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의 2003년 영화 '살인의 추억'에는 전혀 상반된 두 캐릭터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한 명은 주먹구구 식으로 사람을 두들겨 패서라도 자백을 받아낸다. 다른 한 쪽은 수사기록에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단서를 잡으려 한다. 흥미로운 지점은 영화 막바지에서 잡았던 피의자를 놓아주는 대목이다. 미국까지 증거물을 보내 DNA 검사를 받았지만, 오히려 고생하면서 쫓던 피의자가 범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서류는 거짓말하지 않는다'며 냉정을 유지했던 형사는 오히려 믿었던 서류에 배신을 당한다. 결국 이성을 잃고 피의자에게 권총을 겨누기까지 한다. 영화 주제와 무관하게, 이 장면은 사건을 집요하게 쫓으며 고생하던 형사가 '심증'을 굳히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영화 속 배경이 되는 1980년대가 아닌 현재에도, 이런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2004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서울 서남부지역에 연쇄 강력사건이 발생했을 때 일이다. 당시 경찰은 피해자 부친인 송모 씨를 의심하고 수사를 벌인다. 여러 차례 불러 장시간 대면조사를 벌이며 '이미 증거가 제출돼 있다'고 하며 자백을 요구했다. 송 씨가 내연관계 때문에 범행했을 것이라는 의심 때문에 그의 여자 동창생들에게 전화를 걸어 사적인 관계를 확인하기도 했다. 아이를 셋이나 잃은 피해자 송 씨는 나중에 잡힌 진범이 범행 내역을 모두 털어놓은 후에야 의심을 벗을 수 있었다. 하지만 송 씨의 모친은 마음고생을 하다 세상을 떠났고, 경찰 조사를 받는 남편을 의심하던 부인도 이혼을 택했다.
돌이켜 보면, 취재 과정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할 때가 더러 있었다. 추운 겨울에 누군가를 오래 기다리다 보면 내가 원하는 대답을 꼭 듣고야 말겠다는 오기가 생기곤 했다. 기사 방향을 잡아놓고 정보를 수집하다 보면, 원하지 않는 내용은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없지 않았다.
검찰도 비슷하다. 사안을 접하고 검사가 직접 수사에 나서 피의자를 쫓다 보면 의심은 확신으로 변하고, 더러는 절차에 맞지 않는 수단을 사용해 처벌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도 한다. 특히 검찰이 직접 공개수사에 나설 경우는 더 난감하다. 일단 압수수색에 나서고 언론 보도를 타기 시작하면, 나중에 무혐의 처분을 내리기가 어렵다. '특수수사는 뒤로 무를 수가 없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말은 일리가 있다.
경찰이 수사하고, 검찰이 기소하는 대부분의 사건은 얼마나 이른 기간에 끝내느냐 하는 속도의 문제일 뿐, 공소유지는 잘 되는 편이다. 수사 주체와 기소 주체가 다르고, 수사 단계에서 잘못이 있는지 한 번 '필터링' 되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을 거친 사건 무죄율은 1%가 채 되지 않는다.
정부가 마련한 '검·경 수사권 조정 합의안'에 따르면 1차적인 수사 권한은 경찰이 갖는다. 하지만 검찰의 직접 수사가 '반드시 필요한 분야'로 ▷뇌물이나 정치자금 관련 부패범죄 ▷기업, 경제비리 등 경제범죄 ▷시세조종, 인수합병 비리 등 금융·증권범죄 ▷공직선거와 각종 조합 선거 등 선거범죄 ▷군사기밀보호법 등 방위사업 비리 ▷위증과 증거인멸, 무고 등 사법방해 사건은 그대로 검찰이 직접 수사할 수 있게 했다. 부패범죄나 경제범죄라는 개념도 모호하고, 주요 사건 범주를 모두 묶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정안 대로라도 사실상 검찰의 '특수수사'는 그대로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검찰총장이 직접 지휘하며 정계나 재계를 겨눴던 옛 대검 중수부는 막강한 화력을 자랑했다. 검찰총장 후보인 윤석열 검사장도 2000년대 중후반 대검 중수부에서 굵직한 사건을 맡았다. 그 시절 대검 중수부가 재판에 넘긴 사건 1심 무죄율은 10%대였다. 경찰이 수사하고, 검찰이 기소하는 일반 사건의 10배가 넘는 수치다.
좌영길 사회섹션 법조팀장/jyg97@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