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모에 걸맞은 재정비·쇄신 필요
팬데믹의 그림자를 뚫고 나온 한국 뮤지컬계는 지난해 최고 호황기를 맞았으나, 업계 전문가는 새해부턴 “규모에 걸맞은 재정비와 쇄신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사진은 ‘오페라의 유령’ [에스앤코 제공] |
팬데믹의 터널에서 벗어난 한국 뮤지컬은 지난해 최고 호황기를 맞은 듯 했다. 티켓 판매액이 역대 최고치를 경신하며 시장이 5000억원으로 확대됐고, 스타 배우들은 회당 수천만원씩 받으며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업계는 그만큼 즐겁지 않았다. 규모만 커졌지 내적 성장이 동반되지 않아서다. 전문가는 오히려 “올해 규모에 걸맞은 재정비와 쇄신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을 정도다.
2일 예술경영지원센터 공연예술통합전산망(KOPIS)에 따르면 2023년 3분기까지 대중음악을 제외한 공연 티켓 판매액은 4577억원으로 집계됐다. 이는 전년도 전체 뮤지컬 티켓 판매액인 4253억원을 뛰어넘는 수치다. 뮤지컬계 ‘극성수기’로 꼽히는 4분기 매출이 포함되면 2023년의 뮤지컬 시장 규모는 무난히 5000억원을 돌파할 것으로 전망된다.
원종원 순천향대 교수는 “지난해 뮤지컬계는 비상 시국에서 벗어나는 해로, 검증된 작품이 (무대에) 많이 올라갔다”며 “팬데믹 기간 동안 많은 손실을 본 제작사들이 시장이 팽창하는 시점에서 실수를 줄이기 위한 전략이었다”고 했다.
▶스타 독식·대작만 흥행...뮤지컬 시장 양극화=지난해 한국 뮤지컬계의 ‘고질병’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다. 배우 중심의 대극장 작품 위주로 흥행을 이어가며 캐스팅에 따라 객석 점유율이 차이가 났고, 대극장 창작 뮤지컬의 공연 수는 극히 적었다. 중·소극장 작품 중에는 조기 폐막작도 나오기도 했다. 외적 성장 뒤로 양극화가 선명하게 드러난 것이다.
이와 함께 도전적인 시도와 실험은 증발했고, 수백억원을 들여 제작한 신작 뮤지컬 수준은 기대 이하였다. 그야말로 총체적인 난국이라 할 만하다.
그럼에도 흥미로운 것은 시장 규모는 확대됐다는 점이다. 콘텐츠는 ‘그 나물에 그 밥’인데 관객은 수 십만원을 주고 극장을 찾는다는 것. ‘볼 사람’은 무조건 ‘보는 시장’이 됐다.
이 같은 기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은 뮤지컬 관객의 독특한 특성 때문이다. 현재 뮤지컬 관객은 크게 ‘N차 관람’을 하는 ‘회전문 관객’과 1년에 1~2편 정도 뮤지컬을 즐기는 일반 대중으로 나뉜다. 이중 일반 관객은 배우와 작품의 인지도를 기준으로 작품을 고른다.
배우의 팬덤에 이끌린 관객은 입맛도 너그럽다. 작품보다는 배우 때문에 작품을 보다 보니 ‘비판의 요소’가 개입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뮤지컬은 장르의 특성상 라이브로 노래를 듣고, 스타의 얼굴을 마주한다는 만족감이 크다”고 말했다. 제작사가 안주하기에 딱 좋은 환경인 것이다.
지혜원 경희대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는 “영화나 드라마와 달리 뮤지컬은 고가의 티켓 비용을 고려해 입소문이 난 작품, 실패 확률이 적은 작품을 고를 수밖에 없다”며 “이에 뮤지컬은 신선하고 새로운 것을 좇는 컨템포러리 장르가 아닌 클래식 장르가 되리라는 우려가 크다”고 말했다.
▶새로운 시도·실패 지원금 필요할 때=업계의 고질병을 뜯어 고치려면 ‘대대적인 혁신’이 필요하다는 게 중론이다. 특히 ‘새 얼굴’이 절실하다. 새로운 작품, 새로운 창작진, 새로운 스타, 새로운 브랜드 등 새로움을 기반으로 내실을 다져 본격적인 산업화를 시작할 때다.
원종원 교수는 “그간의 뮤지컬 시장은 독자적인 산업의 동력을 찾으며 발전해 온 만큼 이제는 대대적인 분갈이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지혜원 교수 역시 “새로운 스타, 신진 창작진 발굴로 업계의 내실 다지기가 필요한 때”라고 조언했다.
그렇다고 민간 제작사가 모든 위험 부담을 떠안으라는 말은 아니다. 수백억원을 투자한 ‘새 작품’이 관객의 외면에 직면했을 때, 발생하는 손실을 모두 떠안기엔 제작사의 사정이 녹록치 않다. 다수의 제작사들이 팬데믹 동안 ‘적자의 늪’에서 고생을 한 탓이다. 업계 관계자들도 “제작 결과의 위험 부담을 제작사에게만 지우는 것은 너무나 가혹하다”고 말한다.
‘발상의 전환’과 새로움을 시도하기 위해선 다양한 지원이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의 조언이다. 지 교수는 “현재는 ‘성공 확률이 높은 작품’, ‘돈이 될 만한 작품’으로 지원금이 쏠리지만,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곳에 지원금이 쓰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패에 대한 부담 없이 새로운 작품을 만들도록 신진 창작진을 지원하고, 신선한 시도를 마음껏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설명이다.
원 교수 역시 “세제 혜택을 통해 제작 비용을 줄이고, 다양한 실험을 할 수 있는 창작 기지를 마련해야 한다”며 “20~30년 후 뮤지컬 시장의 토대를 다지고 세계 시장에 진출하는 로드맵을 짜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고승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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