숏팬츠·아찔한 하이힐 ‘조선의 헤드윅’
국악에 재즈·테크노·트로트까지 버무려
경기민요 소리꾼들은 ‘흡사 홍대 인디밴드’
파격행보는 취미생활…중심엔 전통 오롯이
B급 소리꾼이라는 말 가장 좋아
‘국악계의 이단아’ 이희문이 활동했던 민요 록밴드 씽씽. [이희문컴퍼니 제공] |
숏팬츠에 아찔한 하이힐, 덕분에 붙은 별칭은 ‘조선의 헤드윅’. 무대 위의 이희문은 ‘젠더’의 경계를 뛰어넘는다. 여기에만 갇혔다면 ‘힙’하지 않다. 형형색색 가발을 뒤집어쓰고, 마이크까지 치켜드니 ‘장르’의 경계도 무너진다. 창법을 제외하곤 국악 같지 않은데, 정체는 국악인. 이희문(45)은 ‘국악계의 이단아’다.
“비주얼은 제 음악을 표현하는 방식이에요. 보여지는 부분에서 음악과의 매칭이 성립이 안 되거나, 나 자신의 내재가 생기지 않으면 할 수가 없더라고요. 재미가 없어요.”
‘경기민요’를 하는 보기 드는 남자 소리꾼, 전통음악의 격식과 형식을 파괴하는 ‘파격의 아이콘’. 덕분에 이희문의 이름 뒤엔 수많은 수사가 따라다닌다. 이희문을 먼저 알아본 것은 국내가 아닌 해외였다. 미국 공영방송 라디오 NPR에 출연, 한바탕 ‘난봉’을 부렸다. 그가 몸 담았던 민요 록밴드 씽씽과 함께다. 이들은 국내외의 모든 무대를 ‘씹어 먹었다’. 그 때부터 이희문은 ‘조선의 아이돌’로 불렸다. 씽씽 해체 이후 결성한 ‘오방神(신)과’도 그 연장선이다. 폐쇄적인 국악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긴 젊은 소리꾼 이희문을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만났다.
[이희문컴퍼니 제공] |
▶살아 숨쉬는 생명력…이희문의 시작=전통이라는 말에선 오래되고 낡은 것, 박제된 것이라는 의미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그 뒤엔 고수, 보존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린다. 이희문은 ‘고수’ 대신 ‘전복’을 택했다. ‘천연기념물’처럼 보호받아야 한다고 믿었던 전통의 소리는 ‘조선의 아이돌’을 통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재생산되고 있다.
그의 음악은 살아 숨 쉰다. 팔딱거리는 생명력이 있다. 국악과 재즈, 힙합, 록은 물론 테크노, 디스코, 트로트까지 어우러졌다. 음악의 문법이 깨졌다. 듣고 보니, 환상의 궁합이 따로 없다. 국악 인생 18년차. ‘화끈한 등장’이라 국악계에 잔뼈가 굵은 줄 알았건만, 이희문은 ‘국악 늦둥이’다. 스물일곱이 돼서야 소리를 시작했다. 대신 모태 국악인. 그의 어머니는 경기민요 명창 고주랑이다.
“날 때부터 어머니의 팬이었어요.” 한창 때는 변심했다. “민해경과 마돈나를 좋아했고, 마이클잭슨에 반했어요. 가창력이 있으면서도 퍼포먼스를 겸비한 가수가 좋았어요.”
국악계에 발을 들이기까지 여정이 길었다. 마이클잭슨 같은 뮤지션을 꿈꾸며 일찌감치 연습생 생활도 해봤다. 그러다 군대에 다녀온 뒤 일본 유학을 떠났다. 영상 공부를 위해서다. 한국으로 돌아와 뮤직비디오 조감독 생활을 했다. 어머니의 음악을 영상으로 만들기 위해 국립국악원을 드나들 때, 운명처럼 ‘소리의 세계’에 입문했다. 어머니의 친구이자 이희문의 소리 스승인 이춘희 명창의 권유였다.
