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트니 휴스턴의 명곡·난이도 높은 안무
찌를 듯한 고음·하루 12시간씩 맹연습
아이돌 그룹 두번의 실패로 한때 좌절
‘레이첼’ 통해 자신감·자존감 찾아
“뮤지컬 배우로 자리잡는 게 목표예요”
뮤지컬 보디가드 여주인공 해나는 “늘 첫 공연처럼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며 한창 공연 중인 소감을 밝혔다. 박해묵 기자 |
아이돌 두 번, 오디션 프로그램 한 번을 거쳤다. 어느덧 데뷔 8년차. 긴 시간은 허투루 쓰지 않았다. 휘트니 휴스턴의 명곡을 줄줄이 소화해야 하는 뮤지컬 ‘보디가드’에서 해나는 예상 밖의 ‘한 방’을 보여주고 있다. 객석을 장악하는 시간은 고작 4~5분. ‘퀸 오브 더 나잇’(Queen of the night)으로 여왕의 등장을 알릴 때, 이미 완벽한 팝스타로 관객과 마주 한다. 킬힐을 신고 소화하는 난이도 높은 안무, 찌를 듯한 고음은 영락없는 레이첼 마론(뮤지컬 ‘보디가드’ 여주인공 이름)이다.
“오프닝 곡 ‘퀸 오브 더 나잇’은 굽 높은 신발을 신고 앉았다 일어났다 춤을 추고, 고음이 끝도 없이 나와요.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더라고요. 처음 연습할 땐 눈물이 고일 정도였도요.”
직장인처럼 연습실을 오가며 하루 12시간씩 레이첼 마론으로 살았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았다. 영화 ‘보디가드’가 뮤지컬로 무대에 오를 당시에도 4명의 레이첼 마론(김선영 박기영 손승연) 중 해나에 대한 주목도는 미미했다. 뚜껑을 열자 분위기는 달라졌다. 흔들림 없이 소화해낸 해나표 ‘레이첼 마론’에 대한 관객 만족도가 높다. 한창 공연 중인 해나(29)를 LG아트센터에서 만났다.
▶ “휘트니 휴스턴이라서”…‘보디가드’로 되살린 가수의 꿈=“아직 스스로 만족감을 느끼지 못 하다 보니 칭찬의 이야기들이 용기를 북돋워 주려는 건가 싶기도 해요.” 뮤지컬에 발을 들인지는 겨우 2년이 넘었다. 소극장 작품인 ‘위대한 캣츠비’를 시작으로 ‘지킬 앤 하이드’, ‘투란도트’를 거쳐 ‘보디가드’까지 네 편을 달려왔다.
“영광스럽게도 큰 작품에서 역할을 맡았어요. 부담감도 배로 커지더라고요. 표값이 한두푼 하는 것도 아니고, 관객 한 분 한 분의 인생에서 이 작품은 한 번뿐인 관람이잖아요. 무대에 올라가면 재밌고 즐겁지만, 항상 첫 공연처럼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어요.”
휘트니 휴스턴을 만나기까지 기다림이 길었다. 지난해 4월, 지정곡 3곡과 대사 한 토막으로 오디션을 본 뒤, 5개월을 기다렸다. 카리스마 있는 팝스타로 보이기 위해 비욘세를 벤치마킹했다고 한다. “다른 작품의 기회가 와도 ‘보디가드’를 놓지 못하겠더라고요. 휘트니 휴스턴이라서요.”
서서울 생활고등학교와 서울예대 실용음악과를 거치는 동안 그의 명곡들은 ‘연습벌레’였던 해나 안에서 수천, 수만 번 다시 불렸다. “뮤지컬이 나의 전공을 살릴 수 있고, 못 다 이룬 꿈을 다시 꺼낼 수 있는 무대라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게 휘트니 휴스턴이었어요.”
▶두 번의 데뷔와 해체…“뮤지컬 배우로 새로운 길”=해나의 연예계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데뷔도 여러 번이다. 2013년 ‘키스 앤 크라이’로 데뷔해 세 장의 앨범을 낸 뒤, 해체. 2014년엔 ‘슈퍼스타K6’에서 톱11까지 올랐다. 2016년엔 다시 ‘마틸다’라는 그룹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 무렵 소극장 뮤지컬 ‘위대한 캣츠비’도 병행해 처음으로 무대에 올랐다. 마틸다로서 활동은 활발했다. 하지만 두각을 드러내진 못 했다.
“마틸다의 활동이 불투명해지면서, 침대에 누워만 지내던 날이 있었어요. 그때 대인기피증과 우울증이 심해졌어요. 부모님께 그만하고 싶다고, 더이상 노래 안 할 거라는 이야기도 했었어요.” 몇 번의 실패를 마주하니, 자존감은 무너졌다. “그러다 제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어요. 매일같이 오디션 사이트에 들락거리다 ‘지킬 앤 하이드’ 오디션을 보게 됐어요.”
당시 소속사엔 이야기도 하지 않은 채 모든 준비를 혼자 도맡았다. 백화점을 돌며 의상을 마련하고, 빗속을 달리는 택시 안에서 오디션 곡을 연습하며 보러 간 첫 번째 대형 오디션이었다. 4차까지 진행된 오디션에 합격하며 해나에겐 새로운 길이 열렸다.
“저는 스스로 뛰어난 배우, 잘하는 배우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위대한 캣츠비’에선 나도 대사를 읽을 수 있는 아이라는 걸 알았고, 무대가 재밌는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지킬 앤 하이드’는 제가 새로운 것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줬고요. ‘투란도트’를 통해선 한 번도 쓰지 못한 음역을 쓸 수 있게 됐어요. ‘보디가드’에선 레이첼을 통해 잃었던 자존감과 자신감을 찾고 있어요.”
해나는 스스로를 이제 걸음마를 뗀 ‘뮤지컬 배우’라고 이야기한다. 뮤지컬을 통해 “몰랐던 나를 알게 되고, 소소한 목표를 이뤄가고 있다”고 한다. 여전히 자리 잡은 아이돌 출신 뮤지컬 배우라는 편견도 이겨내는 중이다.
“전 뮤지컬과 아이돌, 두 경계의 어디쯤에 서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언젠가 그 경계를 허물고 뮤지컬 배우로 자리잡는게 저의 목표예요. 어떤 역할을 맡았을 때 그 배역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온전히 전달하고, 그것을 통해서 좋은 영향이나 감정을 가질 수 있게 되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고승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