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오페라·성악 무대 너무 빈약
지속가능한 공연으로 일자리 창출
‘굿모닝 독도’ 뮤지컬버전 준비 한창
지원금 의존도 높아 작품의 질 떨어져
콘텐츠 개발로 우발적 리스크 대비를
유인택 예술의전당 사장 이상섭 기자 |
2020년 ‘공연계의 봄’은 혹독했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팬데믹이 전 세계 공연계를 집어삼켰다. 대한민국 공연예술계의 심장인 예술의전당이 석 달간 공연을 멈춘 것은 개관 이래 처음이다. 국가대표 공연장임에도 국고보조금은 총 예산의 29.4%인 133억원. 올 한 해 예술의전당이 자체적으로 벌어야 하는 수익은 320억원이나 된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예상되는 손실은 60억~70억원이다. 현재와 같은 상황이라면 “7월엔 임직원 월급을 주지 못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는 위기감도 나온다.
최근 오페라하우스에서 만난 유인택 예술의전당 사장은 “코로나19가 대한민국 공연예술계에 체질 개선의 계기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경영을 하려면 적어도 2년은 버틸 수 있는 힘을 비축해 사업을 해야 해요. 그동안 예술기업과 단체들은 리스크 관리가 없었어요. 일년이든 이년이든, 이런 상황에서 버틸 수 있어야 재기할 수 있어요.”
‘형 만한 아우’는 없었다. 전국 250여개 공공극장의 맏형 격인 예술의전당은 코로나19라는 전례 없는 위기 속에서도 빛을 발했다. 최소 2년을 넘어 ‘새로운 시대’를 대비할 무기가 있었다. 일찌감치 노하우를 축적한 공연 영상화 사업은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다. 탄탄한 레퍼토리를 진작부터 구축했고, 이를 바탕으로 예술가들에게 무대를 만들어줬다. 예술의전당을 ‘예술 인생 40년’의 종착역이라고 말하는 유인택 사장이 취임 일년간 보여준 행보다.
▶‘지속가능한 콘텐츠’로 예술가들에게 일자리 제공=코로나19를 겪으며 공연예술계에선 수입이 0원인 예술가들이 넘쳐나고 있다. “우리나라엔 클래식과 오페라, 성악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많은데, 설 무대가 너무나 협소해요.” 유 사장의 취임 첫 과제는 이러한 예술인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었다.
“예술가에겐 무대가 일자리예요. 그들에게 설 무대를 많이 만들어주자, 클래식과 오페라는 대부분 일회성으로 끝나는데, 지속가능한 공연이 됐을 때 예술인에게 일자리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죠.”
지난 2월 선보인 클래식 콘서트 ‘굿모닝 독도’와 올 한 해 선보일 창작 오페라 ‘춘향아’, 창작 뮤지컬 ‘김염’이 예술의전당에서 지속가능한 공연으로 개발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굿모닝 독도’는 매년 다케시마의 날과 독도의 날에 무대에 오르는 것은 물론 뮤지컬 버전으로도 제작해 콘텐츠를 확장할 계획이다.
문제는 재원의 확보였다. 유 사장은 취임 이후 공공예산 이외의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문화콘텐츠 펀드에 출자했다. 공공기관으로는 최초의 시도다. 225억 규모의 공연 투자 펀드에 주주로 참여, 공공예술 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했다. “공연 투자 펀드를 통해 예술의전당뿐만 아니라 전국의 모든 공공극장들이 주어진 공공예산 외에 재원을 활용해 대한민국 예술인들에게 공공극장으로서 간접 지원을 하고 있어요.” 올초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공연한 연극 ‘여자만세2’가 대표적이다. 이 작품은 문화콘텐츠 펀드에서 1억1000만원을 투자받아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 유 사장은 “10% 넘는 수익금을 내 예술의전당과 공연 투자 펀드도 투자자로 수익금을 배당받고, 극단도 수익을 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지금 공연 예술계는 공공 지원금에 대한 의존성이 너무 높아요. 그런데 지원금은 늘 부족해요. 제작비와 인건비는 상승했는데 지원규모는 수년째 그대로죠. 지원금 내에서 콘텐츠를 만들다 보니 작품의 질이 떨어지고, 그러니 관객이 떨어져 나가요. 제가 예술의전당 사장으로 있는 동안은 예술의전당이라는 좋은 브랜드를 활용해 어느 장르든 믿고 볼 수 있는 지속가능한 콘텐츠를 만들려고 해요. 이를 통해 선순환 예술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 대한민국 대표 공공극장으로서 갈 길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미래 세대들은 조금 더 다른 방식의 예술을 해야 자기가 하고 싶은 예술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본보기… “우발적 리스크를 늘 예비”=지금 예술의전당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2013년 시작한 공연 영상화 사업 ‘싹 온 스크린(SAC On Screen)’은 올해 유난히 빛났다. 새로운 관객들을 공연장으로 불러오는 가능성을 보여준 계기였다. ‘싹 온 스크린’은 취임 이후 유 사장이 특히나 집중했던 분야이기도 하다. 한국영화 ‘프로듀서 1세대’인 그가 바라보는 공연의 미래는 ‘영상화’에 있었다. 유 사장은 “공연 영상화는 공연업계의 돌파구이자 나아갈 길”이라고 강조했다.
“기존의 영상화 사업은 무대에서 펼쳐지는 공연 실황을 다큐멘터리처럼 담는 거였어요. ‘싹 온 스크린’은 한 발 더 나아가 소비자 관점에서 첨삭을 해요. 무대 공연을 영상으로 설명하는 데엔 한계가 있으니, 과감하게 수정하고 보충하는 거예요. 소비자 입장에서 영상을 재밌고 편하게 즐길 수 있도록 해서, 새로운 장르의 영화로 극장에서 개봉하고 VOD 서비스로 수익을 창출하는 거죠.” 공연장이 극장 수입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영상화를 통해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야 코로나19와 같은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유 사장의 판단이다. 예술의전당에선 공연 영상화 사업을 통해 ‘스테이지 무비’라는 새로운 장르를 시도했다. 뮤지컬 ‘웃는 남자’를 메가박스에서 개봉해 1억 6500만원의 수익을 올렸고, 연극 ‘늙은 부부 이야기’를 영화 버전으로 만들어 전주국제영화제에 출품, 새로운 가능성을 열고 있다.
예술의전당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문화예술 공간으로 자리한지 어느덧 30년이다. 유 사장은 “세계화 시대와 대한민국의 위상에 걸맞게 예술의전당도 자기의 정체성과 방향성을 정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가대표 공연장으로의 품격을 잃지 않되, 온 국민이 찾는 ‘모두의 공간’으로 만드는 것 역시 예술의전당의 과제다. 올해 새로운 시도가 있었다. 공연장의 문턱을 낮추면서도 클래식 저변 확대를 위해 ‘스페셜데이 콘서트’ 시리즈를 기획, 호응을 얻었다.
“예술의전당은 ‘강남 부자들의 전당’,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과 같은 이미지가 있어요. 그것은 정체성의 문제인 만큼 달라질 필요가 있어요. 다만 예술의전당의 품격은 국가 예술의 품격과 같아요. 그렇기에 문턱을 낮춰 하향평준화해서도 안 되겠죠. 예술의전당으로의 격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면서 글로벌 스탠다드로 가야한다고 판단하고 있어요. 예술의전당은 다양한 재원을 통해 예술가들에게 하나의 플랫폼으로서 자리하고, 예술 발전에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승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