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적 개연성보다 시적 우연…심상으로 읽는 작업
정서영, 〈0번〉, 2020, 알루미늄 주물, 스테인레스 철사, 목재, 291 x 82 x 49 cm [사진제공=바라캇 서울] |
[헤럴드경제=이한빛 기자] 찬바람이 싸하게 부는 날, 따뜻한 실내로 들어오자 외투를 벗어 의자 위에 툭 던졌다. 아무 생각없이 던졌는데 걸린 모양새가 무척이나 그럴듯하다. 우연이 예술이 되는 순간, 평범한 사물이 조각이 되는 순간. 그 순간을 정서영 작가는 놓치지 않고 수집한다. 찰나를 붙잡아 영원으로 기록한다. 관객들은 그 찰나가 주는 심상을 온전히 만끽하면 된다.
2003년 제50회 베네치아비엔날레 한국관 대표작가이자 90년대 한국현대미술계 스타작가 정서영의 개인전 '공기를 두드려서(Knocking Air)'가 서울 삼청동 바라캇 컨템포러리에서 열린다. 작가는 스티로폼, 플라스틱, 스펀지, 합판 등 우리 일상에서 쉽게 접하는 산업화의 잉여물을 활용해 조각 작업을 이어왔다. 이번 전시엔 세라믹, 알루미늄, 유리, 천 등 그 재료가 확장됐다. 총 27 점의 신작과 구작으로 꾸린 이번 개인전은 4년만에 선보이는 국내 전이기도 하다.
정서영, 〈피, 살, 뼈〉, 2019, 나무, 68 x 52 x 236cm [사진제공=바라캇 서울] |
정서영, 〈우주, 코〉, 2020, 도자, 도색된 합판 좌대, 29.9 x 21cm, 64 x 68 x 106 cm [사진제공=바라캇 서울] |
그의 작업을 처음 접하면 사실 '당황스럽다'. 쓰임새를 알 수 없고, 전시물 간의 관계를 읽어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묘사가 뛰어난 산문을 읽다가 축약과 함축으로 점철된 시를 마주하면 길을 잃은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심상으로 이어지는 시는 헤어나올 수 없는 매력이 있다. 정서영의 작업은 시에 가깝다.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도색된 합판 좌대 위 올려진 얇은 도자기들을 만나게 된다. A4크기의 하얀 도자 위에는 짧은 문구들이 적혔다. "우주로 날아갈 때는 코를 빼놓고 간다", "네 벽으로 둘러쳐진 이 정원에는 가시가 돋친 보라색 꽃을 피우는 키 큰 키 큰 식물들이", "A hole Free Free and happy A big hole A bigger hole". 읽어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문장들이다. 뜻을 전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들이 떠오른다. 작가가 몇 해 전 DMZ 프로젝트에 참여할 당시, DMZ에 같이 갔던 음악가들에게 그들이 본 이미지를 말로 표현해달라고 해서 발췌한 문장들이다.
전시장 한켠에 자리한 나무 안내판에는 'BLOOD', 'FLESH', 'BONE' 등 세개 단어가 새겨졌다. '피, 살, 뼈'(2019)라는 이 작품은 정해진 형태는 없지만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물질인 피, 살, 뼈를 적어 보이지 않는 네트워크를 끄집어 낸다. 그런가하면 '0번'과 '1번'은 나무가지가 탁 하고 부러지는 순간을 잡아냈다.
작가는 "서로 별다른 관계가 없는 것들을 한 장면으로 끌어들여서 파생되는 것에 대해 흥미로움이 있었다"며 "우발적으로 만난 것들이 균형을 이루고 새로운 세계를 이루는 것에 관심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어떤 논리나 개연성이 있고 스토리를 이야기해야 하는 작업이 아니다"라며 "일상적인 사물들이 스스로 형태를 완성한다"고 설명했다.
정서영작가를 오래전부터 지켜봤다면 더욱 풍부하게 읽힐 수 있는 전시다. 2016년 '뼈와 호두'전에서 실제로 등장하지 않았던 호두가 이번 전시엔 등장하고, 2014년 작 '증거'에서 보이지 않던 열쇠, '미스터김과 미스터리의 모험' 속 등장인물이 반복적으로 돌리던 모나미 볼펜도 마침내 전시장에 나왔다. 한 편의 시 같은, 수수께끼 같은 이 전시는 7월 5일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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