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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헌영의 첫 애인, 미제 스파이?…누구도 몰랐던 여성 독립운동가 앨리스 현 [고승희의 리와인드]
연극 ‘아들에게:미옥, 앨리스 현’
독립운동가 현미옥의 생 담아내
연극 '아들에게(부제 : 미옥 앨리스 현)' [극단 미인 페이스북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1920년대 상해 시절 ‘박헌영의 첫 애인’이자 ‘거물급 남자들’ 사이에서 나라에 분탕질을 한 여성, ‘공산주의 빨갱이’이자 ‘미(美) 제국주의 스파이’. 그래서 ‘한국판 마타하리’로 불린 사람….

시대의 풍파를 살다간 한 여성이 있다. 그는 위대한 성취를 남긴 ‘독립운동가’도, 역사에 개인을 희생당한 피해자도, 모든 순간 현명한 판단을 내려던 주체적인 페미니스트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역시 역사를 살았고, 역사에 휩쓸렸다. 굴곡진 현대사가 삶의 순간마다 깊숙이 새겨졌고, 역사 앞에서 한 사람이 아닌 여성으로 평가받았다. 한국 이름 현미옥, 한국인 최초로 미국 시민권을 받은 앨리스 현(1903~1956?).

1956년 함경북도 청진 해안, “미국에서 파견된 간첩”을 ‘즉결심판’한다며 복면을 쓴 현미옥은 바다에 내던져진다. 연극은 이렇게 시작한다. 2023 창작산실 ‘올해의 신작’으로 선정된 극단 미인의 연극 ‘아들에게:미옥, 앨리스 현’(1월 13~21일)이다. 장장 170분. 연극으로도 꽤나 긴 시간이지만, 파란만장한 현미옥의 생(生)을 담아내기엔 무척이나 짧은 시간이었다.

연극은 인터뷰 형식으로 진행된다. 기자와 현미옥의 인터뷰를 통해 그의 삶을 시간 순서대로 훑어간다. 한 사람의 생애를 다룬 이야기는 흡인력이 있다. ‘아들에게’는 속도감 있게 두 개의 이름, 두 개 이상의 국적을 가진 사람, 나라를 잃은 식민지 조선의 울타리를 벗어나 자유와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던 주체적인 여성으로의 삶을 따라간다.

현미옥은 건국 훈장을 받은 독립운동가 현순(1880~1968) 목사의 딸로, 하와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르고, 한국 이름 미옥 대신 ‘앨리스’라고 불리는 소녀. “우리 이름은 왜 영어냐”는 아이들의 질문에 아버지는 “자유롭게 살라고” 영어 이름을 지었다는 이야기를 건넨다. ‘자유’, ‘주체적인 삶’, 식민지 조선에선 상상할 수 없던 두 단어는 현미옥의 생의 순간마다 켜켜이 스며들었다.

연극 '아들에게(부제 : 미옥 앨리스 현)' [극단 미인 페이스북 제공]

여성의 지위가 변화하는 시대 안에서 “같은 위치에서 일하는 사람으로 대해달라”는 앨리스 현은 그 시절 신여성의 상징처럼 보여졌다. 그의 삶은 시대와 함께 거침없이 항해한다. 고작 열아홉 살에 “혁명만큼 중요했던 연애 사업”이 성공해 일본 유학 시절 만난 정봉균과 결혼한다. 가부장적 시대의 삶은 시시각각 그를 습격한다. 기어이 첩을 들이며 결혼 생활을 파탄내는 남편. 앨리스 현은 “그 사람이 다른 여자가 있다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울분을 토하다, 너무도 기가 막히다는 듯이 “그런데 여기 사람들은 그럴 수 있대. 여기 정말 너무 이상하다”며 이혼을 선언한다. 동등한 삶을 원했던 결혼생활은 그의 생각과 달리 ‘순종’과 ‘복종’을 강요받았고, 그 시대에 ‘내 일을 하겠다’며 자신의 길을 간다. 어머니처럼 기구한 삶을 살아야했던 뱃속의 아들과 함께다.

연극에선 현미옥의 어린 시절부터 그가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주의자로 성장하고, 역사가 미처 기록하지 못한 비밀스러운 독립운동에 치열했지만, 이렇다 할 업적을 남기지 못한 삶을 마지막 순간까지 따라간다. 해방 이후 남한에도 북한에도 속하지 못했던 경계인의 삶, ‘같은 일’을 하는 ‘동지’로 인정받고 싶었고, 자신의 이상을 향한 주체적 욕망을 성실하게 살아낸 삶을 그린다.

