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은 해적과 불교에서 ‘해방’의 의미 찾아
박미미 작가의 작품 [광주비엔날레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광주는 판소리를, 부산은 해적을 품었다. 한국의 양대 비엔날레가 제시한, 예상치 못한 키워드다. 언어가 품은 이면을 넘어, 저마다의 시각으로 재해석한 주제다.
올 가을 광주와 부산은 ‘예술의 도시’가 된다. 부산비엔날레가 오는 8월 17일 개막해 65일간의 축제를 이어가면, 광주비엔날레가 9월 7일 개막해 86일간의 영감을 나눈다.
“판소리는 소리와 스토리가 결합된 미니멀리즘적인 오페라 아닌가요?”
판소리와 시각예술이 만나면서 예측가능한 범위를 뛰어넘었다. 올해 광주비엔날레의 주제는 ‘판소리, 모두의 울림’.(Pansori, a soundscape of the 21st century).
니콜라 부리오 광주비엔날레 예술감독은 “판소리는 판(공간)과 소리에 대한 이야기”라며 “이번 전시는 소리와 공간이 함께 하는 오페라적 전시”라고 말했다.
소리가 중요한 키워드인 만큼 전시도 다양한 소리로 나눠 이뤄진다. ▷밀도 높은 공간의 반향을 담은 ‘부딪힘 소리’ ▷다층적 세계관을 담은 ‘겹침소리’, 역사의 미세하고 거대한 주체인 분자와 우주 ▷태초의 소리를 탐구하는 작업을 담은 ‘처음 소리’ 등으로 전시가 구성된다.
니콜라 부리오 제15회 광주비엔날레 예술감독이 26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제15회 광주비엔날레 참여작가 발표 기자회견'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
총 30개국에서 73명의 작가가 참여하는 이번 광주비엔날레는 유달리 여성 작가의 비중이 높다. 참여 작가의 58%인 43명이 여성이다. 한국 작가는 15%인 11명이다.
부리오 감독은 “의도적으로 여성 작가를 더 많이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시대의 흐름이 반영된 것 같다”며 “대다수 작품은 이번 비엔날레를 위한 커미션(주문 제작) 작품으로 새로운 작업 상태를 잘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주요 작가로는 한국에선 조각과 퀴어의 두 축으로 작업하는 최하늘, 소리 음파 탐지 기술을 활용해 동굴의 모양을 측정하는 작업을 선보이는 권혜원, 광대한 공간에 전구회로를 연결하면서 개체와 집단 속 유연성에 대해 탐구하는 박미미 등이 참여한다. 해외에선 마르게리트 위모, 노엘 W. 앤더슨, 비앙카 본디, 도라 부도어, 존 도웰, 맥스 휴퍼 슈나이더, 소피아 스키단, 아몰 K. 파틸, 캔디스 윌리엄스 등이 함께 한다. 리움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는 필립 파레노도 광주에서 만날 수 있다.
부리오 감독은 “판소리는 샤머니즘적 요소가 결부해 만들어졌다고 봤다”며 “소피아 스키단과 같은 작가는 작품에 샤머니즘을 담고 있다. 샤먼은 비인간적 세계에 들어가는 존재이고, 예술가는 비인간적인 세계를 탐험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광주비엔날레 제공] |
광주의 지리적 특성을 고려해 ‘판소리’를 주제로 가져왔지만, 그렇다고 17세기부터 한반도에 뿌리내린 이 독특한 장르에 대한 깊은 탐험이 비엔날레를 관통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부리오 감독은 “비엔날레의 역할은 지역적 문맥을 반영해 전 세계에 알리는 것”이라며 “판소리를 메타포로 활용해 세계 알리고 싶어 선택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73명의 작가가 참여한 이번 전시는 걸어가면서 보는 오페라와 같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밖에 광주에선 비엔날레 30주년을 맞아 니콜라 부리오 예술감독의 시나리오를 토대로 제작한 비디오 에세이 ‘판소리로부터 배우다’가 최초 상영된다. 또 전용 전시관은 물론 광주 양림동의 옛 파출소와 빈집 등도 전시 공간으로 활용된다. 도시 곳곳에선 30개국의 다양성을 볼 수 있는 파빌리온 전시도 열린다.
광주비엔날레는 개막에 앞서 다음 달 18일부터 열리는 이탈리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병행 전시를 연다. 30주년 기념 아카이브 특별전 ‘마당; 우리가 되는 곳’을 주제로 광주비엔날레 소장품인 백남준의 ‘고인돌’, 크초의 ‘잊어버리기 위하여’를 비롯해 두 작품의 의미를 계승하고 확장하는 세 명의 역대 비엔날레 참여 작가의 작품을 내놓는다.
