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 내외가 20일 오전 백두산 정상인 장군봉에 올라 맞잡은 두 손을 위로 들어올리고 있다. [사진=평양 사진공동취재단] |
-남북정상 내외 백두산 천지 거닐며 담소
-남측 수행단 “서울 오시면 우리도” 한마음
-송영무 장관 “한라산에 헬기착륙장 설치”
[헤럴드경제=평양 공동취재단 김수한 기자] 남북 정상이 20일 약속대로 백두산 천지에 올랐다.
예정에 없던 백두산행을 제안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문재인 대통령을 포함한 백두산 방문단 일행의 편의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였다.
문재인 대통령과 수행단은 대통령 전용기인 공군1호기 대신 물품 수송을 위해 북한에 들어가 있는 공군 2호기를 타고 오전 7시 27분 평양 순안공항(평양국제비행장)을 이륙, 오전 8시 20분께 삼지연공항에 도착했다.
김정은 위원장과 리설주 여사는 이미 삼지연공항에 도착해 있었다. 김 위원장 내외는 군악대와 의장대,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약 10여분간 환영식을 열고 문 대통령 부부 등 일행을 반갑게 맞이했다.
남북 정상 내외와 수행단은 공항에서 백두산 정상인 장군봉까지 차를 타고 이동했다. 문 대통령 내외와 김 위원장 내외는 삼지연공항에서 산행에 적합한 SUV로 각각 옮겨탔다.
장군봉에 도착한 남북 정상은 백두산행 열차가 오가는 간이역인 향도역에 잠시 들렀다가 오전 10시 10분 케이블카를 타고 10시 20분께 마침내 천지에 발을 디뎠다. 남북 정상이 함께 최초로 ‘민족의 영산’ 백두산 정상에 함께 발을 내딛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김정은 위원장이 문 대통령에게 말했다.
“중국 사람들이 부러워합니다. 중국 쪽에서는 천지를 못 내려갑니다. 우리는 내려갈 수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물었다.
“국경이 어디입니까?”
김 위원장은 국경 부분을 왼쪽부터 오른쪽까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백두산에는 사계절이 다 있습니다”라고 설명을 곁들였다.
리설주 여사가 “(백두산은) 7∼8월이 제일 좋습니다. 만병초가 만발합니다”라며 거들었다.
문 대통령은 “그 만병초가 우리 집 마당에도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경남 양산 산자락에 있는 문 대통령 자택의 마당에 핀 만병초를 떠올린 것이다. 한적한 시골 마을 산 자락에 건축된 문 대통령 자택은 수수하지만 있을 건 다 있다. 안으로는 천연의 계곡물이 흐른다. 그 주변으로 산과 들의 풀꽃이 핀다.
리설주 여사는 “네”라고 짧게 답했고, 김 위원장이 “꽃보다는 해돋이가 장관입니다”라며 화제를 바꿨다.
문 대통령에게 백두산 천지를 북측 정상 내외와 함께 거닌다는 건 1년 전만 해도 이뤄질 수 없는 꿈과 같았다. 그러나 그 꿈을 한 번도 굽힌 적이 없다. 그리고 이날 결국 이루어냈다.
문 대통령은 지난 4월 27일 판문점 남측 자유의 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 당시 회담 후 진행된 만찬에서 건배사를 하면서 “내가 오래 전부터 이루지 못한 꿈이 있는데 바로 백두산과 개마고원을 트레킹하는 것”이라며 “김 위원장이 그 소원을 꼭 들어줄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한 바 있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전날 평양 현지에서 가진 언론 브리핑에서 두 정상의 백두산행이 김정은 위원장의 제안으로 이뤄졌다고 말했다. 제안 시기는 ”어제 오늘 사이의 일”이라고 했고, 제안 이유에 대해서는 “문 대통령이 평소에도 백두산을 가고 싶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고, 가더라도 중국 쪽이 아닌 우리 쪽을 통해 가고 싶다는 뜻을 여러 차례 얘기했다”고 소개했다.
이어 “(문 대통령이) 중국 쪽 아시는 분들을 통해 중국을 거쳐 천지에 오르는 방안을 여러 차례 제안을 받았지만, 우리 땅을 밟고 올라가고 싶다고 말씀하며 이를 마다한 바 있다”며 “이런 점을 북측에서 알고 있었던 것 아닌가 싶다”고 했다.
