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바조,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일부 확대), 1598 |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 『(…) 유디트는 그제야 웃음을 거뒀다. 적장(敵將) 홀로페르네스가 야전침대에 구겨진 채 누워 코를 고는 걸 본 뒤였다. 유디트는 그가 침대로 향하며 막사 바닥에 내팽개친 칼을 주웠다. 손잡이가 차가웠다. 이 서슬 퍼런 칼날에 수많은 우리 유대인이 죽었다. 유디트는 이 순간만 기다렸다. 한껏 치장한 뒤 홀로페르네스가 이끄는 아시리아 군 진영 한가운데 나선 일, 스스로 민족의 배신자가 된 양 홀로페르네스에게 달콤한 말을 쏟아낸 일, 해가 지자마자 미소를 흘리며 홀로페르네스의 막사에 들어가 그가 취해 잠들 때까지 술을 따른 일 모두 지금을 위해서였다.
유디트는 천으로 된 막사 입구를 살짝 들춰 밖을 살펴봤다. 막사 근처에서 경계근무를 서는 불침번 두 명은 꾸벅꾸벅 졸고 있다. 유디트는 저 멀리에 시선을 두고 손짓했다. 유디트의 늙은 하녀가 병사의 막사들 사이로 걸어왔다. 원래 전쟁터에서는, 그 누구도 늙은 여인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법이다. 이 덕에 유디트의 충성스러운 하녀는 누구의 의심도 사지 않고 적장의 막사로 들어올 수 있었다.
다 계획대로였다. 곧 모든 일이 끝난다. 이쯤부터 유디트는 밀물처럼 들어오는 두려움을 느꼈다. 홀로페르네스가 잠든 게 아니라면? 자는 척을 하며 내 암살 계획을 눈치채고 있다면?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애초 술을 마신 척만 했는데도 술에서 덜컥 깬 기분이 들었다. "주여, 이스라엘의 신이시여. 저에게 힘을 주시고 지금 제 손으로 행할 일을 지켜보소서." 크게 심호흡을 한 유디트는 술독에 빠져 잠든 홀로페르네스의 목에 칼을 댔다. 다행히 이 남자는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고 깊게 숨을 들이쉬고 내뱉는 중이었다. 그 큰 덩치가 위아래로 들썩였다. 유디트는 자루를 쥔 늙은 하녀를 봤다. 둘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유디트는 홀로페르네스의 머리털을 움켜쥐었다. 칼을 쥐고 있는 힘을 다해 그의 목덜미를 두 번 내리찍었다. 떨어지는 번개처럼 순식간이었다. 홀로페르네스는 태어나 한 번도 겪은 적 없는 고통에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본 건 유디트의 껄끄러운 표정, 차가운 무언가에 뜯어지는 자기 목에서 쏟아져 나오는 붉은 피였다. (…)』
1598년 이탈리아 로마. 한 남성이 읽고 있는 노트를 탁 덮었습니다. "그래, 이거잖아. 유디트가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썰고 있는 이 순간! 이거야말로 가장 극적인 장면이잖아. 화가라면 응당 이 장면을 그려야지. 목을 베기 전? 벤 후? 이 전후 상황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냐고. 고상한 척하는 샌님들 같으니!" 홀로 작업실에 있던 이 남성은 화를 삭이지 못하고 버럭 외칩니다. 옆에 놓인 술병을 들고 쭉 들이켭니다. 거친 입김 사이에서 술 냄새가 바짝 올라옵니다. 이 남성은 몸이 뻐근한 듯 두 팔을 크게 돌려댑니다. 온통 시퍼런 멍투성이입니다. "내가 말이야. 내가 진짜를 그려주지. 이 머저리들." 그는 꺽 하며 긴 트림을 내뱉습니다.
동네 건달 같은 이 남성의 이름은 미켈란젤로 메리시(1571~1610)입니다. 별명으로 더 유명한 화가인데, 그를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은 카라바조입니다. 분노에 찬 그가 이를 갈며 그린 그림은 훗날 바로크 미술의 문을 연 열쇠로 기록됩니다.
카라바조,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 1598 |
금발의 여성은 유디트입니다.
