악과 음악가의 역할을 되새긴다. 그는 “클래식 음악은 고차원적인 음악이라 그것만이 줄 수 있는 기능이 있다”고 말했다.
“전 클래식 음악이 세상에 도움이 되고 변화를 준다고 믿어요. 사람들이 음악을 듣는 두 시간 동안이라도 노화가 오지 않는다고 느끼면 그것만으로 보람있고 행복할 것 같아요. (웃음) 그것이 음악가가 할 수 있는 기여라고 생각해요.” (스베틀린 루세브)
지난 몇 년 새 손열음이 가장 집중하는 것은 ‘나다움을 찾는 일’이다. 그는 “가장 오리지널한 나를 발견하고 싶다”며 “예전엔 표류하고 부유하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좀 더 주도적으로 하고 싶은 일, 나밖에 하지 못하고 가장 나다운 모습을 보일 수 있는 일을 찾고 있다”고 했다.
”코로나를 겪으며 음악과 연주에 대한 기준과 생각이 달라졌어요. 전 음악을 진짜 좋아하지만, 직업인으로 고충은 늘 있었어요. 직업인으로 모든 것을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이제는 음악을 좋아하는 나 자신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손열음)
sh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