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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대와 관객의 변화…무대가 ‘여성의 이야기’를 말한다
‘마리 퀴리’·‘아이다’·‘리지’…여성 서사 강화한 뮤지컬 증가
남성 중심 서사는 판타지, 여성 서사는 ‘나’의 이야기
“여성 서사 보며 연대의식 강화…형식과 방식의 다양성 필요”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무대 위 ‘백마 탄 왕자님’과 사랑에 빠지는 지고지순한 여성, 남성 캐릭터가 성장하는 데에 일조하는 정서적 지원군, 혹은 성적 학대나 폭력을 견디는 대상…. 무대에서 펼쳐지는 공연의 세계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구시대의 캐릭터를 보여준다. TV와 영화보다도 한참이 뒤처졌다.

이유는 명확하다. 이러한 캐릭터 구도는 남자 주인공을 ‘히어로’로 만들기 위한 ‘구닥다리’ 노하우다. 공연시장의 70% 이상 점유율을 차지하는 여성 관객들을 위해 좀 더 멋진 남성 캐릭터를 만드는 것이다. 뮤지컬 제작사 쇼노트 관계자는 “그동안 많은 뮤지컬에서 여성은 남성 캐릭터가 모험을 헤쳐나가는 데에 있어 사랑을 주고받는 서브 캐릭터에 그쳤던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남성 캐릭터를 위한 서사가 2시간 넘게 이어지는 동안 여성 캐릭터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관객들도 남성 서사가 강조된 작품에서 여성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최근 여성 관객들의 ‘시선’이 달라졌다. 지난 몇 년 사이 ‘미투’와 ‘페미니즘’이 전 세계에서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며 공연계에도 작은 변화들이 생겼다. 당연하게 받아들인 남성 중심의 시선과 서사에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주체는 2030 여성 관객들이다.

지혜원 경희대학교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는 “국내 뮤지컬 시장은 20~30대 여성 중심 시장으로 남성들이 멋있게 나오는 작품이 주류를 이뤘다”며 “하지만 사회 분위기가 달라지며 여성, 사회적 약자, 소수자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다양한 시각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특히 여성의 삶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이 두드러진 변화다”라고 말했다.

뮤지컬 ‘마리 퀴리’는 여성, 이민자라는 사회적 편견과 한계에도 자신의 삶을 개척한 과학자 마리 퀴리의 삶을 다룬 작품이다. [연합]

▶ 달라진 시대, ‘여성 서사’ 강조한 뮤지컬=80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 풀어낸 과학자 ‘마리 퀴리’(3월 29일까지·충무아트센터)의 이야기는 최근 주목받는 ‘여성 서사’ 뮤지컬이다. 여성, 이민자라는 사회적 편견에도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은 마리 퀴리의 삶을 그렸다. 김태형 연출은 “마리 퀴리라는 인물을 통해 사회의 편견과 차별 속에서 자신의 삶을 어떻게 이겨내야 하는지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마리 퀴리의 상대역은 남성이 아닌 여성이다. 마리 퀴리는 ‘안느’라는 여성 캐릭터를 통해 자신의 삶을 깨닫고 성장한다. 이 과정에서 ‘여성 연대’가 강조된다. 김 연출은 “시대의 메시지를 강하게 심겠다는 의지가 없더라도 시대가 요구하는 것을 담을 수 밖에 없었다”며 “주인공뿐 아니라 파트너도 여성인 이야기를 시대가 원하고 있고, 필요가 느껴졌다”고 말했다.

‘아이다’에선 누비아 공주 아이다가 자신을 깨고 나와 조국을 위해 맞서 싸우는 모습을 보여준다. [신시컴퍼니 제공]

전 세계에서 마지막 시즌을 보내고 ‘아이다’(2월 23일까지·블루스퀘어, 3월 30일부터·부산 드림씨어터)는 누비아 공주 아이다의 삶을 통해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를 보여준다. 극을 관통하는 커다란 줄기는 ‘사랑’이지만, 아이다가 껍질을 깨고 나와 조국을 위해 투쟁하는 모습은 작품에서 중요한 장면 중 하나로 꼽힌다. 15년 전 작품인 만큼 ‘아이다’는 시대의 변화와 함께 여성 캐릭터의 화법도 달라졌다. 이지영 연출은 “(노예가 된) 아이다가 이집트 장군 라다메스에게 당연하게 극존칭을 썼다”며 “연인 사이가 되고 난 이후에도 극존칭을 쓴 부분들을 반말로 바꿔보고 싶었다.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고, 이러한 부분은 서열 중심의 이상한 발상이라 판단했다”고 말했다. 제작진에 따르면 다섯 번의 시즌을 지나는 동안 관객들도 대사의 변화를 포착하고 더 긍정적인 반응을 내놓았다.

