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경계하는 것은 실패가 두려워 도전하지 않는 거예요. 접시 몇 개가 깨지더라도, 설거지는 해야죠. 가끔은 비싼 도자기가 깨질 수도 있지만, 그 책임은 극장장이 지는 겁니다. 그렇게 변화를 만들어가야 해요.”
바이올린을 전공한 1세대 예술행정가. 박인건 국립극장장의 별칭은 ‘보스(Boss) 건’이다. 1987년 예술의전당을 시작으로 36년간 예술경영인으로서 한 길을 걸었다. 이름 앞에 붙는 수사답게 박인건 극장장의 추진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취임 10개월 차에 접어든 현재, 국립극장은 ‘극장의 기준’을 흔든 ‘변화’의 모습을 그려가고 있다. 달라진 국립극장은 생기가 넘친다. 지천명의 나이에도 국립극장은 여전히 ‘청춘’이다. 극장은 ‘좋은 콘텐츠’만 담기면 충분하다는 생각을 넘어 ‘최고의 명소’여야 한다는 신념이 국립극장에 확산되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변화의 중심엔 ‘예술행정가’라는 직업의 사명을 꿰뚫고 있는 박인건 극장장이 있다.
태생이 ‘예술행정가’였던 것은 아니다. 박 극장장은 초등학교 6학년 때 바이올린을 손에 쥔 이후, 대학에서도 음악을 전공했다. 졸업 이후에도 바이올리니스트로 연주 활동과 공연기획을 겸하다가 예술의전당이 재단으로 출범할 때 입사해 공연기획부장으로 실무를 진두지휘했다.
‘예술행정가’는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치가 만난 직업이다. 그는 “예술은 결과를 중시하고, 행정은 과정을 중시하는 성향이 있어 둘은 쉽게 합쳐질 수 없다”고 했다. 때문에 예술행정가의 역할은 ‘예술과 행정의 균형’을 맞추는 일이다.
“예술가에게는 행정가의 고충을 설명해서 이해시키고, 행정가에게는 예술가의 마인드, 생각을 공감하도록 하는 작업이 필요해요. 예술행정가는 양쪽에 서로의 생각을 전달하고 소통하게 만드는 ‘전도사’와 ‘다리’ 역할을 해야 하죠.”
그의 역할은 거치는 곳마다 빛이 났다. 13년간 예술의전당에 몸담은 청년 시절의 가장 큰 성취는 ‘교향악 축제’다. 지금까지 무려 30년간 이어지고 있는 예술의전당 교향악 축제는 박 극장장이 공연기획팀장 시절 만든 대형 클래식 페스티벌이다. 그는 “당시 한국 교향악 자원이 척박했는데 축제가 성공적으로 개최되며 교향악 발전에 기여했다는 자부심이 있다”고 돌아봤다.
예술의전당을 거쳐 세종문화회관 공연기획부장, 경기아트센터 사장, KBS교향악단 사장, 대구오페라하우스 대표이사를 지냈다. 충무아트센터 사장을 맡았던 40대는 박 극장장이 꼽는 인생의 가장 큰 변곡점이다. 책임과 권한을 함께 얻었던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유수의 기관을 거친 박 극장장은 지난 경험을 밑거름 삼아 국립극장에서도 큰 그림을 그려가고 있다. 극장장 취임 이후 그는 국립극단, 국립오페라단, 국립발레단, 국립합창단,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서울예술단, 국립정동극장의 수장을 한 자리에서 만났다. 내년에 개관하는 파주무대예술지원센터의 활용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서다.
박 극장장은 “국립오페라단을 비롯한 예술단체들이 자기만의 집이 없다”며 “국립예술단체가 함께 할 수 있는 전용공간을 만드는 것이 국립극장이 해야할 일이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예술의전당 교향악 축제처럼 국립극장을 통해 한국 무용 기반의 전국 국·공립 무용단이 한 자리에 모이는 축제도 기획하고 있다. 고승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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