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무용단 ‘엘리자베스 기덕’
키스 그림 24점으로 엮은 조선
현대적 ‘한국 무용’으로 재해석
서울시무용단의 신작 ‘엘리자베스 기덕’(11월 2~5일까지·세종문화회관)은 키스가 바라본 조선의 풍경과 키스가 남긴 편지를 토대로 구성됐다. 정혜진 서울시무용단 단장, 민천홍 의상 디자이너. [세종문화회관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한국인의 자질 중에 제일 뛰어난 것은 의젓한 몸가짐이다. 어느 화창한 봄날 일본 경찰이 남자 죄수들을 끌고 가는 행렬을 보았는데 번쩍이는 제복을 입고 총칼을 찬 일본 사람보다 죄수들이 오히려 더 당당한 모습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엘리자베스 키스, ‘올드 코리아’ 중)
1919년 3월, 3.1운동 직후 독립을 향한 열망이 끓어오르던 조선에 엘리자베스 키스(1887~1956)가 첫발을 디뎠다. 한국에 머물며 남긴 그림은 총 80여점. 100년 전 이방인의 눈에 담긴 한국은 기품있는 우아함과 아기자기한 사랑스러움이 가득했다. 애틋한 시선으로 바라본 작가의 마음이 쌓여서다.
“키스의 그림을 처음 본 건 2008년이었어요. 그 안엔 우리가 알고 있던 조선이 아닌 또 다른 조선이 있더라고요.” (정혜진 서울시무용단 단장)
최근 세종문화회관에서 만난 정혜진 서울시무용단 단장은 키스가 그린 한국 풍속화 85점이 담긴 복원판 저서인 ‘올드 코리아’를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장장마다 붙어 있는 수십 개의 포스트잇엔 고민의 흔적이 역력했다. 15년 전 처음 본 그림을 무대에서 되살리기 위해 정 단장의 시간은 엘리자베스 키스와 함께 1919년으로 되돌아갔다. 이 작품의 구상 기간이 길었다. 애초 지난해 5월 올리려 했으나, 무용단의 대작으로 뉴욕 공연까지 다녀온 ‘일무’가 먼저 등판하며 미뤄졌다.
서울시무용단의 신작 ‘엘리자베스 기덕’(11월 2~5일까지·세종문화회관)은 키스가 바라본 조선의 풍경과 키스가 남긴 편지를 토대로 구성됐다. 엘리자베스 키스의 그림 중 ‘시골 결혼잔치’. [세종문화회관 제공] |
■ 패션에 진심인 ‘조선’…“섬세하고 정교해…남다른 패션 감각”
‘힙’해 보이기까지 한 블랙의 치마에 베이비 핑크색 저고리를 입고 깔맞춤한 고무신을 신은 소녀가 꽃단장한 신부를 바라본다. 한 해 중 가장 예쁘고 좋은 옷을 입었던 정월 초하루, 아이들이 뛰놀던 사월 초파일의 연등놀이, 마음속 깊이 품은 소원을 빌러 간 무당집….
서울시무용단의 신작 ‘엘리자베스 기덕’(11월 2~5일까지·세종문화회관)은 키스가 바라본 조선의 풍경과 키스가 남긴 편지를 토대로 구성됐다. 키스는 1934년 크리스마스 씰을 제작하면서부터 낙관을 한국식 이름인 ‘기덕’으로 바꿨다. 무대는 그가 남긴 그림 중 24점을 춤으로 풀어낸다. 지나온 시간을 품은 무용이기에 그것 자체로 우리의 역사이자, 그 순간을 함께 한 서양인이 바라본 생생한 기록이다.
정 단장은 “30대의 키스가 우리나라에 왔을 때의 감각을 담고자 했다”며 “그림을 똑같이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키스라는 사람의 생각 속에 들어가 무용을 풀어보고자 했다”고 말했다.
키스와 그의 그림을 되살리기 위한 첫 단추는 ‘의상’이었다. 이 작품을 위해 민천홍 의상 디자이너가 천군만마가 됐다. 민 디자이너는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한복의 느낌과 전통적인 색감을 키스의 작품을 통해 볼 수 있었다”고 했다. 100년 전 조선을 살았던 사람들의 의상은 박물관에서 마주한 ‘과거의 한복’과는 달랐다. 특히 빛깔과 곡선의 미묘한 차이가 흥미롭다.
“한복을 공부하면서 한국의 색상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전통의 색상을 염색하는 방법을 오래 배웠어요. 그런데 이번 기회를 통해 처음 접한 키스의 그림 안에 그 색상들이 있더라고요. 이토록 섬세하고 정교한 의상은 저도 처음이었어요.” (민천홍 의상 디자이너)
엘리자베스 키스의 그림 중 ‘아기를 입은 여인’ [세종문화회관 제공] |
키스가 담아낸 그림 속 한민족은 패션에 ‘진심’이었다. 온화하고 고상한 색감이 단정한 분위기를 내면서도 감각적이다. 민 디자이너는 “이 작품에서 불러내는 그림들은 굉장히 화려해 보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정감 있고 차분하다”고 봤다. 한 땀 한 땀 손으로 기워 만들었을 옷들은 정교하고 섬세하다. 그는 “색동의 색깔을 최소 8~10가지를 썼는데, 어떻게 이 작은 아이의 소매에 이렇게나 많은 조각을 담아낼 수 있을까 놀라웠다”며 감탄했다. 아이들의 저고리를 머리에 두르고 빨래터에 나간 여성들은 독창적인 ‘K-패션의 시발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그저 백의민족이라고 생각했잖아요. 그런데 키스의 그림 곳곳에서 한민족이 남다른 패션 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더라고요.(웃음)” (민천홍 디자이너, 정혜진 단장)
의상의 ‘구현 방식’은 무용의 방향성이 결정했다. 키스의 그림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당대 풍경과 그 풍경을 만드는 사람들이기에, 두 사람은 고증과 재해석 사이에서 고민이 오갔다. 해답은 ‘절충안’에서 찾았다.
