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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세상을 발칵 뒤집은 1980년 쇼팽 콩쿠르는 클래식 음악계의 ‘슈퍼스타’의 등장을 알렸다. 우승자(베트남 당 타이 손)보다 더 뜨거운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주인공은 이보 포고렐리치. 그가 1차 예선에 통과하자 루이스 켄트너가 심사위원직에서 물러났고, 3차 예선에서 포고렐리치가 탈락하자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반발하며 사임했다. 포고렐리치는 ‘콩쿠르라는 틀에 가둘 수 없는’ 천재 피아니스트의 상징이 됐다. 콩쿠르 4개월 뒤, 그는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녹음을 시작해 1995년까지 14장의 앨범을 남겼다. 그에겐 ‘건반 위의 이단아’라는 별칭이 따라다녔다. 생명력 넘치는 연주와 매혹적인 외모는 포고렐리치를 당대의 아이돌로 올려놨다. 그는 음악 스승인 21세 연상의 부인 알리사 케제랏제와 결혼했고, 아내가 죽은 뒤 긴 방황의 시간을 보냈다. 그 무렵 꽤 오래 피아노를 놓았지만, 그에게 피아노는 곧 자유였고, 표현의 수단이었다.
포고렐리치의 이번 한국 공연은 그가 24년 만인 지난해 소니와 전속 계약을 맺은 뒤 발매한 새 음반 기념 투어의 일환이었다. 은둔형 연주자로 지내던 그가 다시 나타났으니 세간의 관심도 뜨거웠다.
15년 만에 한국을 찾은 포고렐리치가 무대 위에 모습을 드러내자 객석에선 함성과 뜨거운 박수가 쏟아졌다. 공연 직전까지 리허설에 몰두하던 그가 연미복 차림으로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피아노 앞에 앉았다.
이날 공연은 바흐의 ‘영국 모음곡’을 시작으로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1번’, 쇼팽의 ‘뱃노래’와 ‘전주곡(C# 단조)’에 이어 포고렐리치의 대표 레퍼토리인 모리스 라벨의 ‘밤의 가스파르’로 달려갔다. 포고렐리치의 피아노에 객석의 반응은 충분히 나뉠 법 했다. 바흐부터 베토벤, 쇼팽에 이르기까지 전통적인 클래식 연주에선 한참을 벗어난 포고렐리치의 연주는 힘을 들이지 않아도 강력했고, 건반 위로 떨어지는 손가락은 여전히 파격적이었다. 모리스 라벨의 ‘밤의 가스파르’는 극한의 기교로 난곡 중의 난곡으로 꼽힌다. 포고렐리치의 ‘밤의 가스파르’는 그의 청년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연주였다. 포고렐리치는 청년 시절의 자신과 지금을 비교하며 “그리 달라진 점이 없다”고 말했다. “음악은 각자가 바라보는 대로 끊임없이 새로 발견되고 변화하지만, 어떤 조각들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다만 시간과 함께 포고렐리치의 음악과 진화하고 새로운 시대를 향해 나아가는 것처럼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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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석은 분명 호불호가 갈렸다. 공연장을 찾은 클래식 애호가나 음악 전공자들은 변주가 많았던 부분에 대해 힘든 연주였다는 평가를 내놨다. ‘포고렐리치의 머릿속에 들어가보지 않는 이상 온전히 이해하기 힘든 연주’라는 평가도 나왔다. 그의 커다란 손끝에서 분해된 음들은 다시 새로운 악보로 쓰여 관객에게 다가섰다. 연주의 표현법과 기교를 잘 모르더라도 이날 공연은 구도자처럼 보이는 포고렐리치의 깊은 곳에 가라앉은 짙은 감수성을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공연을 마치자 객석에선 끊이지 않는 박수가 이어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포고렐리치는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가만히 객석을 응시했다. 그는 연주를 마친 이후 다섯 번이나 다시 무대로 나와 똑같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떠나는 뒷모습마저 우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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