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실리 칸딘스키, 구성 8(일부 확대), 1923 |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 "교수님. 혹시 불편하신 곳이라도…?"
1896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인상주의 회화 전시회. 안내원이 한 신사에게 다가가 말을 겁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말쑥한 이 신사가 클로드 모네의 그림 '건초 더미' 앞에서 망부석처럼 굳어있던 겁니다. 돗자리를 주면 바로 깔고 앉아 살림이라도 차릴 기세였습니다. 깔끔한 가르마와 커다란 안경. 이 신사는 평생 책만 끼고 살았을 듯한 '범생이' 스타일입니다. 그런 사람이 '건초 더미' 앞에선 남의 곁눈질도 보이지 않는 듯 입을 떡 벌리고 있습니다. 몇 시간째 그 자리를 지킵니다. "우리 법학과 교수님인데요. 지금 그림 앞에서 몸이 마비되셨어요. 가서 봐주실래요?"라는 말에 달려온 안내원은 자기 세계에 빠진 이 신사에 당황합니다.
"저기, 교수님?"
안내원이 계속 말을 걸자 신사는 이제야 고개를 돌립니다. "그, 그러면 즐거운 관람 되세요." 안내원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종종걸음으로 돌아서던 순간…. "그런데 말이오." 이번에는 이 신사가 말을 겁니다. "이 그림, 알고 있었소?" "네?" "건초 더미를 그렸다는 점을 한눈에 알아봤소?" "저는 제목을 보고…." 안내원은 두서없는 질문을 받고 움찔합니다. 이 신사가 있어야 할 곳은 전시회가 아닌 다른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묘사는 없고 빛에 비친 인상만 있으니…. 나도 그렇소. 제목을 보기 전까지는 이 그림이 무엇을 그린 건지 몰랐소. 그런데 말이야. 대상을 저따위로 내팽개치고 색채만으로도 경이로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 이거야말로 정말 경이로운 일 아니오?"
클로드 모네, 건초 더미(연작) |
신사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은 안내원은 그를 올려다봅니다.
이 신사는 감동에 푹 젖어 있습니다. 촉촉한 두 눈에서 곧 눈물이 떨어질 듯합니다. "내가 그림을 잡아둔 게 아니오. 그림이 나를 잡아둔 거였소." 종일 모네의 그림 '건초 더미' 앞에 있던 이 신사는 그제야 자리를 뜹니다. 안내원은 이 신사를 유심히 봅니다. 그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꼭 '무언가 저지를 것 같은' 느낌입니다.
"이 그림은 나를 붙잡았다. 내 기억에 절대적 영감을 줬다. 놀람과 혼란스러움에 젖어 들었다. 이 그림은 내게 동화 같은 힘과 화려함을 선사했다." 모네의 그림 앞에서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고 간 신사는 바실리 칸딘스키(1866~1944)입니다. 법대 교수였던 칸딘스키는 이날 갑자기 "화가가 되겠다!"고 결심합니다. 서른을 갓 넘긴 나이였습니다. 그간 배운 법학 이론은 뒷방에 쌓아둡니다. 새로운 길을 걷습니다. 그 결과, 그조차도 상상하지 못한 삶을 삽니다. '추상회화 선구자'의 생입니다.
바실리 칸딘스키, 구성 8, 1923 |
갖은 형태와 색채가 흩뿌려져 있습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건 화폭 왼쪽 위에 있는 크고 검은 원입니다. 이 원은 나머지 작은 원의 태양인 양 기준점 역할을 합니다. 뾰족한 삼각형, 날카로운 직선과는 강력한 대조를 이룹니다. 노란색과 주황색 등 밝은색, 짙은 빨간색과 파란색 등 어두운 색도 대립합니다. 도형만큼 선도 마구 그어졌습니다. 검은색 수직선과 수평선, 둥근 곡선은 팽팽히 기싸움을 하는 듯합니다.
그림을 지긋이 보고 있으면 활기가 샘솟습니다.
자꾸 무언가를 상상하도록 등을 떠밉니다. 누군가는 어린 시절 형형색색 크레파스를 갖고 놀던 때, 누군가는 학창 시절 꿈꿔본 '마법의 성' 같은 환상 세계를 떠올립니다. 통통 튀는 원과 쭉쭉 뻗어나가는 선을 보다 보면 리듬감도 느껴집니다. 머릿속에서 경쾌하고 숨 가쁜 여러 음악이 재생됩니다.
