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시대 초기 위(魏) 문후(文候) 때 오기(吳起)는 부국강병을 이뤄 초강국 진(秦)에 연전연승한다. 문후의 아들 무후(武候)가 군위에 오르자 전문(田文)을 재상에 기용한다. 마음이 상한 오기가 전문을 찾아 따진다.
“싸움에서 이기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며, 주변국들을 견제하는 데 누가 더 낫소?”
“모두 오기 장군이 낫소”
전문이 인정한다. 그러면서 되묻는다.
“하지만 어린 군주를 보필하고 신하들간 불화와 백성들이 불안을 다스릴 때요. 재상으로 그대와 나 중에 누가 더 적임자요?”
잠시 생각하던 오기는 “그대가 맡아야 하겠지”라며 인정한다.
전문과 오기가 건재하던 위를 진은 넘보지 못한다,
그런데 전문이 죽은 후 재상에 기용된 공숙좌(公叔痤)는 불패의 명장이던 오기를 감당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오기를 험담해 초(楚)로 망명하도록 한다. 위는 점차 약해지고 이후 초가 강성해진다.
전국시대 후반 조(趙) 혜문왕(惠文王) 인상여(藺相如)는 진과의 외교에서 큰 공을 세워 재상에 오른다. 명장(名將) 염파(廉頗)는 이를 시기한다. 피 흘리며 싸운 자신보다 말 몇 마디로 더 높은 자리에 올랐다는 이유에서다. 이를 간파한 인상여는 염파를 의식적으로 피한다. 부하들이 이를 부끄러워하자 인상여는 이들을 달랜다.
“진나라가 함부로 조나라를 공격하지 못하는 것은 나와 염파가 있기 때문이다. 호랑이 두 마리가 한데 어울려 싸우면 그 기세상 모두 살아남기 어렵다. 우리 두 사람이 다투면 진나라만 돕는 꼴이 된다.
이 말을 전해들은 염파가 부끄러워하며 인상여에게 스스로 죄를 청한다. 서로 ‘목을 벨 수 있는 벗(刎頸之交)’이 된 두 사람이 두려워 진은 조를 넘보지 못한다. 인상여가 죽은 후 염파는 군권을 잃고, 조는 장평대전(長平大戰)에서 40만 병력이 생매장 당한 후 사실상 멸망의 길을 걷는다.
지난해 12월19일 열린 금융위원회 회의록이 최근 공개됐다. 금융위와 금융감독원 간 갈등을 금융권에서 모르는 이 드물지만, 정부 문서에서 공식적으로 확인된 첫 사례다.
최종구 위원장은 “양 기관간 갈등은 국가 전체적으로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며 “금융위 직원들에게 다시 한 번 금감원과의 긴밀한 협력을 당부할 테니 금감원장님께서도 임직원들에게 두 기관 간 긴밀한 협력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시면 감사하겠다”고 말했다.
어느 곳에서든 갈등은 발생할 수 있다. 문제는 이를 어떻게 해결하느냐다. 오기가 전문에 양보하지 않았더라면 내분 사태에 휩싸였을 지 모른다. 인상여가 염파를 인정하지 않았더라면 군사반란이 일어났을 수도 있다. 내부 갈등은 최악의 재난이다.
지난 2개월여 동안 금융위과 금감원 간 갈등이 많이 해소됐을까? 양보와 인정이 충분이 이뤄지고 있는 것일까? 좀 더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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