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 폭탄에 英 국민들 ‘작은 정부’ 주도 대처 전 총리 ‘향수’
수낵 “나는 상식적 대처주의자”…정부 재정 신중한 접근 강조
트러스, 감세와 ‘매파’ 외교·군사 정책 어필…대처 옷·행동 따라 해
9월 2일까지 보수당원 우편·온라인 투표…현재 트러스 크게 앞서
리시 수낵(왼쪽부터) 전 영국 재무장관,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 리즈 트러스 영국 외무장관의 모습. [더선 홈페이지 캡처, 마거릿 대처 재단 홈페이지] |
[헤럴드경제=신동윤 기자] “영국 차기 총리를 선출하는 레이스에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의 유령이 돌아다니고 있다.”
미국 일간 워싱턴포스트(WP)가 사임 의사를 밝힌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의 후임을 뽑기 위한 집권 보수당 대표 경선의 양상을 표현한 한 마디다.
차기 총리 레이스에서 ‘최후의 2인’이 된 리즈 트러스 외무장관과 리시 수낵 전 재무장관은 서로 자신이 대처 전 총리와 가장 닮은 인물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경쟁 중이다.
기록적 수준의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이 영국을 비롯해 전 세계 경제를 짓누르는 가운데,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한 ‘전쟁광’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맞설 강인한 지도자의 모습으로 ‘철의 여인(Iron Lady)’으로 불렸던 대처 전 총리가 소환되고 있는 것이다.
이달 1일 시작된 16만여 보수당원들의 우편·온라인 투표는 다음달 2일까지 진행된다.
[BBC 방송 화면 캡처] |
당원들은 다음달 5일 트러스 장관과 수낵 전 장관 중 한 사람을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이후 영국을 이끌어갈 지도자로 선택하게 된다.
수낵 전 장관이 총리가 되면 영국 역사상 첫 유색인종 총리라는 의미를 갖는다.
트러스 장관이 경선에서 승리할 경우 영국 역사상 세 번째 여성 총리가 된다.
코로나19 대유행 때문에 발생한 보건·경제 위기는 ‘대처리즘(Thatcherism)’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과감한 정부 지출이 필요한 시기 영국을 이끌었던 존슨 총리는 세금을 더 걷는 ‘큰 정부’ 정책을 펼 수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역대 최고 수준까지 오른 세금을 맞닥뜨린 영국 국민들은 ‘작은 정부’ 시대를 주도했던 대처 전 총리가 다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되살아났다는 것이다.
1979년 처음 집권한 대처 총리는 집권 초 경제 전문가들은 물론이고, 내각 구성원들까지 반대했던 신자유주의 시장경제 중심 성장 정책이란 ‘급진적 개혁’을 뚝심 있게 추진했고, 1990년까지 집권하며 일명 ‘영국병’으로 불리던 사회·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며 영국을 개조하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영국병(British Disease)은 과도한 복지와 정부 개입 때문에 경제적 어려움에 벗어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속출하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지난 1980년 재임 당시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의 모습. [AP] |
WP는 “공권력을 동원한 노조 과잉 진압, 양극화 심화 등 대처 시대의 실패 기억은 희미해지고, 미화된 과거의 성공에 대한 추억이 피어오르고 있다”고 평가했다.
총선이 아니라 보수당원들만을 대상으로 한 투표란 점도 대처 전 총리를 다시 찾는 이유라고 미국 인터넷 매체 악시오스는 분석했다. 보수당원들이 평균적인 영국인들에 비해서 고소득 백인 고연령층으로 보수적 색채가 강하다는 것이다.
1990년 11월 22일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가 영국 의회에서 발언하고 있는 모습. [유튜브 'The New York Times' 채널 캡처] |
보수당 당원 모임인 보수 민초의 책임자 벤 해리스-퀴니는 “누구든 더 보수적이고 우파적으로 보이는 사람이 보수당 대표 경선에서 승리할 것”이라며 “이것이 바로 이번 선거에 나선 최종 후보 2인이 대처 전 총리를 끌어들이는 이유”라고 말했다.
