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ECD 등 물가안정 위해 유가 낮춰야
사우디·러 감산, 인플레 압력 높아져
美연준 긴축→강달러→신흥국 타격
韓 환율·금리↑, 가계 빚·소비에 부담
기업투자·재정지출 확대도 어려울듯
“OPEC가 하는 일은 중앙은행들과 비슷하다. 감산은 최소한(soft-touch)의 시장 규제일 뿐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에너지장관 압둘 아지즈 빈 살만이 최근 한 말이다. 무함마드 빈 살만 태자의 형이기도 한 그의 발언에서 앞으로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어떻게 움직일지 예상할 수 있다. 중앙은행이 물가안정을 위해 인플레이션 목표를 정해 기준금리를 올리고 내리듯이, OPEC도 공급 조정으로 적정 유가 수준을 유지해 필요한 만큼의 재정 수익을 확보하겠다는 뜻이다.
“에너지 가격 상승은 가계소비는 물론 소비자 심리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소비자에게 매우 중요하다. 관건은 유가 상승세가 얼마지 지속될 지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 제롬 파월 의장이 20일(현지시간) 기준금리 동결 발표 후 연내 추가 인상 가능성을 시사하면서 이같이 했다. 유가 상승세가 통화정책 결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다. 이날 연준 위원들은 내년 하반기 기준금리 예상치를 당초보다 높이면서 높은 수준의 금리가 상당기간 시속될 가능성을 더 높였다. 고유가는 높은 수준의 금리를 유지시키는 동력이 될 수도 있다.
국제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넘을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100달러를 돌파한다면 상징적 효과가 크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유가의 흐름이다. 미국 에너지정보국(EIA) 자료를 보면 7월 80달러를 돌파한 브렌트유 가격은 9월 90달러를 넘어 10월 93달러까지 오른 후 내년 3월까지 90달러 이상을 유지할 것으로 예상됐다. 3월 이후에도 88달러 선을 유지할 것으로 내다봤다. 서부텍사스중질유(WTI) 역시 마찬가지다. 금리와 마찬가지로 국제 유가도 높은 수준에서 오랜기간 유지될 것이란 관측이다. 어찌보면 금리와 유가는 힘겨루기다.
유가는 물가와 연동돼 인플레이션에 영향을 미친다. 인플레이션 관리를 통한 화폐가치의 안정은 중앙은행의 핵심 목표다. 중앙은행은 통화정책으로 경기를 조절한다. 경기에 따라 원유 수요도 늘거나 줄 수 있다. 산유국은 공급량으로 유가를 조절한다. 유가를 낮춰 경기를 자극할 수도, 유가를 올려 인플레이션 압력을 높일 수도 있다. 중앙은행과 산유국은 글로벌 경제라는 거대한 시소(seesaw)의 양쪽에 앉은 두 주인공이다. 서로 협조적이면 균형을 유지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아 보인다. ‘죄수의 딜레마’를 떠올리게 한다.
미국과 사우디 사이가 틀어진 배경에는 셰일오일이 있다. 미국은 중동산 원유의 중요성이 낮아지면서 사우디와 거리를 두게 된다. 대신 중국이 사우디의 최대 고객이 된다. 사우디는 세계 2위 산유국 러시아와 OPEC+(플러스)라는 ‘확대 카르텔’도 구축했다. 전제왕정의 젊은 태자에게는 민주주의와 인권 운운하는 미국 보다는 독재 체제인 중국과 러시아가 더 잘 통하는 상대였던듯 하다. 사우디는 최근 자원부국이 많은 브릭스(BRICs)에 가입했다. 국제 원자재 결제시장에서 달러의 절대적 지위를 어느정도 흔들 수도 있는 나라들이다.