북측은 물론 알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김 위원장은 문 대통령의 백두산 언급을 잊지 않고 이번 평양 방문 계기에 ‘소원’을 이뤄준 셈이다. 문 대통령을 최대한 예우하겠다는 ‘성의’의 일환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앞서 지난 18일 문 대통령의 방북 첫 날 백화원 영빈관에서 초라하지만 우리 입장에서 최대한 성의를 다 했다며 우리 성의를 마음으로 받아달라고 말한 바 있다.
김 위원장은 “문 대통령께서는 세상 많은 나라를 돌아보시는데, 발전된 나라들에 비하면 우리 숙소라는 게 초라하다”면서 “지난 5월에 문 대통령이 판문점 우리 지역에 오셨는데 장소와 환경이 그래서 제대로 된 영접을 해드리지 못하고, 식사 한 끼도 대접 못한 게 늘 가슴에 걸렸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그래서 오늘 기다리고 기다려 우리가 비록 수준은 좀 낮을 수 있어도 최대한 성의를 다 해서 준비한 숙소고 일정이니, 우리 마음으로 받아달라”며 극진한 마음을 전했다.
리설주 여사 또한 같은 마음이었다. 김정숙 여사가 리설주 여사에게 “오늘 일부러 여기까지 안내해 주시니 너무너무 고맙다”고 말하자, 리 여사는 “최선을 다하느라 노력했는데 미흡한 점이 있으면”이라며 깊은 속내를 내보였다.
문 대통령 또한 “평양시민이 열렬히 환영해주셔서 가슴이 벅찼다”며 “평양시민이 열렬히 환영해주시는 모습을 남측 국민이 보게 된다면 아마 남측 국민도 감동받고 감격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우리 사이에 신뢰와 우정이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잘 될 것”이라며 “오늘 최고의 영접을 받았다”고 답했다.
천지에서의 남북 정상 간 대화는 그래서 더 각별했다.
남북 정상 동시 백두산 천지 산책이라는 세기적 이벤트가 성사된 가운데 문 대통령은 또 하나의 작은 꿈을 품었다. 우리 민족의 통일 염원을 표현한 북한의 노래 ‘백두에서 한라까지’ 제목처럼, 문 대통령은 백두산 천지에서 한라산 얘기를 꺼냈다.
그는 “한라산에도 백록담이 있는데 천지처럼 물이 밑에서 솟지 않고 그냥 내린 비, 이렇게만 돼 있어서 좀 가물 때는 마릅니다”라고 운을 뗐다.
김 위원장은 옆에 있는 수행원(보장성원)에게 문득 “천지 수심 깊이가 얼마나 되나?”라고 물었다. 한라산 백록담 얘기에 언제나 일정 수위를 유지하는 천지의 수심이 궁금해진 것이다.
보장성원이 아닌 리설주 여사가 즉석에서 대답했다.
“325m입니다. 백두산에 전설이 많습니다. 용이 살다가 올라갔다는 말도 있고, 하늘의 선녀가, 아흔아홉 명의 선녀가 물이 너무 맑아서 목욕하고 올라갔다는 전설도 있는데, 오늘은 또 두 분께서 오셔서 또 다른 전설이 생겼습니다”라고 말했다.
리 여사가 말한 백두산 천지의 선녀 전설은 우리 민족에게 대대로 전해오는 ‘선녀와 나뭇꾼’ 설화와 맞닿아 있다. ‘선녀와 나뭇꾼’ 설화는 일부 학자들이 우리 민족의 발원지라고 부르는 러시아 바이칼 호수 근처에 사는 한국인과 똑같은 외모의 부리야뜨 민족의 바이칼 설화와도 내용이 상통한다. 어느새 두 정상 간 대화의 맥은 한라산 백록담, 백두산 천지를 지나 바이칼 호수까지 닿은 셈이다.
김 위원장은 다시 한 번 포부를 밝혔다. 그는 “백두산 천지에 새 역사의 모습을 담가서, 백두산 천지의 물이 마르지 않도록 이 천지 물에 다 담가서 앞으로 북남 간의 새로운 역사를 또 써나가야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비가 안 오면 물이 마르는 한라산 백록담으로 시작된 둘의 대화가 또 한 번 뜨거운 화학반응을 일으켰다.
