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고재 본점 ‘하이 앤 로우’·청담점 ‘인-비트윈스’展
지리산·한라산 이름딴 ‘세마포어’ 시리즈 선보여
“자연과 인간문명, 동양과 서양을 연결하는 작가”
안드레아스 에릭슨 개인전 전시전경. 전시장 바닥의 흙더미는 작가 작업실 앞에 수시로 생기는 두더지 둔덕을 차용했다. 자연은 자연의 작업을, 인간은 인간의 작업을 이어간다. [학고재갤러리 제공] |
현대 사진 거장 볼프강 틸만스(Wolgang Tillmans), 셀러브리티 초상으로 국내에서도 인기가 좋은 엘리자베스 페이튼(Elizabeth Peyton), 빛을 재료로 작업하는 올라퍼 엘리아슨(Olafur Eliasson). 이름만 들어도 아찔한 현대미술 거장들의 공통점은 바로 ‘노이게림슈나이더(neugerriemschneider) 갤러리’다. 현대미술의 핫 스폿, 베를린의 아트씬을 이끄는 이 갤러리는 매년 4월 말 열리는 베를린 ‘갤러리 위크앤드’때 무조건 방문해야하는 곳으로 꼽힌다.
이 노이게림슈나이더 갤러리가 지난 2000년대 초부터 ‘찜’한 안드레아스 에릭슨(44)의 첫 아시아전시가 학고재갤러리에서 열린다. 국내에서는 익숙하지 않은 이름이지만 2011년 베니스비엔날레 북유럽관 대표작가로 국제적 인지도가 있는 작가다. 전시를 위해 한국을 찾은 팀 노이게르 노이게림슈나이더 갤러리 대표는 에릭슨에 대해 “자연과 인간문명을 통합적으로 바라보며, 동양과 서양을 연결하는 작가”라고 소개했다.
이번 전시는 학고재 소격동 본점과 청담점에서 동시에 열리며, 소격동 본점에서는 ‘하이 앤 로우’로, 청담점에서는 ‘인-비트윈스’라는 제목으로 총 42점을 소개한다.
‘하이 앤 로우’에서는 에릭슨의 대표작인 ‘세마포어’시리즈를 비롯 조각, 판화, 직조, 종이작업 등이 펼쳐진다. 약간의 빛 바랜듯 투명한 색이 붓질위로 살아나며, 재료의 물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세마포어’연작은 하늘에서 내려다 본 풍경처럼 보인다. 등고선처럼 펼쳐지는 선 주위로 색면이 들어차 독특한 형상을 만들어낸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학고재 한옥 건물에 걸고나니, 동양화 같은 느낌을 받는다”며 “평소 전시 장소나 제작 장소에 따라 작품 제목을 붙이는데 이번에는 한국 산들을 검색해서 이름을 정했다”고 설명했다.
이번에 선보이는 ‘세마포어’시리즈는 그래서 ‘세마포어-지리산’, ‘세마포어-한라산’, ‘세마포어-가리왕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세마포어’는 항해 중이거나 항내에 정박 중인 선박끼리 또는 선박과 육지 사이에서 쓰이는 가장 간단한 근거리 통신법을 말한다. 서로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듯 ‘세마포어’시리즈는 작품들끼리 서로 연관돼 있다. 모두 하나의 드로잉에서 시작했다. 같은 크기와 형식을 취하지만 각 회화들이 서로를 참조하며 완성됐기에, 조금씩 다르다. 작가는 “수면에서 서로를 비추며 공명하듯, 대화하는 것 같지 않느냐”고 했다.
‘대화’와 ‘연관’은 에릭슨의 작품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다. 전시장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검은 흙덩어리들도 같은 맥락에 서있다. 스웨덴 북부 시네쿨레 산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15년 넘게 그곳에서 작업하고 있는 작가는 어느날 아침 마당에 쌓인 흙더미를 마주했다고 한다. 산에 살던 두더지들이 밤새 땅을 파 놓은 흔적이었다. “밤 사이 누군가는 계속해서 작업하고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의 그림을 그리듯, 자연은 자연의 작업을 한다” 인간의 작업과 자연의 작업이 만나는 지점이다.
전시장 안쪽에서는 작가 본인의 작업실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들이 나왔다. 커다란 창 밖으로 보이는 숲의 이미지가 실크스크린에 투영됐다. 액자 프레임이 창의 격자를 대신했다. 작업실 창문에 반사된 풍경을 착각하고 날아와 부딪혀 사고를 당한 새들은 가녀린 청동 조각으로 탄생했다. 환영을 현실로 믿은 새는 끊임없이 환영을 뒤쫒는 인간 문명으로도 읽힌다. 전시는 11월 3일까지.
이한빛 기자/vicky@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