“경기민요에 남자 소리꾼이 워낙에 없으니, 제가 흥얼거리는게 신기하셨나봐요. 민요하고 싶은 생각이 없냐는 이야기를 듣고 이틀 뒤에 찾아갔어요. 취미 정도로 생각했는데 인생이 바꼈죠.”
늦깎이 학생이었던 탓에 쉼 없이 달렸다. 다시 대학에 입학해 국악을 공부했다. “타고난 목성을 가진게 아니었어요. 혼자 해결하기 위해 선생님 몰래 보이스 트레이닝도 받았어요.” 그 때만 해도 흔히들 생각하는 ‘전통’의 울타리 안에 있었다. 당시 이미 정점을 찍었다. 무수히 많은 수상 경력이 나왔고, 끝내는 대통령 상까지 받았다.
[이희문컴퍼니 제공] |
경기민요를 이수한 뒤 그는 이희문만이 할 수 있는 공연을 시작했다. 현대무용가 안은미는 지금의 이희문을 세상에 내놓은 존재다. “선생님과 저의 관계는 ‘미생’의 오 차장과 장그래 같은 관계예요. 저의 은인이자 멘토이고, 평생 갚아도 모자라요.” 이희문은 ‘프린세스 바리’(2007)를 통해 안은미 안무가와 처음으로 호흡을 맞췄다.
“전통음악을 하면서 한 번도 칭찬이라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선생님은 늘 칭찬을 해주셨어요. ‘희문아, 넌 이런 걸 너무 잘해. 너무나 예쁘고 반짝거려’ 처음엔 믿지 않았어요. 칭찬을 들어본 적이 없으니 방어하고 의심하게 되더라고요. 온전히 신뢰하기까지 7년이 걸렸어요. 그 시간 동안 선생님은 절 포기하지 않으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살 수 있었어요.”
안은미 안무가와의 만남 이후 이희문은 독보적인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했다. 무대 위 이희문의 에너지는 폭발했다. 이희문이 여장을 하고 등장하면 ‘예쁘다’는 함성이 끊이지 않는다. 그는 다시 묻는다. “남자들은 왜 말 안 해? 나 안 예뻐?” 경계를 넘나드는 음악과 비주얼, 뻔뻔하고 아찔한 몸짓, 관객들을 가지고 노는 애드리브. 객석은 기꺼이 이희문의 손에서 놀아나게 된다.
“전통을 하는 사람이 젠더를 넘나드니 이질감을 가지더라고요. 그런데 이런 것들은 자라온 환경 속에서 자연스럽게 익힌 거예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어요. 남성보다는 여성에 둘러싸여 살아왔고, 그래서인지 전 남성적인 수컷의 향기를 풍기는 사람을 동경해요. 워낙에 엄마를 좋아했고 늘 곁에 있고 싶었어요. 어머니가 공연을 가면 한복을 몰래 입어보고, 화장도 하면서 놀았어요.”
남들은 전통의 ‘창조적 파괴자’라지만, 이희문에겐 나름대로 공들인 ‘취미생활’이었다. 그는 “항상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전통”이라고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취미생활을 더 열심히 하기도 하잖아요. 사실 파격적이라는 행보들은 제겐 취미생활이었어요. 늘 중심엔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전통이 있고, 그것이 기저에 깔려있기에 곁가지로 다른 걸 해보는 거예요. 다만 이런 작업을 하면서 관객들이 찾아오고, 전통 음악의 저변 확대가 되더라고요.”
이제 해볼 건 다 해봤다고 한다. 화장이든 여장이든 파격을 넘나드는 비주얼에 더이상 집착하지도 않는다. “화장도 진하게 하다 보면 생얼이 더 편해지잖아요.”
이희문이 1년에 한 번씩 선보이는 공연 ‘깊은 舍廊 사랑’ 3부작[이희문 컴퍼니 제공] |
▶경기민요는 ‘나의 이야기’…“‘척’하지 말고 다시 대중과 함께”=늘 새로운 시도를 하지만, 이희문이 놓지 않고 이어가는 작업 중 하나는 ‘경기민요’에 대한 아카이브를 만드는 일이다. “작가로서, 아티스트로서의 작업이에요.” 이희문의 역사는 이 작업을 통해 하나씩 펼쳐진다. 그가 1년에 한 번씩 선보이는 공연 ‘깊은 舍廊 사랑’ 3부작이 그렇다. 소리꾼 이희문의 탄생이자, 경기민요의 과거와 현재가 공연 안에 담겼다.