박양우 광주비엔날레 대표는 “더 많은 판을 깔아주는 곳에서 베니스가 할 수 없는 광주만의 특별전을 함께 보여주고 싶었다”며 “광주비엔날레가 아시아 최고의 비엔날레이나 베니스와 경쟁이나 종속이 아닌 동행의 의미를 살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해적 계몽주의’와 ‘불교적 깨달음’.
단 한 번도 나란히 쓰인 적 없는 이 두 개념이 절묘하게 엮였다. 2024부산비엔날레가 들고 나온 주제 ‘어둠에서 보기’를 관통하는 두 개의 키워드다. 벨기에 출신의 필립 피로트, 뉴질랜드 출신의 베라 메이 공동 예술감독은 이러한 주제로 올해의 부산을 이끈다.
이번 전시에 영감을 준 것은 미국의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책 ‘해적 계몽주의’(2023)다. 이 책은 유럽 계몽주의 뿌리를 18세기 마다가스카르 해적 공동체에서 찾는다.
베라 메이 감독은 “바다와 해양의 역사, 대안적 공동체인 해적 유토피아의 역사가 항구도시 부산의 다양성, 불교적 깨달음과 어떻게 중첩되는지 고찰해보고자 했다”고 말했다.
두 개의 키워드를 관통하는 것은 ‘해방’이다. 두 사람은 “해적은 대부분은 사회에서 계급이 낮고 가난한 사람들로, 이들이 해방되는 공간이 해적선”이라며 “불교에서도 도량에 들어간다는 것은 사회의 규정과 속박을 내려놓는다는 해방의 의미를 안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란 출신의 골록흐 나피시의 작품 [부산비엔날레조직위원회 제공] |
특히 메이 감독은 “해적은 해양을 배경으로 언어·문화가 다른 다양한 약자들이 구성한 공동체”라며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의사소통의 도구로 이들에게 시각적 언어와 스토리텔링은 중요한 부분이 됐다는 점에 착안해 전시를 기획했다”고 말했다. 다양성을 포용한 불교의 본질 역시 전시에 영감이 됐다.
해적과 불교를 두 축으로 삼아 전시에선 ‘어둠에서 보기’를 시작한다. 망망대해를 헤쳐나가고, 열반에 이르는 어려운 과정은 ‘어둠’이라는 메타포로 상징할 수 있다는 것이 두 예술감독의 판단이다. 피로트 감독은 “해적이 되고 불교에 투신하기 위해선 속세에 대한 모든 애착을 버려야 한다”며 “이에 대한 반박용으로 모든 것을 드러냄으로써 제3자가 나를 검열할 필요가 없는 공간을 제시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전시엔 다양한 작가들이 참여한다. 한국 작가 방정아와 이두원, 윤석남, 정유진을 비롯해 이란 출신의 골록흐 나피시와 아마달리 카디바, 세네갈의 셰이크 은디아예, 가나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트레이시 나 코우쉬 톰슨, 베트남의 역사를 추상적으로 드러내는 작업을 해온 응우엔 프엉 린과 투엉 꾸에 치 듀오 작가 등이 참여한다. 전체 참여작가 명단는 오는 5월 발표될 예정이다.
[부산비엔날레조직위원회 제공] |
통도사 성보박물관장인 송천 스님이 함께 하는 것도 흥미롭다. 메이 감독은 “송천스님은 전통적인 기법으로 창작하나 그의 예술적 실천은 진보적이고 실험적”이라고 말했다. 송천스님은 이번 비엔날레에서 가로 10m의 초대형 회화를 선보일 예정이다.
올해 부산비엔날레는 기존 전시 장소였던 부산현대미술관을 비롯해 부산 중구 중앙동의 현대빌딩과 동구 초량의 2층 가옥인 초량재 등 현재 사용되지 않은 건물들을 처음으로 전시장으로 활용한다. 전시 일정은 여름휴가를 보내려고 부산을 찾는 관광객들을 위해 예년보다 2주 가량 당겼다.
김성연 부산비엔날레조직위원회 집행위원장은 “해적과 불교는 기존 제도나 시스템 밖의 공동체, 디아스포라적인 삶을 담고 있고, 이는 해방과 전쟁 이후 이주민의 유입으로 만들어진 부산의 표정, 정체성과 맞닿아있다”며 “저마다 공동체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방식, 어두운 시기를 헤쳐나가 새로운 미래를 상상하는 과정이 서로 흥미롭게 통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sh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