그런데요. 느낌은 알겠는데 도대체 뭘 그린 걸까요?
왼쪽에 크게 있는 검은 원 하나, 그 옆에 나란히 선 산꼭대기 같은 밑변 없는 삼각형 두 개만 있었다면 그림의 분위기는 차분했을 것 같은데요. "좀 특이하긴 해도…. 해와 산이 있는 고요한 풍경을 그렸구나!"라는 생각도 할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형형색색의 원과 반원, 정체 모를 삼각형과 사각형, 온갖 선과 색깔이 말 그대로 '끼얹어진' 탓에 "그림 참 역동적이네! 근데 그리고 싶은 게 뭐야?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생각도 듭니다. 칸딘스키의 작품 '구성 8'입니다.
칸딘스키는 추상회화 시대를 연 선구자입니다.
그로 인해 예술계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넙니다. 칸딘스키는 이런 업적으로 인해 호불호가 가장 큰 화가 중 한 명으로 남게 됩니다. 추상회화란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무언가를 그리는' 기법입니다. 다시 말해, 내 '두 눈' 앞에 있는 대상을 그리는 게 아닌 '마음의 눈'으로 보는 환상을 그리는 겁니다. 화폭에 굳이 대상을 담을 필요도 없습니다. 기분, 느낌, 감정만 죽죽 그어내도 충분하다는 겁니다.
가령 잘 익은 사과를 추상회화로 그린다고 상상해볼까요. 눈을 감습니다. 빨간색, 울퉁불퉁한 표면, 작고 둥근 형태…. 전달받은 사과의 첫인상을 곱씹습니다. 이제 눈을 뜨고 사과의 냄새를 맡아봅니다. 통통 두드리고 살살 문질러봅니다. 살짝 베어 물어 맛도 봅니다. 이제야 붓을 듭니다. 이 사과의 겉모습보다도 '마음의 눈'으로 느낀 모든 것을 쏟아붓습니다. '사과의 새콤달콤한 냄새를 그리려면 통통 튀는 색을 써야겠어. 사과 특유의 쌉싸름한 맛을 담으려면 날카로운 선도 빼놓을 수 없어….' 이러다 보면요. 결국 사과의 온전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무슨 선과 도형, 온갖 색채만 캔버스에 뿌려지게 됩니다.
폴 세잔, 사과 바구니가 있는 정물 |
칸딘스키는 이런 점에서 '폴 세잔의 키즈' 중 한 명이었습니다.
세잔은 "사과가 꼭 빨간색일 필요는 없다!"는 점을 발견한 화가입니다. '그림은 있는 그대로를 재현하는 행위'라는 룰에 처음으로 돌직구을 날린 겁니다. 진리에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자타공인 세잔 키즈인 앙리 마티스와 파블로 피카소가 이를 놓치지 않습니다. 마티스는 야수주의를 통해 "사과? 빨간색 근처에도 가지 마. 파란색이든, 검은색이든 네가 느낀 대로 칠해!"라고 말합니다. 피카소는 입체주의를 통해 "사과? 둥글게도 그리지마. 세모든, 네모든 네가 느낀 대로 그려!"라고 설파합니다. 이 두 화가로 인해 '그림은 재현이다'라는 진리는 너덜너덜해집니다. 칸딘스키는 해머를 들고 와 진리를 아예 박살 내버립니다. 칸딘스키는 사과를 어떻게 들들 볶을지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냥 사과 자체를 없애버립니다. "사과를 사과로 그리지마. 아니, 아예 눈앞에 사과가 있어야만 뭘 그릴 수 있다는 생각부터 지워버려!"라고 다그친 셈입니다.
바실리 칸딘스키, 원 속의 원 |
회화란 '대상' 없이 그 자체로 홀로 설 수 있어야 한다는 게 칸딘스키의 신념이었지요.
생각, 즉 아이디어만으로도 그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 대상 없이 점, 선, 면과 이를 아우르는 색만으로도 보는 이에게 감동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 겁니다. 칸딘스키로 인해 회화는 대상에서조차 해방을 맞이합니다. 이렇게 "회화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무언가를 재현하기는 해야 하는 것"이라는 불문율마저 무너집니다.
칸딘스키는 어쩌다 이런 급진적 발상을 했을까요.
