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3월까지 ‘학전 어게인’ 릴레이공연
“시나 재단이 맡아 김민기 정신 이어가길”
학전 폐관을 앞두고 뭉친 작곡가 김형석, 가수 박학기, 유리상자 박승화, 작사가 김이나, 배우 설경구 장현성 방은진 배해선 등 대중문화예술인은 “학전이 남긴 유산과 학전 DNA”를 강조하며 학전에서의 추억과 의의를 돌아봤다. [연합]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학전은 우리의 꿈을 위해 첫발을 디딘 곳이었고, 우리의 시작을 함께 한 곳이었어요.”
학전에서 출발해 학전에서 꿈을 키운, ‘학전 출신’ 예술인이 한 자리에 모였다. 지난 5일 오후 서울 강서구 한국음악저작권협회 KOMAC홀에서 학전 폐관을 앞두고 뭉친 작곡가 김형석, 가수 박학기, 유리상자 박승화, 작사가 김이나, 배우 설경구·장현성·방은진·배해선 등 대중문화 예술인들이 “학전이 남긴 유산과 학전 DNA”를 강조하며 이 곳에서의 추억과 의의를 돌아봤다.
‘아침이슬’, ‘상록수’를 부른 가수 김민기가 지난 1991년 시작한 학전은 지난 32년간 한국 공연 문화의 산실로 자리하며, 무수히 많은 예술인을 배출했다. 가수 고(故) 김광석·유재하·강산에·윤도현·재즈 아티스트 나윤선 등 음악인들이 이곳에서 성장했고, 이른바 ‘학전 독수리 5형제’로 불리는 설경구·김윤석·황정민·장현성·조승우 등 연기파 배우들도 낳았다. 학전의 역사는 찬란했지만, 이젠 마침표를 찍을 때가 됐다. 김민기의 암 투병과 경영난 때문이다.
가수 박학기(한국음악저작권협회 부회장)는 “학전은 우리가 첫발을 내디딜 수 있는 꿈의 장소였다. 그렇기에 나름의 뿌리를 내리고 나무로 성장할 수 있었다”며 “돌아보면 그 자리에 언제나 김민기 선배가 있었다. 당신의 저작권료와 개인 재산을 털어 운영한 공간이었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학전에서 건반 연주자로 데뷔한 작곡가 김형석은 “(김민기) 형의 노래가 집회와 같은 과격한 장소에서 불려 형의 정서도 강할 줄 알았는데 철이 들고 들어보니 형이 추구한 것은 서정성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며 “덕분에 우리는 위로 받았고, 함께 희망을 가졌고 연대했다. 지금 K-팝이 글로벌 시장에서 성장한 것도 우리 모두의 DNA에 김민기의 음악이 있었기 때문”이고 말했다.
배우 장현성이 5일 오후 서울 강서구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서 열린 학전 어게인(AGAIN) 프로젝트 기자회견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 |
학전을 거친 배우들에게도 이 곳은 각별하다.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은 1994년 초연 후 4000회 이상 무대에 오르며 무수히 많은 배우들을 배출했다.
배우 설경구는 “저는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의 포스터를 붙이다가 탑승한 케이스”라며 “용돈벌이 하러 갔다가 선생님 덕분에 데뷔를 했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그냥 성실해 보여서 (캐스팅)했다고 하더라”며 지난 시간을 돌아봤다. 배우 장현성은 “20대 초반 학전에서 배우 생활을 시작했다”며 “김민기 선생님은 ‘너희와 못자리 동산 짓는다는 생각으로 작업한다’며 ‘앞으로 여기서 쌀도 수확되고 해서 많은 사람이 정서적으로 행복한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고 했었다”고 회상했다.
