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수자 예술가 엔젤…‘상징성’ 대변
신구 엔젤의 공연 비교 재미 쏠쏠
김호영 [신시컴퍼니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권아, ‘렌트’라는 뮤지컬의 엔젤이라는 역할이 있어. 너처럼 하얗고 예쁜 김호영이라는 오빠가 하는데, 나중에 커서 네가 꼭 이 역할을 했으면 좋겠어.” (선예)
‘운명 같은 예언’은 이미 21년 전 시작했다. 원더걸스 선예는 지난 2002년 연습생 시절 열아홉 살에 ‘렌트’의 엔젤 역으로 뮤지컬에 데뷔한 김호영의 첫 공연을 보고 연습생 동료인 조권에게 이렇게 말했다. 조권은 당시를 떠올리며 “지금도 선예가 ‘52만5600분의 시간들’이라며 ‘시즌스 오브 러브’(‘렌트’ 주요 넘버)를 흥얼거리던 기억이 난다”며 “호영이 형이 저렇게 있는데 ‘내가 감히’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오디션 공고가 떴을 때 홀린 듯이 내 시간이 왔다는 생각을 했다”며 웃었다.
지난 긴 시간 동안 ‘절친’이 된 김호영(40)과 조권이(34) 마침내 한 무대(‘렌트’·내년 2월 25일까지, 코엑스아티움)에 한 역할로 섰다. 20여년 만에 성사된 ‘꿈의 무대’다. 조권은 ‘엔젤’ 역에 입성했고, ‘엔젤의 상징’인 김호영은 ‘굿바이 무대’를 이어가고 있다.
조권의 첫 무대를 하루 앞둔 날, 김호영은 “내일은 소년이 꿈을 이루게 되는 날”이라며 “내 마지막 엔젤의 여정 끝에 ‘권이 엔젤’을 만나 나도 참 기쁘고 영광이다”는 글을 남겼다. 대문자 F인 조권은 그 밤에 이 글을 보고 눈물을 왈칵 쏟았다. 당시를 떠올리던 김호영은 “반신욕을 하다가 전화를 걸었다더라”며 “마지막 공연도 아니고 이제 시작인데 왜 울까 싶어 당혹스럽긴 했지만 ‘그럴 수 있지’라는 마음이었다”고 말했다.
처음과 끝은 어딘지 닮았다. 또 다른 서사의 시작에 선 김호영과 조권을 각각 따로 만났다. 따로였지만, 함께였다. ‘엔젤’의 끈으로 단단히 이어져 있어서다.
김호영 [신시컴퍼니 제공] |
“난 너보다 남자답고 네 여자친구보다 섹시해.” (‘렌트’ 엔젤의 대사)
온몸을 크리스마스 트리로 치장한 사랑스러운 엔젤. 그가 등장하면 무대도 객석도 분위기가 달라진다. 하이힐을 신고 책상 위로 고무공처럼 깡충 뛰어오르며 ‘싱잉 랩’을 이어가면 관객들의 탄성은 절로 터진다. 극I(내향형) 마저도 끌어올리게 만드는 ‘저 세상 흥’의 권위자. 김호영은 모든 무대와 장면의 주인공이지만, ‘렌트’에선 별나게 돋보인다. 김호영이 곧 엔젤이고, 엔젤은 곧 김호영처럼 보인다.
어느덧 김호영은 ‘렌트’의 막내 라인에서 맏형이 됐다. 전 세계 50개국 25개 언어로 공연된 이 작품의 현존 최고령, 최장수 ‘엔젤’이다. 그는 “다섯 번의 시즌까지 오면서, 지난 2020년부터 저보다 어린 콜린(엔젤의 상대역)을 만나게 됐다”며 감회에 젖었다.
그 오랜 시간 ‘렌트’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배우다. 김호영의 엔젤은 하루 아침에 태어나지 않았다. ‘전설’의 동북고 연극반 출신인 그는 고교 시절 청소년 연극계에서 “여학생보다 여자 연기를 잘하는 남학생”으로 이름 꽤나 알렸다. 김호영은 “엔젤의 외형적인 모습만 보고 잘할 수 있겠다 싶어 오디션에 갔다”고 돌아봤다. 김호영은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렌트’가 어떤 작품인지도 몰랐다.