칸딘스키는 1913년에 펴낸 '회상록'을 통해 3년 전에 겪은 일화를 소개합니다. 칸딘스키는 당시 독일 무르나우에서 생활했습니다. 추상회화에 발은 담갔지만,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겪던 시기였습니다. 그런 칸딘스키는 어느 날 야외 스케치를 마친 뒤 작업실에 왔을 때 평생 겪지 못한 경험을 합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름다운 그림을 본 겁니다. 어떤 대상을 그린 게 아니었습니다. 오직 밝은 색 면으로 구성된 작품이었습니다. 칸딘스키는 '대체 이건 누구 그림이야? 어쩜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가?'라며 감탄합니다.
그런데요. 알고 보니 이 그림은 자기 그림이 우연히 옆으로 넘어진 것이었습니다. 다음 날 칸딘스키는 그 감동을 또 느끼려고 그림을 왼쪽, 오른쪽, 거꾸로 막 세워봅니다. 하지만 그 그림 속에 그려진 대상이 자꾸 감동을 밀어내는 느낌을 받습니다. 칸딘스키는 이때 이렇게 생각합니다. "형체를 알아볼 필요 없이 선과 도형, 색 조합만으로도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구나!"
바실리 칸딘스키, 구성 7 |
1910년대 당시 유럽 전역을 긴장에 빠뜨린 1차 세계대전이 칸딘스키의 급진성을 부추겼다는 말도 있습니다.
총칼과 폭탄은 아름다움을 봐주지 않습니다. 고대 시대의 찬란한 유물마저 부서지고 무너집니다. 그토록 칭송받던 전통적 예술품이 허무하게 망가집니다. 화가들은 무력감을 느낍니다. 무차별적 폭격이 이뤄지던 상황임을 감안해도, 전설적인 작품들이 흔한 돌멩이처럼 취급받는 일을 보고 "이건 너무하다"며 좌절합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무릎 꿇을 만큼 절대적인 예술 작품이란 아직 이 세상에 없는 것이었어…." 당시 추상회화를 연구하던 칸딘스키도 마찬가지 감정이었겠지요. 그는 절망감과 함께 마음 한쪽에선 용기도 꽃피웁니다. "새로운 시도에 더 박차를 가해야겠구나!"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릴 수 있어. 그렇다면 화가는 앞으로 무엇을 그려야 하는가.'
칸딘스키는 고민합니다. 영감을 줄 소재를 찾습니다. 그리고 답을 내립니다. "그래, 음악을 그려보자!"라고요.
칸딘스키의 '구성 8'을 다시 꺼내 볼까요.
바실리 칸딘스키, 구성 8(일부 확대), 1923 |
바실리 칸딘스키, 구성 8(일부 확대), 1923 |
두둥실 떠 있는 몇몇 원은 음표 같습니다. 흰색과 검은색 사각형은 피아노 건반 느낌이 납니다. 죽죽 그어진 선은 음표를 그려 넣는 오선(五線)을 떠올리게 합니다. 사실 칸딘스키의 '구성 8'은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를 듣고 그림으로 나타낸 겁니다. 뭘 보고 그린 게 아니고 뭘 듣고 그렸다는 겁니다. 칸딘스키는 음악을 그림에 접목한 후 "음악이 최고의 선생님이다!"라고 칭송했습니다. '구성'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Composition'에는 작곡이란 뜻도 있습니다. 누군가는 '구성 8'을 보고 "오케스트라를 듣는 것 같았다"고 하고, 더 예민한 누군가는 아예 "묘한 떨림을 느꼈다"고 하는 건 이 때문일 겁니다.
바실리 칸딘스키, 구성 8(일부 확대), 1923 |
'이제 모델 섭외 없이 언제든 그릴 수 있어. 그렇다면 화가는 어떻게 해야 기복 없이 그림을 다 성공작으로 만들 수 있을까.'