“계속해서 저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지금 하고 있는 것은 제 정체성을 이야기하는 과정이에요. 제 자신이 이렇게 생겨먹었다는 것,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작업이자 과정이에요.”
예전의 그는 다른 장르의 사람을 만날 때 ‘경기민요’를 한다고 말하는 것이 힘들었다고 한다. “이런 시대에 뜬구름 잡는 것 같은 전통예술을 하는데, 거기서도 소리를 한다고 하면 다들 판소리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잘 알지도 못 하는 경기민요를 하고, 수요도 없는 여자 판에서 남자가 몸을 담고 있죠.” 경기민요를 제대로 보여주고 싶은 고민이 깊었다. “무엇이든 알리기 위해선 사실 스타가 나와야 해요. 스타가 나와야 베일에 가렸던 것이 벗겨지고, 파 급효과가 커져요.” 이희문은 경기민요의 스타가 됐다. 생태보호구역을 벗어난 과감한 행보 덕분이다. 그 안엔 진짜 ‘경기민요’를 보여주려는 갈망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희문이 1년에 한 번씩 선보이는 공연 ‘깊은 舍廊 사랑’ 3부작[이희문 컴퍼니 제공] |
경기민요에선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남자 소리꾼이 사라졌다. ‘남자 소리꾼’에 대한 탐구는 이희문에게도 필요한 작업이었다. “여성 선생님께 배우고, 어머니 소리를 날 때부터 들으며, 여성의 소리를 체득하다 보니 너는 왜 남자가 여자 소리를 하냐는 소리를 종종 들었거든요.” 그는 “지금의 아이돌 기획사와 같은 권번이 생기며 훌륭한 예인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일장일단이 있었다. 여자 소리꾼들은 화려한 기교로 상품성을 높였다. 남자 소리꾼이 사라진 계기였다. 잘 다듬어져 규격화된 소리를 내는 이 세계엔 자유로움도 함께 사라졌다.
과거를 더듬어보니 경기민요 속 남자 소리꾼들은 홍대의 인디밴드 같았다고 한다. 사랑방 같은 공간에 모여 노래를 만들고, 배타적인 음악을 했다. “남들이 따라할 수 없는 자기만의 기교와 리듬을 만들더라고요. 같은 노래도 다 다르게 불러 틀이 없고, 자유로웠죠. 그걸 알고나서 내가 하고 있는게 틀리지 않다는 걸 알게 됐어요. 이런 걸 깨달으며 광명을 되찾은 거죠. 그래서 명분을 가지고 제가 하는 것을 더 밀어붙일 수 있는 계기가 됐어요.”
이희문은 이 안에서 전통음악에 날개를 달았다. 한바탕 놀면서, 애틋하게 명맥을 잇는다. 국악은 여전히 지루하다는 편견을 벗지 못 하지만, 이희문은 ‘국악’이 ‘힙’하다는 것을 알려줬다. 그는 “이젠 ‘척’하지 말자”고 말한다.
[이희문컴퍼니 제공] |
“원래 우리 전통음악은 궁중음악도, 양반 음악도 아니었어요. 서민들이 향유하던 음악이었죠. 그런데 예술이라는 것을 한답시고 품격이 상승하고, 신분이 높아졌어요. 경기민요는 1975년 문화재로 지정됐어요. 사람에게 문화재를 주다 보니 그 사람의 기능만 옳다는 기준이 생기면서 다양성이 사라졌어요. 문화는 다르고 다양해야 하는데, 맞고 틀림이 만들어졌죠. 서민들이 즐기던 트렌디한 음악이 권력을 부여받으며 대중과는 멀어졌어요. 저한테 따라오는 수식어는 많지만, 전 B급 소리꾼이라는 말이 가장 좋아요. 문턱도 없고 경계도 없는 음악으로 이어가야죠.
고승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