민 디자이너는 “워낙 섬세하게 그려냈기에 나름대로 고증하듯이 재현하면서도, 그 시대의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고 귀띔했다.
키스의 그림에서 튀어나온 듯한 의상은 총 7벌, 그 외의 의상은 현대적인 감각으로 되살려 무용의 색깔과도 어울리게 했다. 의상뿐 아니라 수많은 꽃꽂이가 달린 족두리를 비롯한 소품들도 되살아났다.
“이미 키스의 그림을 통해 의상은 그것 자체로 완성이 됐어요. 무용은 춤으로 완성되는 작품이기에, 사실 무용 속 의상은 최소한의 것이에요. 가장 아름다운 의상은 무용수의 몸이자 그들이 추는 춤이에요.” (민천홍)
정혜진 서울시무용단 단장, 민천홍 의상 디자이너 [세종문화회관 제공] |
■ 과거와 현재·키스와 조선인이 만든 ‘춤의 대화’
‘엘리자베스 기덕’은 ‘춤의 대화’다. 외국인의 시선으로 본 100년 전 조선을 옮기며 과거와 현재의 교감을 끌어내고, “단 한 마디의 대화는 없었지만” 서로를 조심스럽게 관찰한 키스와 조선인의 ‘무언의 교류’를 그린다.
춤은 하나의 이야기가 됐다. 작품에서 관찰자 격인 키스가 바라본 조선의 사람들과 시대상은 이 작품의 큰 줄기다. 특히 여성의 존재가 중요하다. 천장이 낮은 작은 방에서 바느질, 다듬이질을 하는 여염집 여인들, 기이한 복장으로 굿을 하는 무속인, 결혼식 날의 새신부, 남편을 잃고 3.1운동으로 일본군에 잡혀간 아들을 둔 여인…. 서로 다른 상황에 처한 조선의 여인들이 하나로 이어져 무용의 줄기를 이룬다. 그것이 조선의 시대상이기도 했다.
“키스가 그린 그림 중 가장 감동적인 것은 ‘독립군의 아내’였어요. 남편과 아이를 잃었고, 옥에서 고초를 겪고 나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 여인의 모습엔 미움도 원한도 없어요. 그저 기품있는 모습을 담아냈죠. 독립군의 아내, 결혼식을 준비하는 신부가 서로 연결되며 조선의 여성상을 상징해요.” (정혜진 단장)
정혜진 서울시무용단 단장, 민천홍 의상 디자이너 [세종문화회관 제공] |
작품에선 한국 창작춤의 진화를 보여온 서울시무용단의 정체성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정 단장과 김성훈 안무가가 함께 작업한 작품은 전통을 기반으로 하되, 한국무용을 현대적으로 해석했다. “절제된 동시에 역동적이고, 느린 호흡과 빠른 동작”(정혜진 단장)을 오가며 무용단의 장기인 ‘칼박’, ‘칼군무’의 정수도 보여준다. 엘리자베스 키스 역할을 하는 무용수의 정적인 한국무용도 이 무대의 중요한 포인트다. 끊임없는 실험으로 한국 창작춤의 변화를 보여준 정 단장의 철학이 담겼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무용은 발레나 현대무용에 비해 테크닉이 없고, 지루하고 촌스럽다고 생각해요. 한국적인 것으로 관객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선 과거의 것을 답습하고 보존하는 것만으로는 시대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고난도의 빠른 움직임, 그러면서도 정교하고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는 동작, 시대와 호흡하는 안무로의 재구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정혜진 단장)
안무는 볼거리가 많다. “군무는 현대적으로, 솔로는 한국적인 움직임으로”(정혜진 단장) 풀었다. 정 단장은 “그림이 담아낸 세시풍속, 결혼식 등의 다양한 내용을 마임으로 일일이 설명하기 보다는 과감하게 춤으로 보여주고자 했다”고 말했다.
엘리자베스 키스 자화상 [세종문화회관 제공] |
두 사람이 꼽는 명장면은 시대상과 민족의 열망을 고스란히 담아낸 만세 장면이다. 민 디자이너는 “이 장면은 키스의 그림이라기 보다, 키스의 마음을 대변하고, 그의 심정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와닿았다”고 했다.
이 작품은 단지 외국인이 그린 한국의 풍경을 담아낸 것만은 아니다. 그 안엔 자신의 이름까지 ‘한국식’으로 바꾸며 비극적 시대를 함께 견딘 키스의 애틋한 마음이 담겼다. 그는 1956년 세상을 떠나며 자신의 조의금을 한국전쟁에서 부상 당한 사람들을 위해 써달라고 할 만큼 한국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키스의 그림 안에서 우리 한국의 문화와 정서를 만날 수 있고, 한국을 따뜻한 애정으로 바라본 키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 될 거예요.” (정혜진 단장)
“미처 몰랐던 한복의 아름다움이 서양인의 시선을 통해 그려졌어요. 이 작품은 과거의 것과 현대적인 것을 섞어 소중하게 완성한 조각보예요.” (민천홍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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