칸딘스키는 이 고민의 답도 '구성 8'을 통해 내놓았습니다. 운과 컨디션에 기댄 비효율적 방식에서 벗어나 '추상 공식'을 만든 뒤 이를 적용합니다. 가령 칸딘스키는 ▷노란색은 지상의 따뜻한 색, 트럼펫과 같은 고음 ▷파란색은 하늘의 차가운 색, 플루트·첼로, 파이프 오르간의 저음 ▷검은색은 음향이 없는 가장 약한 울림, 미래와 희망 없는 영원한 침묵과 죽음 ▷흰색은 무음, 가능성으로 가득한 침묵과 젊음 등으로 정의합니다. 사람들이 공감하든 말든 "이제 내 그림은 다 그래! 예외는 없고, 그러니까 기복도 없어. 오케이?"라며 밀어붙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 시기 대부분 화가는 그림 실력에 기복이 심했습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모델과 장소 섭외부터 작업 일시와 시간 조율, 포즈와 사물 배치 등 외풍(外風)에 시달렸습니다. 붓을 들기도 전부터 기진맥진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모든 것을 100% 준비해도 그날 '필'과 컨디션이 꽝이라면 그림은 망작이 됩니다. 다 그랬습니다. 모네도 그랬고, 세잔도 그랬습니다. 마티스와 피카소도 가끔은 믿을 수 없을 수준의 망작을 내놓았습니다. 칸딘스키가 현대 시대의 변수 없는 '공장제 미술' 기반을 닦은 겁니다.
이런 점들로 인해 '구성 8'은 칸딘스키식 추상회화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 중 하나로 꼽힙니다. 색채와 형태에 대한 철학과 심리적 효과 등을 계산해 배치한 사실상 첫 작품이라는 평을 받습니다.
칸딘스키는 음악 애호가였습니다.
바실리 칸딘스키, 인상 3 |
칸딘스키는 추상회화의 궁극적 목표를 '교향곡을 완전히 그리기'로 둘 만큼 음악에 진심이었습니다. 칸딘스키의 음악 사랑은 그림 '인상 3'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피아노는 검은색, 관중은 그 아래 빨간색과 파란색, 주황색 등으로 표현했습니다. 음악이 뿜어내는 열기와 관중의 환호는 노란색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왼쪽 위에 바다 앞 꽃밭처럼 보이는 건 음악을 색채로 표현한 겁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작곡가 아놀드 쇤베르크의 콘서트에서 깊이 감동한 칸딘스키가 집으로 돌아와 그린 작품입니다.
바실리 칸딘스키, 즉흥 19 |
칸딘스키가 독일 작곡가인 리하르트 바그너의 '로엔그린'을 듣고 그린 그림이 '즉흥 19'입니다.
화폭 대부분은 파란색이 차지합니다. 빨간색과 노란색, 주홍색과 보라색 등이 왼쪽 위를 중심으로 마구 칠해졌습니다. 사람과 나무로 짐작되는 무언가가 짙은 검은색 선으로 그려졌습니다. 칸딘스키는 음악을 들으면서 느낀 화려한 색채를 캔버스에 과감히 흩뿌렸습니다. 그러고는 이런 말을 합니다. "세상은 건반이고 정신은 피아노, 화가는 피아노를 연주하며 영혼을 울리는 손이다."
이쯤에서 누군가는 칸딘스키의 '네이밍 센스'가 불친절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다.
안 그래도 이해하기 힘든 그림인데 제목까지 성의 없다고요. 칸딘스키의 주요 작품은 ▷인상 ▷즉흥 ▷구성 등 제목으로 나뉩니다. 음악 등을 처음 접했을 때 받은 그 느낌을 담았다면 '인상', 우발적으로 즉시 표현했다면 '즉흥', 시간을 두고 천천히 그렸다면 '구성'입니다.
바실리 칸딘스키 |
칸딘스키가 처음부터 별종은 아니었습니다.
1866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칸딘스키는 곧장 법학자의 길을 걷습니다. 칸딘스키는 모스크바 대학에서 법과 경제학을 배웁니다. 어린 나이지만 전문성을 인정받아 대학교수가 됩니다. 칸딘스키는 그렇게 학자의 삶을 누립니다. 예술 활동은 취미 삼아 켜온 첼로와 바이올린 연주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칸딘스키의 삶은 그가 30대를 맞은 1896년에 송두리째 흔들립니다.
그 시기에 모네의 '건초 더미' 연작을 본 겁니다. 빛의 마법에 충격을 받은 그는 이전과 같은 삶을 살 수 없게 됩니다.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칸딘스키는 바로 독일 뮌헨으로 건너가 그림을 배웁니다. 칸딘스키는 행운아였습니다. 법과 경제학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인 그에게 미술 재능도 있었던 겁니다.