연극 '아들에게(부제 : 미옥 앨리스 현)' [극단 미인 페이스북 제공]

현미옥은 하와이에서 태어나 상하이와 일본에서 공부하고 중국, 일본, 러시아에서 독립운동과 공산주의 활동을 했고, 해방 이후 남한에서 미군 군무원으로 일하다 공산주의자로 낙인 찍혀 미국으로 추방됐다. 1949년엔 아들인 정 웰링턴이 일하는 체코를 거쳐 북으로 건너가 조선중앙통신, 외무성에서 일했다. 어머니의 그림자를 밟아가듯 아들 웰링턴 역시 삶의 무게가 무겁다. 소수 인종은 의대에 진학할 수 없다는 ‘차별의 벽’을 넘지 못해 체코로 향했지만, 북한, 미국, 체코 세 나라의 감시 안에 공산주의자로도 의사로도 삶을 살지 못한 채 아내와 자녀를 남기고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이 연극의 제목이 ‘아들에게’로 정한 것에 대해 대본을 쓴 김수희 연출가는 “현미옥이 자신의 삶을 항변한다면 가장 먼저 아들에게 하고 싶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붙였다”고 말했다.

어머니와 아들이 만나 나누는 대화 장면은 아들의 분노와 비난, 어머니의 변명이 맞선다. 여러 개의 이름을 무기 삼아 경계를 넘을 수 있었지만, “제대로 하는 것 없이 미 제국주의 앞잡이이자 빨갱이”로 불린 어머니를 향한 원망이 들끓는다. 신념과 대의를 따르고자 했지만, 가정과 가족엔 너무도 서툴렀던 어머니 현미옥의 자기방어는 때론 공허하다. “통일된 나라에서 일하는 여성으로,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 살고 싶었다”지만, “돌볼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고, 여성에겐 불리한 시대였다”고 항변해도 아들을 설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미 7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현미옥은 여전히 가부장적 ‘시대의 벽’에 박제된 인물이었다. 그를 따라다니던 좌익 독립운동가 ‘박헌영의 첫 번째 애인’이라는 꼬리표에 대해 김 연출가는 “판단은 관객에게 맡긴다”고 했다.

연극 '아들에게(부제 : 미옥 앨리스 현)' [극단 미인 페이스북 제공]

현미옥이라는 인물만큼 흥미로운 것은 무대 조명과 그래픽, 음악이었다. 이 연극에서 현미옥은 달리는 사람이다. 그는 강렬한 드럼 연주에 맞춰 달려나가고, 그 속도에 맞춰 나라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분투한다. 숨막히게 질주하는 드럼 연주는 아무리 달려도 목적지에 다다르지 못한 현미옥의 삶을 보여준다. 쉴 새 없이 달라지는 장소와 그 곳에서의 삶은 다양한 색감의 조명으로 표현한다. 원대한 꿈을 품은 현미옥의 삶을 대변하는 푸른 바다, 원자폭탄이 떨어진 해방 조국을 빈 무대 위에서 상징적인 색감과 영상으로 담아낸다. 아주 오래전의 잊혀진 이야기가 현대적인 감각으로 다시 태어나도록 한 현명한 연출이었다.

쉴새없이 달려나가는 1막에 비해 2막의 이야기는 다소 늘어진다. 연극은 주체적인 여성이자, 신념과 이상을 위해 시대를 치열하게 살다간 사람으로의 현미옥을 그려다가 결말을 향해갈수록 그에 대한 ‘가치 판단’을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인물에 대한 연극의 시선이 명확하지 않다. 연극의 제목처럼 결말이 어머니와 아들의 이야기로 귀결되자, 시선은 가정에 대한 책임감과 의무의 문제로 옮겨간다. 역사가 제대로 기록하지 않았고, “기자들은 소설을 썼던”(현미옥 대사 중) 그의 삶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얼마나 바로잡혔는지도 의문이다. 물론 이러한 판단 역시 관객의 몫이다. 그럼에도 이 연극의 가장 큰 장점은 현미옥이라는 인물에 대해 궁금증과 질문을 던졌다는 점이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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