지난 1994년 ‘지하철 1호선’ 초연에 합류한 배우 방은진 역시 “시작했을 땐 1000회, 2000회, 4000회까지 역사에 남는 공연으로 나아갈지는 생각지도 못했다” 며 “학전은 매달 (출연료를) 정산해줬다. 모든 걸 투명하게 공개하고, 극장 대표와 뮤지션이 같은 금액을 받아본 게 처음”이라고 말했다.
‘학전 출신’ 예술인들에게 학전은 곧 김민기였다. 폐관 소식을 들은 박학기는 예술인들을 모아 ‘학전’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학전과 김민기 대표를 향한 고마운 마음을 전하는 공연을 열기 위해서다. 박학기는 “우리는 김민기라는 사람에게, 학전에 마음의 빚이 있다고 생각한다”며 공연 시작 계기를 설명했다.
작곡가 김형석. [연합] |
학전을 거친 예술인들은 창립 33주년을 맞는 내년 봄 폐관을 앞두고 열리는 학전에서의 마지막 공연인 ‘학전 어게인(AGAIN)’에 무보수로 오른다. 내년 2월 28일~3월 14일까지 이어질 공연엔 26~27팀의 가수와 학전 출신 배우들(가수 윤도현·유리상자·이은미·시인과 촌장, 배우 황정민·설경구·장현성)이 이름을 올렸다. 공연의 구성은 세 가지다. 가수와 배우들이 꾸미는 무대, ‘김광석 다시 부르기’ 무대, ‘김민기 트리뷰트’ 무대다.
방은진은 “김민기 대표와 구성원들은 학전 폐관을 검토하며 이제는 닫을 때가 됐다고 판단을 내렸다”며 “다만 폐관도 학전답게 하자는 뜻을 모아 이번 공연을 열게 됐다”고 말했다. 김민기는 ‘학전 어게인’에 대해 “알아서 해”라는 답변을 줬다고 했다.
한 자리에 모인 배우과 가수들은 ‘학전 DNA’가 계속 이어가길 바란다. 이에 학전의 폐관 소식은 누구보다 이들 모두에게 큰 상실로 다가왔다. 현재의 학전은 누적된 경연난으로 온전히 서기가 힘든 상황이다.
설경구는 “사실 즐거운 자리가 아니라는 생각에 이 자리에 오기 싫었다”고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그는 이어 “학전은 청년문화가 성장한 상징적 존재”라며 ”시나 재단 쪽에서 이어갈 수 있지 않나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박학기도 “현재의 학전은 누군가 몇 달 도와준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며 “김민기 형님의 정신을 이어나가면서 학전 DNA가 유지되려면 서울시든 재단이든 맡아 유지해야 한다고 본다”고 일갈했다. 그는 또 “공연을 통해 모은 돈은 학전의 재정상태에 보탬이 되고,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도록 사용될 것”이라고 했다.
학전은 이 공연을 끝으로 막을 내린다. 연말까지 ‘지하철 1호선’ 공연을 이어가고, 2024년 1월 6일 ‘김광석 다시 부르기’ 공연을 한 뒤, ‘학전 어게인’을 시작한다.
학전 출신 예술인들과 김민기의 바람은 “소극장 앞의 학전 간판과 김광석 부조가 새겨진 벽을 보존해 학전을 기억하는 것”이다. 장현성은 “(이번 공연이) 저마다의 인생에서 귀중한 시간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 같다”며 “슬프지만 그래도 ‘학전 어게인’이지 않나. 굉장히 기쁜 순간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우리는 학전의 폐관을 막아달라고 모인 건 아니에요. 학전에서 자라난 우리가 김민기 선생님을 리스펙트 하면서 공연하는 거예요. 눈부시게 성장한 K-팝의 뿌리가 분명 있을 거예요. (K-팝이라는) 레드카펫의 바닥엔 검열로 노래를 마음껏 부르지 못했던 진흙투성이 (시절이) 있었어요. 우리는 김민기의 등을 밟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이제 그 등 위에 묻은 흙 정도는 털어드리고 싶은 마음이에요.” (박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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