칸딘스키가 붓을 들자마자 추상 회화에 몸을 내던진 건 아니었습니다.
바실리 칸딘스키, 푸른 산, 1908~1909 |
비교적 혼란스럽지 않은 그림도 꽤 그렸습니다. 대표적인 게 그의 초기 대표작인 '푸른 산'입니다. 한가운데 푸른 산이 보입니다. 양옆에는 단풍에 물든 노란색과 빨간색의 나무가 있습니다. 아래에선 말을 탄 사람들이 유유히 지나갑니다. 무엇을 그렸고, 어떻게 그렸는지 확실히 알 수 있는 그림입니다.
바실리 칸딘스키, 청기사, 1903 |
칸딘스키는 '청기사' 같은 그림도 그렸습니다. 이 작품 또한 형태를 뚜렷하게 알아볼 수 있습니다. 두꺼운 붓질과 강렬한 색감으로 채워졌습니다. 당대 유행하던 인상주의, 주목받던 야수주의에 가깝습니다.
칸딘스키의 수식어로 따라오는 말이 '청기사파'입니다. 칸딘스키가 1911년 프란츠 마르크, 아우구스트 마케 등 뜻이 맞는 화가들과 결성한 추상회화 연합체입니다.
앞서 칸딘스키는 1904~1908년까지 파트너인 가브리엘레 뮌터와 유럽 곳곳을 여행했습니다. 세잔의 사과가 혁명을 일으키고 피카소와 마티스 등이 그 불씨에 손을 뻗던 때입니다. 인상주의로는 부족함을 느낀 칸딘스키도 여행 중 세상을 뒤흔들 수 있는 자신만의 방식을 연구합니다. 그 결과 추상회화를 열쇠로 잡은 겁니다.
바실리 칸딘스키, 기사 |
청기사파는 추상회화의 취지와 가능성을 인정한 모임입니다.
칸딘스키는 자신의 좋아하는 기사, 마르크가 즐겨 그린 말, 두 사람 다 애착을 느낀 청색을 섞어 '청기사파'라는 명칭이 생겼다고 밝힌 적이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각자 추상 회화를 받아들이는 정도는 달랐습니다. 하지만 예술을 통해 내면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는 같았습니다. 청기사파 소속 예술가들의 공동 집필작인 '청기사' 연감(年鑑)은 추상회화를 당시 유럽 내 가장 흥미로운 미술 사조로 만드는 데 공을 세웁니다. 가만히 두면 알아서 '폭풍 성장'할 가능성을 품은 연합체였습니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 해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르크와 마케 모두 목숨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프란츠 마르크, Blue Horse I |
칸딘스키는 동료 대부분을 하늘로 보냈습니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추상 회화에는 더욱 자신감을 얻습니다. 청기사파에 대한 대중의 호응이 나쁘지만은 않았으니까요. 1차 세계대전에 따른 화약 냄새가 날리던 당시 모스크바 미술 아카데미 교수를 지낸 칸딘스키는 1922~1933년 독일 데사우의 바우하우스에 둥지를 틉니다. 바우하우스는 교수진으로 칸딘스키 외에 화가 겸 음악가 라이오넬 파이닝거, 조각가 게르하르트 마르크스, 화가 파울 클레 등 '초특급 드림팀'이 있는 어마어마한 장인 교육기관이었습니다.
재직하고 있던 1923년에 문제작 '구성 8'을 그립니다. 또 1926년에는 '점, 선, 면'이라는 논문을 냅니다. 우리가 직관적으로 볼 수 있는 표상의 세상은 점, 선, 면으로 구성돼 있다고 주장하는 글입니다. 추상회화의 필연성을 설명한 겁니다. 앞서 설명한 노란색은 고음 표현, 파란색은 저음 표현 등 '추상 공식'도 이쯤에서 더욱 체계화합니다.
칸딘스키는 독일 나치의 표적이 되기도 했습니다.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는 1933년 바우하우스를 폐교합니다. 질서와 규율을 중시한 히틀러의 눈에 진보 예술을 꿈꾸는 바우하우스는 눈엣가시였습니다. 히틀러는 또 '퇴폐 미술전'이라는 전시회를 열고 나치의 지향과 어긋나는 그림들을 보여줍니다. 칸딘스키의 그림도 그 명단에 당연히 들었습니다. 그의 그림이 나치의 그늘에 소리소문없이 사라지는 일도 있었습니다.