문 대통령의 머릿속에 파노라마처럼 지난 2박 3일간의 담대한 여정이 다시 펼쳐졌다. 문 대통령은 “이번에 제가 오면서 새로운 역사를 좀 썼지요. 평양 시민들 앞에서 연설도 다 하고”라며 그런 기회를 마련해준 김 위원장에게 에둘러 감사를 전했다.
센스 있는 리설주 여사가 받았다.
“연설 정말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문 대통령은 지금까지 자신이 고집스럽게 중국을 통해 백두산을 안 간 내력을 밝혔다.
“제가 위원장께 지난 4.27 회담 때 말씀드렸는데요. 한창 백두산 붐이 있어서 우리 사람들이 중국 쪽으로 백두산을 많이 갔습니다. 지금도 많이 가고 있지만, 그때 나는 ‘중국으로 가지 않겠다, 반드시 나는 우리 땅으로 해서 오르겠다’ 그렇게 다짐했었습니다. 그런 세월이 금방 올 것 같더니 멀어졌어요. 그래서 영 못 오르나 했었는데 소원이 이뤄졌습니다”라고 말했다.
‘꿈★은 이루어진다.’
지난 2002년, 월드컵 우승을 상징하는 ‘★’을 카드 섹션으로 내보이던 붉은악마의 마음 뜨거운 구호다.
월드컵 16강을 역사상 한 번도 통과하지 못했던 세계 축구의 변방 대한민국은 그해 거짓말처럼 4강까지 올랐다. 국민들은 이런 거짓말 같은 기적을 바라보면서 ‘★’이 불가능한 꿈이 아님을 자각했다. 다만, 불가능한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전국 방방곡곡을 붉은 티로 물들였던 붉은악마처럼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모여야 한다.
비틀즈 멤버 존 레넌은 자신이 작사작곡한 노래 ‘이매진(imagine)’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상상해 보세요. 여러분들은 저를 몽상가라고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꿈을 꾸는 사람은 저 혼자가 아니에요. 당신도 언젠가 저와 같은 꿈을 꾸게 되시길. 그러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하나가 되어 함께 살게 되겠죠.”
문 대통령은 백두산 천지 주변을 거닐며 전날 밤 평양 능라도 5.1 경기장에서 15만 평양시민들에게 전한 연설의 한 귀절을 다시 되뇌었다.
‘우리 민족은 우수합니다. 우리 민족은 강인합니다. 우리 민족은 평화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은 함께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5000년을 함께 살고 70년을 헤어져 살았습니다!’
이날 5.1 경기장에서 울려 퍼지던 환영의 박수 소리가 머리속을 떠나지 않았다.
김 위원장은 말없이 생각에 잠긴 문 대통령을 바라보며 그 속마음을 짚어냈다. 이심전심이었다.
“오늘은 적은 인원이 왔지만, 앞으로는 남측 인원들, 해외동포들이 와서 백두산을 봐야지요. 분단 이후에는 남쪽에서는 그저 바라만 보는 그리움의 산이 됐으니까.”
문 대통령은 김 위원장의 말에 “이제 첫걸음이 시작됐으니 이 걸음이 되풀이되면 더 많은 사람이 오게 되고, 남쪽 일반 국민들도 백두산으로 관광 올 수 있는 시대가 곧 올 것으로 믿습니다”라고 답했다.
하늘은 맑았고, 바람이 조금씩 불어 날씨는 쾌적했으며, 시야가 좋아 백두산 천지 일대가 선명하게 바라보였다.
백두산 여행 관광 가이드들 사이에서는 과거 중국의 정치 지도자가 백두산을 흠모해 서너 번을 정상에 올랐지만 기상이 좋지 않아 천지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회자된다. 이 때문에 ‘민족의 영산’ 백두산이 자신의 가장 은밀한 속살을 과연 보여줄 지는 하늘의 뜻에 달려 있다고들 한다.
이런 얘기를 의식한 것이었을까. 김정은 위원장은 눈앞에 선명하게 펼쳐진 백두산 천지의 장엄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면서 문 대통령에게 엄숙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오늘 천지에 내려가시겠습니까?”
문 대통령은 히말라야 트레킹을 다녀올 정도로 산을 좋아한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알고 있다. 산에 오른다는 것이 인간의 의지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래서 산에 오르는 사람들은 산에 오를 때 한없이 겸허한 마음을 갖는다. 모든 것을 산에게 맡기는 것이다.