김호영 [신시컴퍼니 제공] |
가난, 마약, 동성애…. 1990년대 뉴욕의 재개발 지구에 사는 가난한 예술가들의 이야기. 시간이 흘러도 파격적인 소재들이 버무려진 무대엔 9명의 청춘들이 저마다의 고민으로 오늘을 산다. 누가 주인공이라고 할 수 없으나, 작품의 메시지를 관통하는 ‘숨은 주인공’은 있다. 바로 관객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엔젤’이다.
“작은 역이라고 생각했어요. 오디션에 합격하고 나서, 엄마한테 ‘대사가 거의 없고, 노래가 딱 하나 있어. 근데 중간엔 죽어.’ 그랬더니 엄마가 ‘첫 술에 배부르겠냐’며 위로하더라고요. 첫 공연 이후 사인회를 했는데 난리가 났죠. 엄마는 절 항상 ‘슈퍼스타’라고 했는데, 정말로 ‘슈퍼스타가 됐다’며 기절초풍하셨어요. (웃음)”
김호영의 첫 상대역, 콜린은 배우 성기훈이었다. 이제 막 뮤지컬 계에서 첫 발을 디딘 어린 엔젤을 지금의 모습으로 이끈 조력자다. 김호영은 당시를 떠올리며 “기훈 형은 나를 만나 문화충격을 느꼈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며 “이제 막 데뷔하는 엔젤같은 이 아이를 빛나게 해주기 위해 조언을 아끼지 않고, 마음껏 놀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줬다”고 말했다.
‘21년차 엔젤’은 시간의 길이를 통해 인식의 변화를 체감한다. ‘드래그(Drag·여장 남자)’라는 용어조차 세월이 지나면서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뀌었다.
“처음 무대에 섰을 때 관객들은 엔젤을 여자 배우라고 생각하더라고요. 당시엔 엔젤이 여자로 보이는 것에 대해 혼란스럽기도 했는데,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어떻게 보이느냐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었어요. 관객들이 엔젤을 사랑하는 것은 엔젤이라는 사람이 가진 사랑스러움 때문이니까요.”
‘렌트’와 함께 뮤지컬 배우 김호영도 성장했다. 타고난 뮤지컬 배우처럼 보이지만, 사실 소심해서 주위의 눈치도 많이 봤던 그였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는 “사람들이 지켜보는 데서 뭔가를 한다는 게 너무 창피해 다시는 뮤지컬 안 한다고 다짐하기도 했다”며 “아무 것도 모르던 신인에서 배우로의 욕심을 가지고 나의 길을 찾아가게 됐다”고 말했다.
‘절친’이 된 김호영(오른쪽 끝)과 조권(왼쪽 두 번째)이 마침내 한 무대(‘렌트’·내년 2월 25일까지, 코엑스아티움)에 한 역할로 섰다. 20여년 만에 성사된 ‘꿈의 무대’다. 조권은 ‘엔젤’ 역에 입성했고, ‘엔젤의 상징’인 김호영은 ‘굿바이 무대’를 이어가고 있다. [김호영 인스타그램] |
그가 엔젤을 ‘놓아줄 결심’을 한 것은 ‘렌트’의 20주년 공연이던 2020년 무대에서다. ‘호영 엔젤’과의 이별에 ‘렌트 마니아’들의 심경도 복잡하다. 타의가 아닌 자의로 자신의 역할을 내려놓는 경우는 거의 없기에 김호영의 결정이 서운하다.
“과연 선배로서 어떤 선배가 좋은 선배인가 생각했어요. 부여잡고 있는 것보다 자리를 내줄 수 있는 것이 미덕이 아닐까 싶었죠. 조권처럼 저 말고도 엔젤 역할을 잘해온 배우들이 있으니 공식적으로 인수인계를 해주려고요.”
김호영 역시 엔젤과 닮았다.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그는 엔젤처럼 사랑이 넘친다. 긍정적인 에너지와 밝은 빛이 김호영을 상징한다. 그는 스스로는 “어떻게 늘 사랑이 넘칠 수가 있겠냐”며 “인간 김호영은 사실 질투가 많지만,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엔젤과의 만남은 운명적이었던 것 같아요. 엔젤의 삶이 저의 삶에도 많이 스며들었어요. 투데이 포 유, 투모로우 포 미(Today for you, Tomorrow for me)!라고 말하며 열심히 살고자 하는 힘을 배웠어요.”
