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출·대본 맡은 미셸 슈와이저
오는 24~25일, 모두예술극장
장애ㆍ비장애 예술가 협업
관계를 맺으며 나를 찾는 시간
장애인과 비장애인 예술가가 협업해 만든 한국과 프랑스의 공동창작 다원예술 작품 ‘제자리(In-situ)’에 출연하는 비보이 김완혁. 고승희 기자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의족을 한 비보이 김완혁. 고등학생 때 포기했던 비보잉을 다시 시작한 건 2013년 난데없이 찾아온 사고가 계기가 됐다. 느리고 차분해서 붙은 그의 비보이 이름은 ‘곰’. 그의 몸은 여전히 자유롭다. 앞구르기를 하고, 물구나무를 서고, 의족을 떼어낸 뒤 한 다리로 무대를 쿵쿵 뛰어다닌다. 그리고는 의족을 다시 신고 무대 위를 빠르게 내달린다. 아쟁의 연주에 삶의 파고(波高)가 담긴다. 그는 어디든 갈 수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네가 나를 볼 때 너는 나의 의지를 봐야돼. 내 몸의 선 하나하나가 보여주는게 그거야. 내 자신을 지탱하는 이 능력, 어떤 상황에서나. 난 이 세상에 다시 익숙해졌고, 세상이 다시 친숙해졌어. 하지만 난 내 몸의 시작, 내 몸의 어린시절 좋았던 모습을 잊어야 됐어.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서.” (‘제자리’ 완혁의 대사 중)
2022년 9월, 10명(배우, 연출)의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사람’, ‘장애, 비장애, 국적, 연령에 관계없이 문화와 삶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참가 요건’이 붙었다. 프리랜서 비보이이자 유튜버인 김완혁, 뇌병변 장애를 가진 사진작가 이민희, 20대에 연극배우로 활동하다 병을 앓고 중년이 된 류원선, 발달장애인 무용단을 이끌고 있는 박기자, 장애인문화예술극회 ‘휠’의 부단장 이승규, 아쟁 연주자 정지윤…. 직업, 나이, 성별, 장애 유무 등 저마다 다른 9명의 배우들은 6개월의 만남 동안 서로를 알아가며 ‘관계’를 맺었다. 이 창작 프로젝트엔 ‘제자리(In-situ)’라는 제목이 붙었다. ‘제자리(11월 24~25일·모두예술극장)’는 장애인과 비장애인 예술가가 협업해 만든 한국과 프랑스의 공동창작 다원예술 작품이다.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이 설립, 운영하는 국내 최초의 장애예술공연장인 모두예술극장의 해외 초청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연출과 대본을 맡으며 작업을 이끈 미셸 슈와이저는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 경험의 중심에는 인간관계가 있다”며 “내가 모르는 새로운 문화와 환경을 경험하며 본연의 나를 찾아가는 과정을 담은 프로젝트”라고 말했다.
프랑스 극단 ‘라 콤마’의 창립자인 미셸 슈와이저는 ‘다큐멘터리 연극’의 선구자로 불린다. 그는 최근 개관한 모두예술극장의 해외 초청 프로그램인 ‘제자리(11월 24~25일·모두예술극장)’를 통해 장애인과 비장애인 예술가가 어우러진 협업 작품을 연출하고 대본을 썼다.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제공] |
어찌보면 길고 지난한 작업이다. 미셸 슈와이저의 작업은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짜여진 기존의 공연예술 작업과는 다르다. ‘제자리 창작 프로젝트’는 오디션을 통해 무대에 올라갈 사람들을 뽑는 것으로 시작했다. 2022년 8월 참가자 모집을 한 뒤, 그 해 9월부터 2023년 2월까지 세 차례의 창작 워크숍 과정을 거쳤다. ‘제자리’라는 제목에 대한 느낌을 묻는 슈와이저의 질문이 프로젝트 워크숍의 첫 단추가 됐다.
“진정한 나를 찾아간다는 문구를 보고, 내 자리가 있다면, 그건 어디일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참가자 박채린)
슈와이저는 “나의 작업은 무에서 출발한다”며 “함께 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살펴보고, 어떤 일을 하고 있고, 왜 여기에 왔는지, 이 작업을 왜 수락했는지 한 인간으로 마주하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했다.
‘제자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그리 닮은 점이 없다. 슈와이저는 “오디션을 볼 땐 서로가 달라야 한다는 점을 염두하고 직관적으로 선택했다”며 “9명의 배우들을 통해 인간의 다양성과 그들이 공존하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말했다. 무대에 올리는 특정 프로젝트가 아닌 이상 각자의 세계에선 접점이 만들어지지 않는 사람들의 조합이다.
6개월간 이어진 워크숍은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슈와이저는 “이 과정을 통해 배우들은 저마다 감성, 문화, 열정, 사회적 위치, 정치적 견해 등 각자가 생각하고 인식하는 세계와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과정을 거친다”며 “서로의 연결이 없으면 나와 프로젝트를 할 수가 없다. 내가 존재하고, 다른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을 통해 대본을 완성한다”고 말했다. 슈와이저의 작품 세계가 이어온 작업 방식이다.
