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만 총 세 번 협연
정명훈이 지휘하는 뮌헨 필하모닉과 협연한 피아니스트 임윤찬 [빈체로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잠시 숨이 멎는 시간이었다. 임윤찬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 2악장. 극단적인 느림이 쌓아올린 침묵의 순간들은 온전히 음악이 됐다. 결코 누구와도 같지 않은 임윤찬 만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이었다.
2023년 ‘오케스트라 대전’의 마침표 격인 뮌헨 필하모닉과 세계적인 지휘자 정명훈, ‘클래식 아이돌’인 피아니스트 임윤찬의 공연이 마침내 막을 올렸다. 뮌헨 필은 지난 24일 대구를 시작으로 다른 나라는 거치지 않고 한국에서만 총 여섯 번의 일정을 이어간다. 26일 열린 서울 예술의전당 공연은 세 번째 시간이었다. 임윤찬의 협연은 이후 29일 세종문화회관, 다음 달 1일 롯데콘서트홀로 이어진다. 30일엔 협연자로 바이올리니스트 클라라 주미 강이 나선다.
이날의 공연도 어김없이 ‘클래식 스타’들의 위엄이 입증됐다. 한국을 대표하는 지휘자로 수 십년간 강력한 팬덤을 자랑해온 정명훈과 2020년대 등장한 클래식 스타 임윤찬 중 한 명만 등장해도 매진은 따 놓은 당상. 두 사람이 만났으니 공연장은 일찌감치 대란이 예고됐다. 공연 직전까지도 콘서트홀 로비에선 프로그램 북을 구매하려는 사람, 현수막 앞에서 사진 한 장이라도 더 찍으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1500부만 판매한 프로그램북은 공연 전 일찌감치 모두 팔려나갔다.
정명훈이 지휘하는 뮌헨 필과의 협연에서 임윤찬이 연주한 곡은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이었다. 이 곡은 미국 뉴욕 카네기홀에서 두 번째로 많이 연주된 곡이다. 국내에서도 지난 12일 한국을 찾은 베를린 필하모닉과의 협연에서 조성진이 연주했고, 임윤찬의 스승인 손민수가 이달 초 포항음악제에서 연주한 곡도 바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이었다.
정명훈이 지휘하는 뮌헨 필하모닉과 피아니스트 임윤찬 [빈체로 제공] |
베토벤이 36세였던 지난 1806년에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 4번은 비슷한 시기에 쓰인 ‘운명’ 교향곡과 결이 다르다. 이 시기 베토벤의 곡들은 주로 ‘불굴의 의지’를 표현했지만, 이 곡만 유달리 서정적이고 시적이다. 무엇보다 오케스트라가 아닌 피아노가 먼저 시작하는 ‘파격’ 덕분에, 피아니스트의 존재감이 강력하다. 피아니스트가 연주하는 첫 다섯 마디는 앞으로 35분 간 이어질 곡의 전체 서사를 압축한 예고편이라 할 수 있다.
임윤찬의 첫 다섯 마디는 풍성한 소리가 뱉어내는 ‘호흡의 미학’이 돋보였다. 사유와 서정을 채워넣은 시작은 2000여 관객이 임윤찬에게 집중하기에 충분했다. 풍성함 속에서도 맑은 소리를 놓치지 않은 연주는 뮌헨필의 화사한 선율이 이어받으며 본격적인 항해를 알렸다.
임윤찬의 음색은 투명하면서도 단단한 무게감이 있었다. 금방이라도 부서져 내릴 듯한 여린 음색이 아니었다. 밀도를 꽉 채운 타건으로 오케스트라 사이를 거침없이 진격했다. 정명훈은 악기군 하나 하나를 선명한 소리로 살려내면서도 피아노를 온전히 돋보이도록 조율했다.