조권 [신시컴퍼니 제공] |
무려 12㎝, 아찔한 싸이하이 부츠를 신고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오디션장으로 향했다. 당연히 누구에게도 질 수 없었다.
“되는 안 되든, 나의 존재감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나처럼 특별한 사람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죠.”
조권을 따라다니는 수사는 늘 많았다. 예능에 ‘떴다’ 하면 분량을 모조리 집어삼키는 ‘깝권’이었고, 애틋한 이별 노래를 부른 ‘구남친’(2AM)의 대명사였다. 2013년부터 뮤지컬 배우로 겸업을 시작한 이후 조권은 독보적인 아이콘이 됐다. ‘프리실라’, ‘제이미’에 이어 ‘렌트’까지. 드래그 캐릭터를 만난 조권은 무대 위에서 마음껏 날아올랐다. 엔젤을 만나고도 그랬다.
조권은 ‘최장수, 최고령’ 엔젤 김호영과 꼭 닮아 있었다. 주체할 수 없는 흥과 끼, “하이힐만 신으면 영웅이 된 것 같다”는 그에게 ‘엔젤’은 ‘슈퍼 히어로’였다. 그는 “어쩌면 엔젤이 미래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할 정도다.
사실 엔젤은 복잡한 캐릭터다. 단순히 드래그 캐릭터가 아니라, 충만한 사랑으로 세상의 분위기를 바꾼다. 조권은 “하이힐을 신고 춤추고 노래하는 것은 나의 무기이지만, 엔젤의 내면과 드라마를 표현하기 위해 고민이 많았다”고 했다.
앤디 세뇨르 연출과 모든 배우들이 함께 하는 ‘테이블 워크’는 조권이 내면의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는 당시를 떠올리며 “너무나 아름답고 신비한 체험이었다”고 말했다. 테이블 워크는 서로의 마음 깊이 간직한 ‘각자의 드라마’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어릴 때부터 별종이라는 이야기를 정말 많이 들었어요. 여성스럽고 특이하다, 쟤는 우리랑 뭔가 다른 것 같다는 류였죠. 튀는 모습을 질투하는 친구들도 있었고, 학창 시절엔 왕따를 당하기도 했어요. 그러다 데뷔를 하고, 여러 일을 겪으며 제게 주어진 달란트를 깨달았을 때 난 특이한 것이 아니라 특별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조권의 살아온 시간은 엔젤에 대한 이해로 이어졌다. 그는 “엔젤도 나처럼 놀림도 당하고 따돌림도 당했을 것 같다”고 했다. 엔젤을 사랑하는 만큼 하이힐의 높이를 올렸다. 엔젤을 소화하는 배우는 보통 6~7㎝의 구두를 신지만, 그는 두 배는 족히 될 만큼 높은 힐을 신는다.
조권 [신시컴퍼니 제공] |
2세대 K-팝 그룹의 대표 주자였던 아이돌이 ‘여장 남자’의 캐릭터를 입은 것은 사실 쉬운 일은 아니다. 조권은 그러나 무대 위에서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로워 보인다. 그는 “어느덧 16년 차가 되고 보니, 가수로서도 뮤지컬 배우로도 자아 충돌이 일어난다”며 “무언가에 새롭게 도전하는 것이 맞는지, 가야하는 길로 직진하는 것이 맞는지 두 갈림길에 늘 섰던 것 같다”고 지난 시간을 돌아봤다. 고민의 시기에 만난 뮤지컬과 드래그 캐릭터는 그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줬다.
“여장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제가 가진 달란트(소명)라고 생각해요. 오랜 방황의 시간을 거치며 제가 깨달은 것은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세상 모두를 만족시킬 순 없다는 거예요. 전 제 안에서 행복을 찾는 게 우선이었어요. 엔젤을 만나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행복한 오늘을 사는 법을 배웠어요.”
엔젤을 만난 조권은 다시 반짝이는 시간을 살고 있다. 그는 “(호영이) 형이 대기실에서 할아버지 흉내를 내면서 ‘21년 째 하고 있다’고 장난을 친다. 그런 형을 보면서 존경심이 들었다”고 말했다. 자신의 이름 뒤에 따라온 ‘엔젤’이라는 두 글자에 대한 자부심도 크다.
“엔젤 역할로 지금의 제가 예쁘고 소중하게 빛날 수 있을 것 같아요. ‘조권이라서, 조권만이, 대한민국에서 대표적인 아티스트’라는 말을 꼭 듣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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