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금, Memory Board 4, 2019, 4mm artificial pearl beads, adhesive, ballpoint pen on paper, 114X83cm, framed.[갤러리바톤 제공] |
글자 한 자 한 자가 진주 구슬로 변했다. 의미가 사라진 자리를 조형적 아름다움이 채웠다. 텍스트를 이미지로 읽는 작가, 고산금의 개인전 ‘한없는 관용(Infinite Tolerance)’이 서울 용산구 독서당로 갤러리 바톤에서 열린다. 동 갤러리에서 2016년 전시 이후 3년만이다.
작가에겐 소설의 한 페이지나 신문의 기사글, 시 한편, 법전의 한 장이 모두 오브제다. “신문의 레이아웃을 보고 작업을 처음 시작했다”는 그에게 텍스트는 음성과 기호의 집합체이자 아직 뜻이 되지 않은 생각의 덩어리들이기도 하다. 관객들에게는 어떤 텍스트인지 굳이 알리지 않는다. 사물의 외양에서 불현듯 영감에 휩싸이듯, 책과 문장에서 매료되는 지점이 텍스트가 전달하고자 하는 정확한 ‘의미’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간파한다면 원본 텍스트에 대한 집착도 사라진다. 그럼에도 너무나 궁금하다면 제목이 좋은 힌트다.
이번 전시에서는 인공 진주를 패널위에 배치하던 기존 시리즈에 더해 보석으로 제작한 ‘세한도’와 수십개의 검은 볼펜으로 바탕을 칠한 ‘메모리 보드’연작 등이 새로 나왔다.
진주 패널 작품 이전의 프리퀄로도 해석되는 ‘메모리 보드’연작은 볼펜의 얇은 선이 여러번 겹쳐 지나가 완성된 검은면에서 출발한다. 작업을 하면서 떠올렸던 수많은 생각들도 볼펜선과 함께 묻혔다. “상처처럼도 보인다”는 작가의 설명처럼 어떤 곳은 종이가 오돌도돌하게 일어났다. 이 위로 진주 구슬을 흩뿌리자 비온날 길 위의 웅덩이처럼 뭉쳤다. 갤러리측은 “텍스트 이전의 세계, 텍스트가 활자가 되기 전 문장가의 마음속에서 심상으로 존재하며 엉켜서 무언가 되기 직전인 듯한 화면을 연출한다”고 설명한다. 글자 한 자, 진주 한 알이 오롯이 의미를 지니기 전까지 우리의 머릿속에서 가슴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들여다보는 작업이다.
고산금은 이화여자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뉴욕 프랫 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에서 석사 과정을 수료하였다. 2016년 갤러리바톤 개인전을 포함,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북서울미술관, 경기도미술관, 대전시립미술관, 성곡미술관 등 국내 주요 미술관 및 북경 C5 아트 베이징, 로마 카를로 빌로티 뮤지엄(Museo Carlo Bilotti, Italy) 등 해외 유수의 미술 기관에서도 활발한 전시를 이어왔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경기도미술관, 경기창작센터, 서울대학교 미술관 등에 소장됐다. 전시는 10월 2일까지. 이한빛 기자/vick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