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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폐허만 남은 전쟁, 홀린듯 동화 꿈꿨다…100세 노작가의 끝나지 않는 동심 [요즘 전시]
후지시로 세이지, 바람 속의 하얀 피아노, 2001. 이정아 기자
후지시로 세이지, 바람 속의 하얀 피아노, 2001. 이정아 기자

[헤럴드경제=이정아 기자] 찬란한 무지개가 떠 있는 물가에서 난쟁이가 하얀 피아노를 연주한다. 피아노 소리와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 소리가 아름답게 숲속에 울려퍼진다. 꽃잎이 흩날리는 거대한 관람차 앞에서 일곱 난쟁이들이 손을 맞잡고 외발 자전거를 탄다. 빛이 투과된 그림 속 다채로운 색이 물이 담긴 수조와 거울을 만난다. 환상적인 분위기가 무한히 확장한다.

동화 속 이야기가 아니다. 전시장을 가득 채운 그림들이 만들어낸 풍경이다.

“빛은 투명하고 순수합니다. 조그마한 흠도 없죠. 그 빛으로 혐오감이 없는, 가장 순수한 아름다움 같은 것을 만들 수 있습니다.”

휠체어에 앉은 머리가 하얗게 센 백세의 노인이 천진난만한 눈으로 말했다. ‘동양의 디즈니’로 불리는 그는 독창적인 그림자 회화인 ‘카게에(影繪)’를 창시한 거장 후지시로 세이지. 작가의 탄생 100주년 기념 개인전 ‘오사카 파노라마’가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렸다. 이번 전시를 위해 한국을 찾은 후지시로는 “한·일 양국의 관계가 조금 더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탄생 100주년 기념 개인전 ‘오사카 파노라마’ 개막식을 찾은 작가 후지시로 세이지와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 모습. [케이아트커뮤니케이션 제공]

이번 전시에는 1950년대 일본 신문 잡지에 연재됐던 모노크롬 작품부터 6m가 넘는 화려한 색채의 초대형 작품까지, 그의 200여점 원화가 펼쳐졌다. 특히 작가가 한국의 전래동화를 읽고 만든 ‘선녀와 나무꾼’ 작품 시리즈 등 14점 신작도 전시됐다.

그가 만들어낸 장르인 카게에는 1948년부터 시작된 일본의 그림자 회화를 말한다. 면도날로 종이를 일일이 오려 트레싱지를 덧대 빛을 투과해 완성하는 작품이다. 후지시로는 전쟁 직후 초토화된 도쿄에서 물감을 구할 수 없게 되자, 골판지나 전구를 사용해 작품을 만들었다. 특수용지에 밑그림을 그리고 잘라낸 뒤 겹겹이 종이를 붙인다. 이후 조명을 투사해 빛과 그림자로 작품을 연출하는 방식이다.

후지시로 세이지, 월광의 소나타, 1981. [케이아트커뮤니케이션 제공]

작가는 종이의 질감과 두께, 겹치는 방법의 조합으로 생기는 여러 가지 색감까지 집요하게 매달렸다. 정전이 잦았던 당시 후지시로가 빛의 그라데이션의 원리를 체득하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작품을 그려나간 것이다.

그의 작품은 따뜻하다. 사랑스럽고 꿈이 가득하다. 그가 전쟁 직후 찾아온 고통과 허무함 속에서 사랑과 평화에 천착해 한평생 작품 활동을 일궈왔을 것이라고 추측하게 되는 대목이다. 전시된 그의 모든 작품에서 놀랍게도 소녀 감성이 읽히는데, 이는 작가가 꿈꾼 환상의 서사가 그림 속에 깃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후지시로 세이지, 오사카 파노라마 스케치. [케이아트커뮤니케이션 제공]

후지시로는 대학을 졸업하고 첫 직장으로 영화배급사에 입사했다. 그는 일을 하면서 된 여성지 ‘쿠라시노테쵸우’에 작품 연재를 시작했다. 그때 지면으로 처음 실려 세상에 공개된 그림이 ‘완두콩 다섯 알’이다. 그 이후 TV 방송을 시작으로 NHK에 전속 활약했고, 나아가 민간 방송사로 범위를 넓혔다.

후지시로는 자신의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동시대 동화 작가인 미야자와 겐지를 꼽는다. 겐지는 ‘은하철도 999’로 알려진 애니메이션의 원작 ‘은하철도의 밤’을 써 내려간 작가다. 후지시로는 겐지 동화를 만나 처음으로 그림자 회화 작가로서 눈을 뗐다고도 할 정도다.

“겐지는 ‘세계가 모두 행복해지지 않는 동안은 개인의 행복은 있을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제가 가장 공감하는 부분입니다.” 전시는 4월 7일까지.

dsu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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