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임윤찬과 얍 판 츠베덴 서울시립교향악단 음악감독 [서울시립교향악단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소년의 성장은 찬란했다. 패기와 열정이 넘쳤던 어린 황제는 전장의 고통까지 끌어안은 성년이 돼있었다. 황제는 마침내 태어났다. “음악만을 위해 살겠다”던 영재 피아니스트의 다짐이 음악으로 증명되는 순간을 관객은 마주했다.
피아니스트 임윤찬과 세계적인 지휘자 얍 판 츠베덴이 만났다. 서울시립교향악단 음악감독으로의 취임 연주회를 함께 하는 자리. 지난 25일(예술의전당), 26일(롯데콘서트홀) 열린 두 번의 공연은 스타 음악가들이 함께 한 자리였던 만큼 공연 전부터 화제였다.
티켓 예매 시작 1분 만에 양일간의 좌석은 동이 났고, 시민 무료 추첨 티켓 경쟁률은 340대 1에 달했다. 임윤찬의 공연 날마다 이어지는 주차 대란은 여전했고, 공연장 로비는 시작 1시간 30분 전부터 K-팝 스타 못잖은 팬들의 열기로 가득 찼다. 관객들은 공연 시작 10분 전까지도 일찌감치 매진된 프로그램 북을 애타게 찾아 다녔다.
임윤찬이 한국 관객과의 만남에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를 처음 선보인 것은 2022년 10월이었다.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최연소로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며 클래식계의 스타가 된 해다. 지휘자 정명훈과 원 코리아 오케스트라, 홍석원이 이끄는 광주시립교향악단과 같은 레퍼토리를 연주했다. 광주시향과의 ‘황제’는 공식 음반으로 남아 임윤찬의 팬이라면 숨소리마저 외울 만큼 감상한 버전이다.
피아니스트 임윤찬과 얍 판 츠베덴 서울시립교향악단 음악감독 [서울시립교향악단 제공] |
2년 만에 다시 돌아온 ‘황제’는 그 누구의 것과도 달랐고, 심지어 자신의 것과도 달랐다. 지난 시간 사이 임윤찬에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스스로는 ‘달라진 것은 없다’고 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이 달라졌다.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클래식계의 슈퍼스타’가 됐고, 수많은 사람들의 함성과 찬사를 온몸으로 받아내면서도 흔들림 없이 음악이라는 고독한 우주를 유영하며 빛을 더해갔다. 이날의 ‘황제’는 그 시간 동안의 깊은 고민의 결과물이었다.
적군의 포탄이 쏟아져 내리는 상황에서 작곡한 ‘황제’는 강인한 에너지와 압도적인 긴장감이 어우러진 곡이다. 츠베덴 감독의 절도있는 동작으로 시작된 장엄한 1악장. 가볍고 화사하게 펼쳐냈던 이전의 ‘황제’와 달리 임윤찬은 차분한 호흡으로 피아노의 분산 화음을 만들어냈다. 의도적으로 속도를 떨어뜨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출발이었다. 풍성하고 성숙한 음량을 쌓은 피아노가 시작되자 ‘황제’는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예측할 수 없었다.
임윤찬은 저마다의 무기를 들고 나온 병사들을 아우르다가도, 적진을 향해 몸을 내던지는 영웅이 됐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양보하며 하나의 드라마를 만들었고, 적재적소에서 반짝였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았다. 현악기들이 한 발 내밀면, 그 찰나를 유연하게 끌고 들어와 소리의 공간을 메웠다. 피아노가 오케스트라처럼 광활한 음역을 오가면 악단은 일사분란한 움직임으로 길을 내주며 피아노를 빛냈다. 이들은 때때로 서로를 양보해, 서로를 돋보이게 했다. 츠베덴의 서울시향과 임윤찬은 꽤나 잘 맞는 짝처럼 들렸다. 하나의 음악을 만들기 위해 각자의 공간을 내줬고, 그러다가도 때론 줄다리기를 하듯 팽팽히 맞섰다.
피아니스트 임윤찬과 얍 판 츠베덴 서울시립교향악단 음악감독 [서울시립교향악단 제공] |
인상적인 순간은 여러 차례 나왔다. 2악장에서 폐허가 된 ‘전쟁 드라마’를 그리듯 애달픈 현악 연주가 시작됐고, 피아노는 그 위에서 희망을 길어올렸다. 지나친 비극에 매몰되지 않도록 맑게 어우러지는음색이었다. 3악장으로 이르면 임윤찬의 오케스트레이션이 시작됐다. 피아노로 악단의 풍성함을 담아내듯 힘차게 달려나가면서, 장대한 드라마의 구조를 쌓듯 기승전결을 완성했다. 팀파니와 함께 장엄한 끝을 마주하자 어김없이 ‘브라보’가 터졌다.
지난 한 해 서울시향을 진두지휘하며 한국의 클래식 관객들과 충분히 스킨십을 한 츠베덴 감독의 공시 취임 연주회는 성공적이었다. 이제 몸풀기는 끝났다는 듯, 레퍼토리부터 츠베덴 감독은 본인의 장기를 살릴 수 있으면서도 단원들의 역량을 마주할 수 있는 곡을 골랐다. 올 한 해 이어질 ‘말러 사이클’의 시작을 알리는 1번 ‘거인’에선 제목 그대로 ‘거인의 풍모’를 느낄 수 있었다.
피아니스트 임윤찬과 얍 판 츠베덴 서울시립교향악단 음악감독 [서울시립교향악단 제공] |
충분히 예측가능한 음악이었다. 그간 공격적이고 압도적인 사운드를 보여준 츠베덴 스타일은 말러에서 잘 살아날 것으로 예상됐다. 파괴적인 음량을 선보이면서도 1악장에서 4악장으로 향하는 내내 가장 의외였던 점은 그 어느 때보다 섬세한 소리를 끌어냈다는 데에 있다. 1악장에선 거인이 깨어나 첫 걸음을 내딛는 것처럼 악기 하나 하나의 사운드가 생동감있게 살아났다. 현악 파트는 활의 움직임, 방향조차 쌍둥이처럼 일치했고, 바짝 날이 선 채로 지휘자를 따라 기량을 뽐냈다. 지난 1년간의 트레이닝이 빛을 발하는 모습이었다.
동요 ‘마르틴 형제’ (프랑스어로는 Frère Jacques)를 단조로 바꿔 장송 행진곡으로 패러디한 3악장은 트로트 스타일로 다시 태어났다. 쉼없이 밀어붙이다 등장하는 ‘뽕짝 풍’의 멜로디를 듣고 있자니,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명언이 떠올랐다. 말러의 힘은 쟁쟁한 객원 단원들을 통해 빛이 났다. 베를린필의 호른 수석 윤 젱을 비롯해 트롬본, 팀파니의 명연이었다.
sh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