오는 4월 막을 올리는 ‘리지’는 여배우 4명이 주인공이 돼 여성의 이야기를 하는 실험적 작품이다. [쇼노트 제공]

오는 4월 막을 올리는 뮤지컬 ‘리지’는 여성 주인공 4명이 극을 이끌어가는 주체다. 1982년 미국 사회를 놀라게 한 ‘리지 보든 살인사건’을 토대로 한 실화 기반 뮤지컬이다. 쇼노트 관계자는 “폭력적인 아버지로 인해 고통받던 리지가 자신을 억압하는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주체적인 방식으로 삶에 저항하는 모습을 담았다”며 “여배우만 나오는 실험적인 작품인데도 티켓 오픈 첫날 예매율 1위를 기록하며 관객들의 관심을 받았다”고 말했다.

여성 서사가 강조된 작품은 지난해부터 부쩍 눈에 띄었다. ‘호프: 읽히지 않은 책과 읽히지 않은 인생’, ‘베르나르드 알바’와 같은 작품이다. ‘베르나르드 알바’는 여성 10명이 무대에 오르는 뮤지컬로 공연 기간은 짧았지만, 전석 매진되는 극적인 순간도 연출했다. 7년 전 초연돼 현재까지도 상영 중인 ‘레베카’(3월 15일까지·충무아트홀)는 1920년대 추리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EMK뮤지컬컴퍼니 관계자는 “원작을 고스란히 가져온 고전인 데도 ‘나’의 성장 과정을 보여주는 여성 서사가 밑바탕에 자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호프: 읽히지 않은 책과 읽히지 않은 인생’

▶ 여성 서사=나(여성 관객)의 이야기…다양한 방식의 전개 필요=공연계에 나타난 변화는 시기가 짧았다. TV나 영화에 비한다면 공연계에선 여전히 남성 중심의 서사가 대다수를 이룬다. 티켓 판매에 대한 제작자들의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지 교수는 “관객들의 성비가 절대적인 국내 공연 시장에서 남성 배우가 멋지게 나오지 않는데도 팬덤을 끌어올 수 있을까 염려한 지점이 있었다”고 말했다. 제작자 입장에선 여성 중심의 작품이 부동의 마니아 층(20~30대 여성 관객)을 움직이기 어렵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긍정적인 변화는 ‘호프’, ‘베르나르드 알바’, ‘마리 퀴리’가 시장에서 크고 작은 성공을 거두며 변화의 씨앗을 뿌리고 있다는 점이다. 지 교수는 “엄마의 삶, 여성의 삶을 조명한 작품들이 관객들에게 울림을 주며 오히려 여성 연대가 생겨나고 조금 더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이 생겼다”고 설명했다.

뮤지컬 ‘마리퀴리’는 극중 마리퀴리와 안느를 통해 여성 연대를 강조한다. [연합]

여성 관객의 입장에서 남성 중심의 서사가 ‘판타지’라면, 여성 중심의 서사는 곧 ‘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지 교수는 “여성의 삶이 오히려 보편타당하고, 우리의 이야기라는 인식이 커졌다”며 “사회적, 역사적 배경이 우리와 상관없는 시대와 지형을 향해 있더라도 여성으로서 가지고 있는 공통분모를 확인했기 때문이다”라고 분석했다.

여성 서사를 갈망하는 관객들의 갈증도 ‘여성 서사’ 뮤지컬의 등장에 일조하고 있다. 쇼노트 관계자는 “여성 관객들 사이에서 여성의 이야기, 여성의 삶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나오면 좋겠다는 마음이 서서히 생겨났고, 그러한 이야기를 통해 여성끼리의 연대의식을 경험하고 있다”고 말했다.

여성 서사가 강조된 작품의 숫자가 늘며 여배우들도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됐다. ‘리지’만 해도 실력파 여성 배우들이 대거 등장한다. 쇼노트 관계자는 “실력 있는 여배우들이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공연이 많지 않다”며 “이 작품에선 4명의 배우들이 다 주인공으로 부각돼 자신의 재능과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다만 아쉬움도 남는다. 호평을 받으며 주목받은 여성 중심 서사의 뮤지컬은 지금의 오늘과는 동떨어진 시대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드라마와 영화에서 만나는 ‘일상적 소재’가 아닌 멀리 떨어진 시대의 억압받는 여성을 그리며 현재를 말하고 있다.

지 교수는 “배경은 현대가 아니지만, 여성 관객들이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과거나 지금이나 여성의 위치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확인하기 때문이다”라며 “다만 먼 과거에서 불행한 삶을 산 여성을 슬프고 무겁게 풀어내는 스토리보다는 다양한 방식과 형식으로 여성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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