사실 미국과 OPEC은 이미 한 차례 원유전쟁을 치렀다. 북미대륙에서 세일오일이 채굴되면서 두 나라는 유가 줄다리기를 했다. 미국은 셰일오일의 경제성을 유지하기 위해 일정 수준 이상의 유가를 원했다. 반대로 사우디는 셰일오일을 채굴해 팔아도 남는 게 없도록 유가를 낮춰서 견제했다. 셰일오일의 채굴단가가 낮아지고 국제유가도 그 이상 수준으로 유지되면서 1차 미·사 오일전쟁은 사실상 미국의 승리로 끝이 났다. 하지만 유가가 오르자 사우디가 반격에 나섰다. 이번엔 유가를 끌어올리는 작전이다.
EIA 자료를 보면 미국은 일평균 2100만 배럴 가까이 생산한다. 하루 소비량은 평균 2000만 배럴이 조금 넘어 이론적으로는 자급이 가능하다. 미국의 동맹인 유럽은 하루 1350만 배럴 이상을 소비하지만 북해 유전의 일평균 생산량은 400만 배럴이 채 되지 않는다. 미국 등 서방 진영을 대표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일평균 생산량은 3500만 배럴이 수준인데 소비량은 4600만 배럴에 달한다. 사우디와 러시아 등이 공급을 줄이면 미국은 몰라도 다른 OECD 국가들은 치명상을 입게 된다.
OPEC 자료를 보면 미국의 일평균 원유생산량은 2020년 1776만 배럴에서 2021년 1806만 배럴, 2022년 1928만 배럴로 매년 증가 추세다. 올해는 2048만 배럴, 내년에는 이보다2.9% 늘어난 2108만 배럴로 예상했다. 러시아는 지난 해 1103만 배럴을 기록했지만 올해와 내년에는 1045만 배럴을 유지할 것으로 OPEC은 관측했다. 세계 일평균 수요는 지난해 9962만 배럴에서 올해 1억206만 배럴로 2.45% 늘었고 내년에는1억431만 배럴로 2.2% 증가할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면 OPEC은 어떨까?
OPEC는 비회원국 생산은 예측하지만 회원국의 생산량 예상치는 공개하지 않는다. EIA의 월별 일평균 생산량을 단순평균하면 미국은 올해 2163만 배럴, 내년 2215만 배럴로 2.4% 늘어난다. 같은 방식으로 OPEC는 올해 3333만 배럴에서 내년 3376만 배럴로 1.2% 증가한다. 러시아는 1364만 배럴에서 1360만 배럴로 줄어든다. OPEC+은 줄이고 미국은 늘리는 게임이다. 소비량이 줄지 않는 한 원유가 주수입원인 OPEC+는 남는 장사다. 미국도 원유를 수출하지만 유가가 올라도 경제 전반으로 득보다 실이 많다
미국과 사우디의 싸움이지만 우리나라에 미치는 영향이 엄청나다. 달러화를 쓰는 무역 비중이 높고 중동산 원유 수입에 전적으로 유지하는 경제구조 때문이다. OPEC+가 고유가를 자극하면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금리를 낮추기 어렵게 된다. 달러가 계속 강한 상태면 원화는 약세다. 원유는 달러를 주고 사와야 한다. 물가 부담이 엄청날 수 있다. 물가가 오르면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상 압력이 높아진다. OECD 최고 수준인 가계 빚의 이자부담이 커진다. 이자 부담으로 소비가 위축되면 경기가 더 나빠질 것은 뻔하다.
연준과 OPEC+의 행보에 우리나라가 영향을 미칠 방법은 없다. 주어진 상황과 환경에 잘 대응하는 게 최선이다. 이론적으로 가계소비 위축을 타개하려면 기업이 투자를 확대하거나 정부가 재정지출을 늘려야 한다. 현실적으로 둘 모두 기대하기 어렵다. 수출이 주력인 우리 기업의 투자는 글로벌 수요의 영향을 받는다. 중국 시장은 점점 기대할 게 없어지고 새로운 대체 시장은 아직이다. 재정 건전성을 안정을 우선 순위에 둔 정부도 씀씀이를 늘릴 의지가 없어 보인다. 원화가치도 불안하고 금리도 더 오를 듯 한데, 큰일이다.
kyhong@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