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54명 인물화 통한 근현대사 성찰
조선 최초 누드화 추정 김관호 ‘해질녁’
조바위 쓰고 한복입은 배운성 ‘가족도’
“전람회에 진열된 김군의 그림은 사진이 동경에서부터 도착하였스나 녀인의 벌거벗은 그림인 고로 사진으로 게재치 못함”
1916년 10월 24일 매일신보는 김관호의 누드화 ‘해질녘’이 제10회 일본 ‘문부성미술전람회’ 특선을 차지했다며 “미술가의 과거급제와 같하야 비상한 영광으로 여긴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했지만 정작 그림 사진은 게재하지 않았다. 벗은 몸을 그린다는 것이 당시 조선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1910년대부터 2000년대 이르기까지 근 100년의 한국 근현대사가 인물화를 통해 펼쳐진다. 갤러리현대는 2020년 개관 50주년을 맞아 ‘인물 초상 그리고 사람’전을 개최한다. 일제 강점기, 전쟁, 분단, 민주화 등 굴곡진 근현대사를 성찰하는 계기를 마련한다는 취지로 기획됐다.
구관과 신관을 모두 활용하는 전시엔 작가 54명의 인물화 71점이 나왔다. 구관에서는 191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신관에서는 195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를 선보인다. 박명자 현대화랑 회장과 미술평론가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 미술평론가 최열, 미술사학자 목수현과 조은정이 전시 자문으로 참여했다.
조선 최초 누드화로 추정되는 김관호‘ 해질녁’ |
전시엔 도쿄예술대학 미술관에 소장된 6점이 포함됐다. 조선 최초 누드화로 추정되는 김관호 ‘해질녁’을 비롯 고희동, 김관호, 이종우, 오지호, 김용준의 자화상이 나왔다. 일본 유학 당시 그린 작품들로, 일부 작가는 한복을 입은 모습으로 그려 한국인으로의 정체성을 드러냈다.
배운성, 가족도, 캔버스에 유채, 139x200.5cm |
당시 주거와 복식을 생생하게 드러내 등록문화재 제533호로 지정된 배운성의 ‘가족도’도 눈길을 끈다. 조바위를 쓴 아이를 안고있는 할머니와 아들내외, 손주들까지 대가족의 풍경이다. 인물은 동양적 선으로 묘사됐지만, 화면 뒷쪽 창을 통해 보이는 원경은 원근법을 활용해 그렸다. 배운성이 신세를 진 백인기 가족을 그린것으로 추정된다. 전시를 기획한 미술사학자 목수현은 “인물화야말로 동시대를 가장 잘 담아내며, 시대 흐름을 정확하게 보여준다”고 강조했다.
김환기‘ 여인과 매화와 항아리’(1951) |
박수근‘길가에서’ |
김환기의 ‘여인과 매화와 항아리’(1951)는 한국전쟁 당시 피난갔던 부산의 풍경이다. 소달구지에 가족을 싣고 구름을 가르며 따뜻한 남쪽 나라로 향하는 이중섭의 ‘길 떠나는 가족’, 전쟁이 끝나고 마주친, 아기 업은 단발머리 소녀를 담아낸 박수근의 ‘길가에서’도 전쟁 중 우리의 모습들이 담겼다.
임옥상, 보리밭, 1983, 캔버스에 유채, 94x130cm |
산업화 이후 민주화의 바람이 거세던 시기는 민중미술 작가들의 인물화로 채워졌다. 임옥상의 ‘보리밭’, 황재형의 ‘광부’, 노원희의 ‘어머니’, 강요배의 ‘흙가슴’, 오윤의 ‘비천’이 그 주인공이다. 불의와 억압에 저항하는 강한 인물상부터 가슴 한켠이 서늘해 질 정도로 서정성 짙은 작업까지 스펙트럼이 넓다. 특히 김호석 작가의 ‘지곡서당 청명 선생님’은 조선시대 인물화의 현대적 계승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박명자 현대화랑 회장은 “이번 전시가 한국 구상회화 가치를 재발견해 한국 근현대미술의 중요성과 독창성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전시는 내년 3월 1일까지 이어지며, 전시기간 중 매일 오후 3시에 도슨트 투어가 있다. 이한빛 기자/vick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