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레스 엠파이어, 셀라돈3, 2020, 제스모나이트 위에 페인팅과 인쇄, 203 x 116 x 4 cm. [바라캇 컨템포러리 제공] |
코로나19로 화랑가가 꽁꽁 얼어붙었지만, 일부 갤러리는 ‘사전 예약제’를 조건으로 조심스럽게 전시를 재개하고 있다.
서울 종로구 삼청로 바라캇 컨템포러리는 독일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작가 듀오 ‘펠레스 엠파이어(Peles Empire)’의 첫 한국전이 지난 3월 12일부터 열리고 있다. ‘여기에도, 나는 있다(Even here, I exist)’를 주제로 하는 전시는 그리스 신화에서 목가적 이상향으로 묘사되는 ‘아르카디아’에서 착안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6미터에 달하는 벽면이 시선을 압도한다. 전시장 바닥을 스캔한 뒤, 이것을 프린트 해 벽면을 덮었다. 바닥과 벽면이 시각적으로 분리되지 않고 이어지며, 비현실적이고 기이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바닥에는 만들다 버려진듯한 도자기들이, 벽에는 양을 치는 목동의 이미지와 성모마리아 처럼 서 있는 클레오파트라의 이미지가 걸렸다. 다른 벽면엔 이 목동과 클레오파트라가 작게 축소된 이미지가 차용돼, 또 다른 이미지와 함께 걸렸다.
2017년 독일 뮌스터 조각축제에서 크게 주목 받은 젊은 작가그룹인 펠레스 엠파이어는 카타리나 스퇴버(Katharina Stöver)와 바바라 볼프(Barbara Wolff)로 구성됐다. 이들은 지난 2005년 루마니아의 펠레스 성을 방문했다가 그리스, 로마, 고딕, 로코코, 아르누보 등 온갖 양식이 혼합된 건축물에 흥미를 느꼈다. 성의 내부를 사진으로 촬영했고 이것을 재현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사진을 찍고 프린트하고, 다시 스캔하고 다른 이미지와 조합하고 다시 찍고 프린트 하는 등 복잡한 과정을 통해 이야기를 확장해 나간다. 갤러리측에서는 “여러번 이뤄지는 복제를 통해 원본이 추상화되고, 새로운 원본이 생산되는 과정을 작가들은 중요하게 생각한다”며 “원본과 복제의 구분을 비롯해 역사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 이차원과 삼차원, 과정과 결과, 우연한 것과 하찮은 것 등 우리가 일반적으로 갖는 이분법적 구분과 위계를 흐리는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바닥에 놓인 도자기는 고려청자와 빗살무니 토기, 토우 등 한국 도자를 연구하다 나온 결과물들이다. 조금이라도 흠이 있는 도자기들은 가차없이 깨 버렸던 도공들의 행동은 모든것이 완전 무결한 ‘아르카디아’와도 연결된다. 빗살무니를 재현하기 위해 사용한 형광색 노끈은 클레오파트라를 죽음으로 이끌었다는 뱀과 비슷한 형상이다. 이렇듯 전시장 안의 이미지들은 서로 연관되며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나간다.
전시 제목인 ‘여기에도, 나는 있다’는 프랑스 고전주의 화가 나콜라 푸생(1594~1665)의 ‘아르카디아의 목자들’속 해골에 적힌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Et in Arcadia ego)’에서 출발한다. 이상향에도 ‘죽음’은 찾아온다는 것을 말하는 이 그림은 완벽한 것은 없다는 것을 상징한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는 두 마리 뱀처럼 이야기가 계속 전개되는 펠레스 엠파이어의 작품은 무한한 순환공간으로 다가온다. 역사와 현재는 얽히고 이야기와 오브제는 동등해지며, 실제 공간은 디지털 이미지로 압착되고, 실제 공간에 설치되면서 접힘과 펼침을 반복한다. 전시는 4월 26일까지. 이한빛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