프랑스 극단 ‘라 콤마’의 창립자인 미셸 슈와이저의 별칭은 ‘언어의 안무가(Chorégraphe de la parole)’. 그의 작업은 음악과 움직임(춤), 대사가 있지만 하나의 장르를 규정하기 어렵다. 다만 메시지가 확실하다. 그의 작업을 관통하는 것은 ‘다양성’과 ‘관계’다. 그는 “깊은 ‘관계 맺기’가 작품 활동의 원동력”이라고 말한다.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제공] |
프랑스 극단 ‘라 콤마’의 창립자인 그는 ‘다큐멘터리 연극’의 선구자로 불린다. 그의 직업은 하나로 규정되지 않는다. 배우이자 연출가이며, 안무가이자 무대 미술가다. 별칭은 ‘언어의 안무가(Chorégraphe de la parole)’. 그의 작업은 음악과 움직임(춤), 대사가 있지만 하나의 장르로 규정하기 어렵다. 다만 메시지가 확실하다. 그의 작업을 관통하는 것은 ‘다양성’과 ‘관계’다. 그는 “깊은 ‘관계 맺기’가 작품 활동의 원동력”이라고 말한다.
“열 살 때, 트라우마가 있었어요. 모든 것이 멈추는 것 같았죠. 관계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진정한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됐어요. 어른이 되면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형성하게 하는 작업은 무엇일까 생각했어요. 예술 분야라는 답을 찾았어요.”
관계는 다양한 사람들과 그들의 이야기에서 나온다. 때문에 그의 무대엔 ‘전문’ 배우가 올라가는 일이 드물다. 그는 “전문적인 배우들과의 작업은 세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 좋은 춤, 좋은 연극을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가 천착하는 관계는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시작해 시선을 확장해간다. 슈와이저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과 환경,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생각과 연구를 많이 하고, 그로 인한 변화를 관찰해왔다”며 “사회의 모든 곳에서 관계가 약화되고 있고, 관계의 필요를 인식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프랑스 극단 ‘라 콤마’의 창립자인 미셸 슈와이저는 ‘다큐멘터리 연극’의 선구자로 불린다. 그는 최근 개관한 모두예술극장의 해외 초청 프로그램인 ‘제자리(11월 24~25일·모두예술극장)’를 통해 장애인과 비장애인 예술가가 어우러진 협업 작품을 연출하고 대본을 썼다. |
슈와이저의 작품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그들 자체로 하나의 세계다.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쌓은 시간은 대본으로 완성된다. 그의 대본은 철학과 사유로 채워져있다. 그러면서도 배우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내면으로 깊숙이 접근한다.
“굉장히 철학적이고 시적인 표현들이 많아요. 프랑스 식으로 대본을 썼더니, 번역이 쉽지 않아 어떤 부분은 배우들이 이해를 못하더라고요. 조금 더 단순하게 써달라는 요청도 있었는데, 그게 잘 안되더라고요. (웃음)”
대본은 개인의 삶과 개인과 사회, 개인과 세계에 대한 인식을 넓힌다. 시 한 편으로 쓴 철학서를 읽는 것 같은 대본은 ‘살아있음’을 자각하게 한다. 이러한 작업은 배우, 함께 하는 스태프 등 모두의 변화를 이끈다. 그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과 함께 하다 보며 나보다 감각이나 능력이 더 뛰어나다고 느낀다”며 “그들 역시 이 과정을 통해 중요한 경험이 됐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고 말했다.
무대는 서로 다른 9명의 특성이 어우러져 새로운 세계를 만든다. 전혀 다른 사람들이 모인 특별한 공동체이기도 한다. 슈와이저는 “한 프랑스 철학자가 이야기한 것처럼 사람은 누구나 영웅이다. 태어나 죽기까지 삶의 많은 과정들을 헤쳐나가는 영웅의 형태를 보인다”며 “그 어떤 사람도 우위에 없고,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로 존재하며 공존하는 곳”이라고 했다.
리허설 중 슈와이저는 배우들에게 중요한 조언을 건넸다. “여러분의 몸은 하나의 태양과 같아요. 빛나는 얼굴로 이야기하세요. 아마 관객 중엔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삶의 곳곳에서 만나던 평범한 사람들의 무대는 관객이 가진 선입견을 전복한다. 이 작품은 만들어진 세계가 아닌 그들 자신의 무대다. 관객들이 봐야 하는 것은 하나의 인간으로의 존재다.
“무대 위의 배우들은 작품 속 배역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 그대로 존재해요. 선입견에 갇히는 사람은 바로, (연기를 보러온다고 생각한) 관객인 거죠. 9명의 사람들을 한데 모아 대본을 썼으나 궁극적으로는 연출이 사라지는 것이 제 목표예요. 배우들을 하나의 존재, 한 명의 인간으로 인식하고, 그들의 삶을 보는 자리가 되길 바랍니다.”
sh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