1악장은 피아노와 피아노의 대화 같았다. 임윤찬은 손끝의 터치로 감정의 진폭을 조절하며 그만의 세상을 만들었다. 1악장 말미에 등장하는 카덴차는 속도는 빨라지고 트릴(꾸밈음)은 선명해졌다. 이 순간을 기다린 것처럼 현란한 기교가 폭발하면서도, 명징하고 명료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했다. 흥미로운 것은 그것이 자유분방한 피아니스트의 강요로 다가오진 않았다는 점이다. 하나의 악장을 통해 임윤찬은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이 사랑을 속삭이는 서정으로만 채우진 곡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줬다.
정명훈이 지휘하는 뮌헨 필하모닉과 피아니스트 임윤찬 [빈체로 제공] |
묵직한 현의 선율로 2악장이 시작되면 피아노는 내면을 탐색하듯 자조의 시간을 가진다. 서정이 넘쳐흐르는 2악장의 템포는 더 느려졌고, 숨 막힐 듯한 정적의 순간들이 길어졌다. 임윤찬의 독백이 남긴 여운이 짙게 이어져 숨을 내쉴 겨를도 없었다. 밝고 경쾌하게 시작한 3악장에선 음악적 즐거움이 가득 채워졌다. 오케스트라가 묵직하고 웅장한 존재감으로 자리하면서도 피아노를 향해 자상한 배려를 하며 서로 경쾌한 대화를 이어나가는 듯 보였다. 임윤찬도 3악장을 연주하는 내내 허공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연주를 마친 뒤엔 다시 소년으로 돌아간 듯 정명훈의 품에 뛰어드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임윤찬의 진짜 고백은 앙코르에서 나왔다. 리스트의 ‘사랑의 꿈’이었다. 순수한 사랑의 열망이 빼곡히 담긴 연주였다. 소년의 사랑은 누군가에겐 고백이었고, 누군가에겐 회상이었다. 화답이 쏟아졌다. 어마어마한 함성은 기본이었다. 1열의 관객은 임윤찬에게 레고로 만든 붉은 장미 한 송이를 건넸다. 임윤찬은 그 장미를 뮌헨 필의 악장에게 건네며 무대를 떠났다. 이날의 명장면이었다. 임윤찬의 K-팝 스타급 인기는 공연 직후 콘서트홀 로비에 다시 확인됐다. 공연 포스터를 받으려는 사람들의 줄이 끝을 모르고 이어졌고, 끝내 포스터의 수량이 다 떨어졌을 땐 비명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정명훈과 뮌헨 필하모닉 [빈체로 제공] |
2부에선 베토벤 교향곡 3번의 무대가 이어졌다. 최초의 ‘낭만주의 교향곡’인 이 곡은 영웅을 향한 갈망, 영웅의 등장과 죽음, 영웅의 부활 혹은 새로운 등장이라는 기승전결을 노래한다. 정명훈과 뮌헨 필이 만들어낸 ‘존중의 선율’은 탄탄한 구조와 깊이 있는 해석으로 완성됐다. 현의 음폭으로 써 내려가는 ‘서사의 힘’이 강력했다. 어느 악기 하나 죽지 않고 소리가 조화를 이뤘고, ‘절제의 미’를 강조하는 구성으로 관객을 쥐락펴락했다. 섬세함과 웅장함을 쉴 새 없이 오가면서도 자극적이지 않은 우아한 고상함이 묻어 난 거장의 해석이었다. 연주를 마치자 관객들은 너나없이 기립해 함성을 보냈고, 정명훈은 악단을 바라보며 큰 박수를 건넸다.
이날 정명훈은 “이 곡을 마치면 앙코르가 힘들어 하지 않으려 했는데 단원들이 그래도 하자고 해서 뭘 해야 하나 고민했다”며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한 사람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며 ‘아리랑’(김바로 편곡)을 들려줬다. 솔로 악기 한 사람 한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도입을 연 뒤, 모든 악기가 음을 쌓아갔다. 이토록 아름다운 ‘아리랑’은 다시 없을 것이 자명했다. 정명훈은 명불허전 ‘관객 조련사’였다.
sh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