피를 뿜는 남성은 홀로페르네스, 그의 잘린 머리통이 담길 자루를 쥔 여성은 유디트의 하녀입니다. 유디트는 성경의 외경(外經) 중 유딧서에 등장합니다. 부유하고 아름다운데다 덕망까지 있는 미망인입니다. 그녀는 전쟁에서 패할 위기에 처한 자기 민족,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하려고 아시리아 군의 적장 홀로페르네스를 유혹한 후 목을 벱니다. 그녀 덕에 이스라엘은 위기에서 벗어납니다.
그림 속 유디트는 어려 보입니다.
머리를 능숙히 손질했고, 반짝이는 귀걸이도 달았지만 여전히 앳돼 보입니다. 당연히 검 같은 건 들어본 적이 없었을 겁니다. 유디트의 표정도 묘합니다. 결의와 혐오, 사명과 불안 등 여러 감정이 묻어납니다. 유디트는 죽어가는 홀로페르네스의 머리채를 최대한 멀리서 쥐고 있는데요. 힘의 역학으로 보면 이 자세로 목과 몸통을 깔끔히 떼어내는 건 어렵습니다. 이 또한 유디트의 서툰 칼질, 그녀가 품은 분노와 공포 사이 복잡한 심경을 보여줍니다.
카라바조,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일부 확대), 1598 |
카라바조,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일부 확대), 1598 |
복숭앗빛 피부의 유디트와 달리 주름으로 뒤덮인 하녀의 표정도 오묘합니다.
유디트에게 더 힘을 주라고 부추기는 듯도 하고, 평소 부드럽기 그지없는 여주인의 살인 행위에 깜짝 놀란 듯도 합니다. 웃통을 벗어 던진 홀로페르네스는 온몸을 뒤틀며 울부짖습니다. 목은 절반 넘게 잘렸습니다. 그 틈에서 새빨간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옵니다.
그림은 노골적입니다.
유딧서를 줄줄 외운 사람들에게도 폭력적으로 다가왔을 겁니다. 부모라면 아이가 이 작품을 못 보게끔 두 눈을 가렸을 테고, 피가 튀는 충격적 장면 탓에 악몽을 꾸는 이도 많았을 겁니다. 카라바조의 그림,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유디트)'입니다.
카라바조의 이 그림은 연극이나 뮤지컬의 절정 부분처럼 에너지가 가득합니다.
세 사람 다 스포트라이트가 내리쬐는 새까만 무대에서 연기하는 배우 같습니다. 손 뻗으면 이들의 피부가 만져질 것 같은 현장감도 있습니다.
이는 카라바조가 개척한 바로크 미술의 특징입니다.
카라바조, 나르키소스 |
17세기 초부터 18세기 전반에 걸쳐 이탈리아 등 유럽 가톨릭 국가에서 발전한 바로크 미술의 핵심은 역동적 구조, 강렬한 색채입니다. 15세기 르네상스 미술이 안정감과 단정함, 절제된 표현을 좇았다면 바로크 미술은 과장과 극적 효과를 추구합니다. 르네상스 미술이 깔끔한 교복 차림의 모범생이면, 바로크 미술은 깃을 바짝 세운 채 껄렁하게 앉아있는 반항아 정도로 볼 수 있겠습니다. 애초 바로크라는 말 자체가 '현란한', 불규칙한', '변덕스러운' 등 의미로도 통합니다. 포르투갈어로 바로크는 '비뚤어진 진주'라는 뜻입니다.
매일 담백한 밥과 빵만 먹는다면 언젠가는 자극적인 맛이 생각나는 법입니다.
그 세상 사람들도 그랬습니다. 영원할 줄 알았던 르네상스 미술의 파급력은 시간이 흐를수록 약해집니다. 밝고 가지런한 르네상스 미술이 어느 순간부터 재미없는 교과서처럼 느껴진 겁니다. 화가들은 다른 길을 찾습니다. 그러나 늘 그렇듯 새로운 길을 만드는 건 쉽지 않습니다. 미술사에서는 1520년께부터 17세기 초, 당시 지고 있는 르네상스 미술과 뜨고 있는 바로크 미술 사이의 그 시기를 매너리즘(Mannerism) 시기라고 칭하기도 하는데요. 흔히 '매너리즘에 빠진다'라는 말은 틀에 박힌 사고와 태도에 젖어 이를 반복하는 일을 뜻하는 표현이지요. 이 말이 여기서 유래했습니다. 물론 매너리즘 시기에도 뛰어난 화가들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큰 틀로 보면, 식어가는 르네상스 엔진 대신 연기를 내뿜어줄 새로운 엔진을 찾기 위해 헤매던 시대였습니다.