잠시 생각에 잠긴 문 대통령은 김 위원장의 질문에 조심스럽게 답했다.
“예. 천지가 나무라지만 않는다면 손이라도 담가보고 싶습니다.”
김 위원장은 말이 나오면 그 자리에서 화끈하게 추진하는 성격이다. 천지로 내려갈 결심을 굳힌 그는 사려깊게 기념촬영을 먼저 권한다.
김 위원장은 “내려가면 잘 안 보여요. 여기가 제일 천지 보기 좋은 곳인데 다 같이 사진 찍으면 어떻습니까?”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제안을 받으면 흔쾌히 수락하는 시원시원한 면이 있다. 즉각 기념촬영에 들어갔다. 대통령 내외가 김 위원장 내외와 다양한 포즈로 사진을 찍었다.
천지를 배경으로 사진 촬영 중 문 대통령은 김 위원장의 손을 잡더니 이렇게 말했다.
“여긴 아무래도 위원장과 함께 손을 들어야겠습니다.”
김 위원장은 또 문 대통령의 제안이 오면 망설이는 법이 없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천지를 배경으로 역사에 남을 세기적 명장면을 남겼다.
김정은 위원장은 남측 대표단들의 동태도 세심히 살폈다. 거사를 치르는 주최자의 입장에서 모든 것이 최대한 잘 이뤄지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는 “대통령님 모시고 온 남측 대표단들도 대통령 모시고 사진 찍으시죠? 제가 찍어드리면 어떻습니까?”라고 말했다. 손님들을 극진히 대접하고자 팔걷고 음식 나르는 잔치집 주인 같았다.
옆에 있던 김영춘 해양수산부 장관은 감동을 느끼며 “이번에 서울 답방 오시면 한라산으로 모셔야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진심이 담겨 있었다.
아까 문 대통령이 한라산 백록담 얘기를 꺼냈다가 싱겁게 끝난 남북 정상간 또 하나의 꿈을 해수부 장관이 다시 지폈다. 문 대통령의 눈빛이 빛났다. ‘해수부 장관, 그렇지. 바로 그거야’하는 눈빛이었다.
그리고 문 대통령은 시기적절하게 말을 이었다.
“어제 오늘 받은 환대를 생각하면, 서울로 오신다면 답해야겠습니다.”
경계가 모호한 한라산 백록담 방문의 제안이다.
임기 중 마지막 미션을 완벽하게 수행한 송영무 국방부 장관도 눈치가 빨랐다.
“한라산 정상에 헬기 패드를 만들겠습니다. 우리 해병대 1개 연대를 시켜서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장군 출신다운 우렁찬 목소리였다. 송 장관은 서울 귀환 다음 날인 21일 퇴임한다. 하지만 특유의 너스레로 문 대통령의 속마음을 헤아렸다.
백두산 천지에 선 남북의 인사들 모두의 마음 속에 ‘올해 안 서울 답방’과 ‘한라산 백록담 투어’라는 화두가 진하게 남았다. 모두가 한 마음이었다.
리설주 여사가 특유의 센스로 마침내 이런 분위기에 화답했다.
리 여사는 “우리나라 옛말에 백두에서 해맞이를 하고, 한라에서 통일을 맞이한다는 말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김정숙 여사가 들뜬 좌중들 속에서 화룡점정의 마무리를 했다.
“한라산 물을 갖고 왔어요. 천지에 가서 반은 붓고 반은 백두산 물을 담아갈 겁니다.”
김정은 위원장과 리설주 여사는 백두산 천지 물을 살뜰히 담는 김정숙 여사를 바라봤다. 공교롭게도 김정숙 여사와 김 위원장 할머니 이름이 같았다. 며칠 전 리설주 여사도 그 이야기를 했다. 우연이었지만 가끔 필연 같았다.
두 사람은 김 여사의 물병 속에서 백두산 천지 물과 한라산 백록담 물이 ‘통일’되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봤다.
너와 함께 한 시간 모두 눈부셨다. 날이 좋았다. 날이 춥지 않았다. 날이 적당했다. 모든 날이 좋았다.
‘너와 함께 한 시간 모두 눈부셨다.
날이 좋아서
날이 춥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좋았다.’
-드라마 ‘쓸쓸하고 찬란하神 도깨비’ 중에서
[기사에 나온 인물들의 대화는 모두 실제 있었던 사실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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