정책적 부문에 있어서 만큼은 자신이 대처 전 총리와 가장 많이 닮았다는 점을 주요 선거 전략으로 쓰는 쪽은 수낵 전 장관이다. 그는 자기 스스로를 가리켜 ‘상식적인 대처주의자’라고 부른다. 정부 재정을 좀 더 신중하게 다뤄 번 만큼 지출해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이 대처리즘의 가장 기본이며 대처 전 총리가 현재 시점에 돌아온다 하더라도 자신과 같은 정책을 펼 것이란 주장이다.
수낵 전 장관은 최근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와 인터뷰에서 “대처주의자로서 총리직에 도전했고, 총리가 된 후에도 대처주의자의 모습을 잃지 않고 영국을 이끌 것”이라고 주장했다.
[유튜브 'Guardian News' 채널 캡처] |
정부 재정만큼은 신중하게 접근하지만, 성장 촉진을 위해선 대처처럼 ‘급진적 개혁’을 시작할 준비가 됐다는 점도 약속했다.
지난달 23일 첫 유세 장소도 수낵 전 장관은 대처 전 총리의 고향인 그랜섬을 선택했다. 보수당 골수 당원들이 많은 그랜섬은 대처 전 총리가 식료품점 딸로 태어나 자란 곳이다.
반면, 트러스 장관 측은 자신들이야말로 “현존하는 진짜 대처주의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수낵 장관의 ‘감세 신중론’은 적극적 감세 정책으로 성장 동력을 확보했던 대처 전 총리의 정책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 트러스 장관 측의 주장이다.
트러스 장관은 최근 영국 일간 데일리메일에 대처 전 총리가 취임 초 경제학자 364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장 위주의 정책을 과감히 밀고 나간 모습을 가리켜 “통념에 도전한 것”이라고 치켜세우며, 자신의 즉각적 감세 공약이 이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유튜브 'Guardian News' 채널 캡처] |
외교·군사적 측면에서 ‘매파’적 성향을 보이는 것도 대처 전 총리와 맞닿는 지점이라고 트러스 장관 측은 내세운다. 외무장관으로서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한 러시아와 서방 중심의 국제 질서에 도전하고 있는 중국에 대한 공세에 앞장선 자신의 모습이 1982년 ‘포클랜드 전쟁’ 당시 영국 전반에 퍼진 회의론을 이겨내고 항공모함 등 대규모 부대를 파견해 아르헨티나와의 전쟁에서 승리했던 대처와 오버랩 된다는 것이다.
다만, 대처 전 총리의 옷차림과 말투, 몸짓 등을 그대로 따라 한 듯한 트러스 장관의 모습은 ‘대처 코스프레’란 비아냥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현재까지 상황만 놓고 봤을 때는 보수당원들은 트러스 장관이 수낵 전 장관에 비해 대처의 후계자로 더 적합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영국 여론조사기관 유고브가 영국 일간 더 타임스와 함께 지난달 29일부터 지난 2일까지 보수당원 1043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트러스 장관에 대한 지지율이 60%로 26%의 지지를 받고 있는 수낵 전 장관을 2배 이상의 격차로 앞섰다.
유고브가 지난달 20~21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양측의 격차가 18%포인트(트러스 49%, 수낵 31%)였던 것에 비하면 차이가 더 벌어진 것이다.
추격이 급한 수낵 전 장관 측은 2029년까지 7년간 소득세 기본세율을 현 20%에서 16%로 낮추는 감세 정책을 시행하겠다는 공약을 급히 내놓기도 했다.
선거 전문가인 스트래스클라이드 대학의 존 커디스 교수는 두 후보 간의 지지율 격차가 크지만 경선이 끝났다고 확신하기엔 이르다고 평가했다. 그는 “두 후보 모두 상당히 급진적이고 대담한 공약을 내놓고 있는 상황”이라며 “전체 보수당원들에게 해당 공약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아직 불확실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realbighead@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