카라바조, 성 마테오의 소명 |
카라바조, 의심하는 도마 |
이런 상황에서, 여러 시도 중 카라바조의 바로크 미술이 르네상스 미술의 후임자로 '간택'된 데는 당시 시대상도 봐야 합니다.
그 시기에는 북유럽을 중심으로 종교개혁의 불씨가 들불처럼 번지고 있었습니다. "무소불위 권력을 휘두르는 교황청에 반기를 들겠다!"가 구호였습니다. 물주 대부분을 교황청 등 종교계로 둔 예술가들은 그런 종교개혁의 어수선함을 피해 가톨릭의 본산인 로마로 몰려옵니다. 로마 밖 분위기를 알고 있던 종교계는 이들에게 대중의 뇌리에 박힐 형태의 '매운맛' 종교화를 주문합니다. 그 당시 그림은 가진 자가 대중에게 구사할 수 있는 효과적인 계몽 내지 홍보 수단이었습니다. 로마의 민초들마저 불어오는 개혁의 바람에 올라탈까 봐 불안했던 겁니다.
"르네상스 그림은 너무 순해. 매너리즘 그림은 난해하고. 어디 좀 센 거 없어?"라는 말이 나올 때, 그러고는 수많은 도전작에 대해 "이런 건 말고!"라며 모순된 일이 벌어지고 있을 때, 카라바조가 쓱 나타나 "이거나 보쇼!"라며 입맛에 딱 맞는 그림을 내민 겁니다.
카라바조의 유디트에서 바로크적 요소를 찾아보겠습니다.
카라바조,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일부 확대), 1598 |
카라바조,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일부 확대), 1598 |
카라바조는 빛과 어둠을 활용한 뚜렷한 명암 대비로 그림 속 분위기를 더욱 강렬히 표현했습니다. 화면이 어둡지요. 그냥 어두운 게 아니라 암흑입니다. 그는 이 암흑 한가운데 빛을 만들었습니다. 감상자가 그림에서 인물의 표정과 행동, 발생한 사건에만 몰입할 수 있게끔 돕는 겁니다. 세 사람 모두 세트장에 오른 연극배우처럼 보이는 것 또한 이 덕분입니다. 카라바조의 전매특허 기술입니다. 빛과 어둠의 조화로 극적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이 기법은 훗날 테너브리즘(tenebrism)으로 칭해집니다. 그런가 하면, 뒷배경에 보이는 새빨간 천과 뿜어지는 붉은 혈액,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유디트의 새하얀 옷 등 그림 속 색채는 진하고 선명합니다. 그림 속 세상의 1초 후가 궁금해질 만큼 역동적이고요.
유디트를 그리는 데 모델로 나선 이의 정체도 충격적입니다.
필리데 멜란드로니라는 이름의 여성입니다. 당시 로마에서 가장 유명한 직업여성 중 한 명이었습니다. 경찰에 여러 차례 체포된 적 있고, 심지어 죽었을 때는 교회에서 기독교식 장례를 해주는 일조차 거부했습니다. 그만큼 별로 좋지 않은 쪽으로 화제 인물이었습니다. '르네상스형 모범생'들은 상상도 못 할 캐스팅이었습니다. 당연히 "그런 사람을 영웅 유디트로 그렸다고? 세상에, 어디 한 번 봐봅시다!"라는 말이 돌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그림은 더 명성을 얻었고, 더 많은 대중에게 노출됐습니다.
조르조네,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 1504 |
티치아노,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든 유디트, 1515년경 |
사실 이 그림은 장면 선정부터 바로크의 색채를 물씬 풍깁니다.
유디트 이야기는 특유의 에로틱하고 폭력적인 전개 때문에 그 시대 화가들의 단골 소재였는데요. 기승전결 스토리 속 카라바조처럼 참수 장면 그 자체를 그린 그림은 거의 없었습니다. 대부분은 홀로페르네스의 목이 잘리기 전후를 화폭에 담았습니다. 그간의 화가들은 이런 적나라한 장면을 일부러 피한 겁니다. 그림의 구도 자체가 안정적일 수 없고, 세 사람을 단정한 분위기로 뽑아낼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카라바조는 "무슨 상관이야? 뇌리에 박힐 만한 장면이 필요하다며?"라며 휙휙 그린 겁니다.