칸딘스키는 결국 프랑스 파리로 넘어갑니다.
히틀러가 칸딘스키를 퇴폐 미술가로 찍어둔 탓에 활동에는 제약이 있었습니다. 나치가 그를 퇴폐 미술전에서 '공개 처형'한 후부터는 예전만큼 정열적으로 움직이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작품 활동은 이어갑니다. 죽기 직전까지 그림을 그렸습니다. 결과적으로 칸딘스키를 깎아내리려 한 나치는 실패했습니다. 칸딘스키의 추상 회화는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유럽 전역으로 퍼졌으니까요.
바실리 칸딘스키, 즉흥 28 |
칸딘스키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잘나가는 법학자의 인생부터 칭송과 조롱을 함께 받은 화가의 인생까지 모두 겪은 그는 1944년 77세 나이로 삶을 마감합니다. 몸은 늙었어도 정신은 다채로운 상상력, 멈춤 없는 도전 정신으로 가득한 상태였습니다.
"예술가는 눈뿐만 아니라 영혼도 훈련해야 한다." 칸딘스키의 이 말은 지금도 추상 회화 뜻을 따르는 후배들의 마음에 새겨지고 있습니다. 바우하우스 출신인 조각가 막스 빌은 칸딘스키에 대해 이렇게 말했지요. "칸딘스키는 청년들의 의혹을 없애주는 게 아니라 그들에게 확실한 판단력을 길러줬다. 끊임없는 자기비판을 환기하게 시킨 인물이었다"고요.
〈참고 문헌〉
서양 미술사, 에른스트 곰브리치, 예경
〈후암동 미술관 읽는 순서(연재 중)〉
①천사가 이렇게까지 운다고? 무섭게 왜 그래[후암동 미술관-조토 편] - 르네상스 선구자(2022. 7. 2.)
②세계서 가장 유명한 이 ‘레이저 눈빛’, 그것은 사랑?[후암동 미술관-얀 반 에이크 편] - 유화 선구자 (2022.5.21.)
③‘레드벨벳’도 춤추게 한 이 화가의 정체…"악마의 아들? 나 원 참" [후암동 미술관-보스 편] - 초현실주의 선구자 (2022.5.28.)
④아리따운 금발 여인, 외간남자 목을 베고 있는거야?[후암동 미술관-카라바조 편] - 바로크 선구자 (2022.6.11.)
⑤표류 D+13, 왜 몰랐지? 뗏목 위 널린 게 먹을건데[후암동 미술관-테오도르 제리코 편] - 낭만주의 선구자 (2022.5.14.)
⑥“천사요? 데려오면 그려드리죠” 이놈의 똥고집[후암동 미술관-귀스타브 쿠르베 편] - 사실주의 선구자 (2022.5.7.)
⑦벌거벗은 이 여자, 뭐 때문에 빤히 쳐다보나[후암동 미술관-에두아르 마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2022. 4. 23.)
⑧“못 그렸는데 폼만 잡아” 욕먹던 이 그림, 3300억이요? [후암동 미술관-클로드 모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⑵ (2022.4.30.)
⑨‘점투성이’ 수상한 커플 정체는? [후암동 미술관-조르주 쇠라 편] - 신인상주의 선구자 (2022. 6. 25.)
⑩반 고흐 최애작, 별밤·해바라기 아닌 ‘이 사람들’ [후암동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편] - 표현주의 선구자 (2022.6.4.)
⑪이 ‘사과’ 때문에 세상이 뒤집혔다, 도대체 왜?[후암동 미술관-폴 세잔 편] - 근대 회화 선구자(2022. 7.9.)
⑫헐크색 피부 갖게 된 ‘이 여성’…이 놈의 ‘남편’ 때문에[후암동 미술관-앙리 마티스 편] - 야수주의 선구자 (2022. 7. 16.)
⑬잘생긴 법대 교수님, ‘이것’ 그렸더니 미술계 '발칵'[후암동 미술관-바실리 칸딘스키 편] - 추상회화 선구자(2022.7. 23.)
⑭이건희 컬렉션, 이 ‘다섯 작품’ 놓치지 마시라[후암동 미술관-‘어느 수집가의 초대’ 출장 편] - 전시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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