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희, The Terrace, 2019, Color on canvas, 324x520cm (8 개 캔버스, 각 162x130cm)[금호미술관] |
키 큰 야자수가 멋진 여름밤의 풍경 위로 손톱만한 달이 걸렸다. 노을 지는 해변과 탁 트여 보기만해도 가슴이 시원해지는 바닷가, 어느날 산책길에 만난 아기자기한 풍경들까지…. 살아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제주의 아름다운 풍경들이 전시장에 펼쳐진다.
금호미술관은 동양화 매체를 기반으로 구상 풍경 회화의 지평을 넓혀 온 김보희 작가의 개인전 ‘토워즈(Towards)’를 개최한다. 지난 2018년 트럼프 미국대통령이 방한할 당시 멜라니와 트럼프와 김정숙 여사의 환담장에 걸려있던 그림으로 유명세를 탄 이후 첫 개인전이다.
이번 전시엔 2017년 은퇴 이후 제주로 터를 옮기고 본격적으로 작업에 돌입한 작가가 그간 사랑에 빠졌던 제주의 풍경을 신작으로 쏟아냈다. 흔한 소재지만 진부하게 다가오지 않는건, 대상에 대한 작가의 깊은 애정이 느껴져서다. 매일 산책을 하며 조금씩 변화하는 자연을 관찰하고, 바다를 거닐며 명상을 했을 작가의 일상이 작품에 깊이감을 더한다.
김보희 작가의 작업은 동양화 혹은 서양화, 구상과 추상이라는 이분법적 범주 속에 위치시키기 쉽지 않다. 동양화로 작업을 시작했지만 필요에 따라서는 서양화의 자료를 적절히 사용했다. 수묵과 채색을 자유로이 넘나들며 원경에서 근경으로 다채롭게 화면을 구성한다.
형태가 분명한 구상이지만 흐릿한 배경과 의도적 생략으로 추상적 특성도 가지고 있다. 앞마당 풍경을 담은 ‘더 테라스(The Terrace·2019)’도 원경의 자연은 하나의 시점으로 바라보는 것과 같은 평원법으로, 가까운 테라스는 마치 그자리에 서서 바라보듯 바닥의 경계면이 어긋나며 시점의 차이를 드러낸다. 미술관측은 “동양 산수화의 전통적인 시점 처리 방식에 기인한 것으로, 테라스에서 계속 거닐면서 풍경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캔버스 여러개를 이은 대형작업으로 마치 자연 속에 들어가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건 김보희 작가의 또다른 매력이다. 전시장 3층에는 지난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개관 1주년 기념전에서 선보였던 ‘더 데이즈(The days·2011-2014)’가 걸렸다. 30개의 캔버스가 두개의 벽면을 가득 채웠다. 이른 아침의 풍경부터 밤의 풍경까지 공존하는 상상의 정원은 ‘공존’을 메시지로 던진다.
이외에도 과감한 색면과 세필의 중첩으로 현대 채색화의 가능성을 제시한 바다 풍경, 원형의 자연으로서 동식물이 공존하는 하나의 세계를 구현한 ‘토워즈(Towards)’ 시리즈도 관객을 맞이한다.
미술관은 “자연이 지닌 시간의 순환성과 불변의 진리로서 인간에게 주어진 생의 주기를 식물의 씨앗과 숫자로 비유한 작품 등 각각의 화면에 담아냈다”며 “나무는 나무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씨앗부터 줄기, 그리고 지금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나무가 온전히 감내해 온 시간을 함축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렇기에 자연은 대상이 아니라, 우주의 진리를 품은 하나의 매개체다. 전시는 7월 12일까지. 이한빛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