바로크의 심장을 가진 카라바조가 너무나 거침없이 붓질을 한 탓에 때로는 그림 주문자도 혀를 내둘렀습니다.
카라바조, 성 마테오와 천사 |
우여곡절을 겪은 대표적 그림이 '성 마테오와 천사'입니다. 1599년 카라바조가 한 예배당에서 내부 벽에 걸 그림으로 주문받아 그린 작품입니다. 이 그림은 공개되자마자 신성 모독이라는 비판을 받습니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그래도 이건 선을 넘었다"는 지적을 받은 겁니다.
이유를 보면요. 카라바조는 마태를 지저분한 하층민의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정돈 안 된 머리와 덥수룩한 수염을 단 마태는 주름살을 잔뜩 구긴 채 천사의 손을 따라 복음서를 씁니다. 허벅지가 훤히 드러나는 옷을 입고 다리를 꼬는 등 자세도 영 성스럽지 않습니다. 마태에 몸을 바짝 붙인 천사는 요염한 눈빛으로 입을 살짝 벌리고 있습니다. 카라바조는 "억지로 꾸미고 미화하는 건 또 다른 아류작을 만들 뿐이야. 이 정도는 돼야 머릿속에 제대로 남지 않겠어?"라는 생각을 했을 테지요.
그러나 최소한의 고귀함과 성스러움이 묻어나길 바란 종교계의 입장에선 날벼락 같은 작품이었습니다.
카라바조, 성 마테오의 소명 |
결국 카라바조는 이들이 요구하는 점잖은 모습으로 그림을 다시 그립니다. 훨씬 더 깔끔해진 마태가 스스로 복음서를 씁니다. 더 단정해진 천사는 마태와 다소 거리를 둔 채 둥둥 떠 있습니다. 그림을 엎은 카라바조가 얼마나 구시렁댔을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종교계는 이 두 번째 그림을 보고서야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카라바조 초상화 |
카라바조는 천재였습니다.
다만 그 빛나는 재능이 없었다면 객사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하는 짓이 개차반이었습니다. 15세기 미켈란젤로부터 19세기 고갱까지 '성질 진짜 고약하네'라는 천재들이 많지만, 카라바조에 빗대면 이들은 순한 양 같습니다. 적어도 카라바조처럼 살인 혐의를 받지는 않았으니까요.
미켈란젤로 메리시라는 본명을 가진 카라바조는 1571년 이탈리아 밀라노 근교의 작은 마을 카라바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시절에도 르네상스 3대 거장 중 한 명인 미켈란젤로는 유명인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본명보다 출신지에서 따 온 카라바조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겁니다. 카라바조는 13살에 티치아노의 제자 시모네 페테르 차노 밑에서 그림을 배웁니다. 티치아노가 르네상스 미술의 대표 주자였던 만큼, 카라바조 또한 그 시대 화풍을 익혔겠지요. 카라바조는 재미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결국 못 견디고 뛰쳐나옵니다. 후에 "페테르차노에게선 하나도 배운 게 없다"는 독설까지 날렸습니다.
화실에서 나와 떠돌던 카라바조는 21세 무렵 무턱대고 로마로 갑니다.
카라바조, 병든 바쿠스 |
청운의 꿈을 품고 갔겠지만 삶은 잘 풀리지 않았습니다. 일단 가진 게 없어 시작부터 밑바닥 삶을 삽니다. 그가 살던 당시 빈민가에는 도둑, 깡패, 도박꾼, 사기꾼이 득실댔습니다. 그 틈에서 폭음과 주먹질을 되풀이한 카라바조는 의식주조차 해결하기 힘든 처지에 놓였습니다. 좋게 말하면 반항아, 노골적으로 말하면 건달의 삶을 산 겁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당시 유행하던 흑사병에 걸립니다. 그때 경험을 살려 그린 게 '병든 바쿠스'입니다.
병을 이겨낸 카라바조는 때마침 자신의 그림을 좋게 봐준 프란체스코 델 몬테 추기경의 후원을 받게 됩니다.
그는 이탈리아 귀족 가문과 친분이 두터운 유력가였습니다. 그 덕분에 카라바조의 삶은 여유를 찾아갑니다. 재능만큼은 악마에 가까웠던 만큼, 델 몬테라는 날개를 단 후 그의 인기는 급속도로 높아집니다.
문제는 성질이었습니다.
카라바조의 초기 범죄는 아직도 1598년 5월 사법재판소 의사록에 남아있습니다. 허가받지 않은 검을 들고 다녀 체포됐다는 내용입니다. 1600년에는 지롤라모 스팜파니라는 이가 카라바조를 고소했습니다. 그가 휘두르는 몽둥이에 맞았다는 이유였습니다. 1601년에는 불법 무기 소지죄, 1604년에는 경관 모욕죄 등으로 또 처벌받았습니다. 이 밖에 식당에서 접시를 던진 일, 창문에 돌은 던진 일,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칼에 찔린 채 발견된 일 등 괴담에 가까운 논란에 거듭 휘말렸습니다.
1606년, 아슬아슬한 망나니 짓을 일삼던 카라바조가 결국 사고를 칩니다.
그는 그해에 한 남성을 칼로 찔러 죽인 혐의를 받았습니다. 치정으로 인해 칼을 휘둘렀다는 이야기, 친(親)스페인파와 친프랑스파 사이 정치적 분쟁에 휘말려 살인을 저질렀다는 이야기 등이 있습니다. 상대의 성기를 자르는 데 그치려다가 이 일이 잘못돼 의도치 않게 죽였다는 말도 있습니다.
카라바조,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
신변에 위협을 느낀 카라바조는 도망칩니다.
그에게는 현상금까지 걸립니다. 어떤 기행에도 보호막이 돼줬던 델 몬테 추기경도 살인 혐의만은 막지 못했습니다. 객지로 나앉게 된 카라바조의 참담한 심정은 그림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을 통해 느낄 수 있습니다. 골리앗 머리의 모델이 바로 자신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카라바조는 대체 불가능한 천재였습니다. 도망자 신세였을 때도 그림 주문은 계속 들어왔습니다. 그의 팬들은 자진해서 그를 숨겨줬습니다. 도주하면서도 온갖 사고를 치고 다닌 그는 결국 사면까지 받습니다.
하지만 인과응보(因果應報)였을까요.
다시 로마로 향한 카라바조는 억울하게 죽습니다. 로마 근처의 한 지방 경비대장이 그가 사면된 줄 모르고 체포한 겁니다. 카라바조는 곧 풀려날 수 있었지만, 억울함과 누적된 피로 등으로 허무하게 죽고 맙니다. 결정적 원인에는 이질과 말라리아, 납 중독에 암살까지 거론됩니다. 당시 나이는 38세였습니다.
카라바조는 온갖 흑역사로 인해 20세기까지만 해도 거의 잊힌 인물이었습니다. 이제는 유로화 도입 직전 이탈리아 10만리라에 삽화 되기도 했을 만큼 거장으로 인정받지만, 사실 생전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유명했다고 합니다.
몇 년 전 카라바조의 유디트 그림과 똑 닮은 쌍둥이 그림이 등장한 일은 아시나요?
카라바조(추정),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 |
2014년 4월, 프랑스 남부 툴루즈에 있는 한 개인주택에서 발견됐는데요. 당시 집 주인이 지붕을 수리하기 위해 평소 들여다보지 않던 다락방 문을 열었는데, 지붕 서까래에서 주운 겁니다. 이 그림이 언제, 어떤 일 때문에 여기까지 흘러왔는지는 모릅니다.
집주인은 지역 경매사에게 감정을 문의했습니다.
심상찮음을 느낀 경매사는 유명 예술 감정사인 에리크 튀르캥을 호출했습니다. 그는 이 그림을 카라바조의 작품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2년간 전문가들과 함께 먼지와 얼룩 제거 작업을 벌였습니다. 실제로 생전에 카라바조는 유디트가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장면으로 그림을 두 점 그렸던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이 가운데 1600~1610년 사이 그렸다는 그림이 실종된 상태였습니다.
2019년, 이 그림은 경매에 오르기 이틀 전 한 수집가에게 팔렸습니다.
몸값으로 최대 1900억원 이상이 예상되던 때였습니다. 정확히 얼마에 팔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소유주가 경매도 없이 '쿨거래'를 한 일을 보면 1900억원 이상 값에 팔렸을 가능성이 큽니다.
〈참고 문헌〉
유딧서
501 위대한 화가, 스티븐 파딩, 마로니에북스
yul@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