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발시험 부정행위 오랜 역사
과거시험도 답안지 이름 가려
채용비리로 ‘깜깜이’ 전형 확산
매관매직 만연하면...결국 멸망
[헤럴드경제=홍길용 기자] “시관(試官)이 시험응시자의 봉미(封彌)한 이름을 엿보고는, 만약 권신의 자제일 경우에는 비록 나이가 적고 재주가 모자라도 반드시 뽑았다”
조선(朝鮮) 성종실록(成宗實錄)의 한 대목이다.
‘봉미’란 답안지 우측에 응시자의 인적사항을 적은 부분을 가리는 방법이다. 누구의 답안지인지 모르게 하려는 목적이다. 답안지 해당 부분을 접어 풀칠한 까닭에 ‘호명(糊名)’이라고도 불렀다. 하지만 이름이 가려져도 필체나 미리 약속한 표식 등으로 시관과 내통이 가능했다.
그래서 역서(易書)가 등장했다. 아예 시험답안지를 거둬 서리(胥吏)들이 이를 필사한 후 시관에 제출하는 방식이다. 필체나 표식을 배제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원천봉쇄는 아니다. ‘서리’만 포섭하면 된다.
선발시험의 공정성을 위한 노력은 선발시험의 역사만큼 이나 오래 됐다. 달리 보면 선발시험이 자리매김한 뒤에도 돈과 권력 등을 배경으로 선발 관문 통과도 계속됐다는 뜻이다. 세습 군주제에서 기득권 세력의 세습 요구를 마냥 거부하기도 어렵다. 음서(蔭敍) 등의 제도가 사라지지 않은 이유다.
고려 말기부터 조선까지 유력한 집안의 자제로, 부정한 방법으로 과거에 급제한 어린이들을 분홍방(粉紅榜)이라고 불렀다. 이들이 분홍 옷을 즐겨 입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있는 집’ 자제들이 관직에 진출하니, 제대로 시험을 보고 들어온 선배 관리들이 탐탁할 리 없다. 분홍방들은 선배들에게 ‘한턱’을 내는 ‘허참례(許參禮)’를 치러야 했다, 오늘날의 ‘신고식’인 ‘면신례(免新禮)도 필수과정이었다. 공정하지 못하게 들어온 후임자에 불만을 ‘집단 괴롭힘’으로 표출했던 셈이다.
최근 다시 ‘답안지 이름 가리기’가 등장했다. 일각에서 ‘깜깜이 채용’이라 부르기도 한다. 배경은 금융권 채용비리 논란이다. 임직원 자녀라고 해서, 경영에 도움이 되는 이들의 친인척이라고 해서 채용 시 특혜를 줬다는 논란이다. 한편에서는 민간기업 채용의 자유라고 항변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일자리 세습’이라고 비판한다. 사실 이 같은 논란은 앞서 노동계에서도 불거졌다. 단체협상을 통해 노조원 자녀에게 사실상 입사특혜를 주려는 기업들이 있어서다.
경영권 ‘대물림’에 대한 비판 논리 가운데 하나가 과연 ‘후계자’가 경영에 ‘적임자’느냐는 논란이다. 사실 ‘실력’이 상관없는 조직이라면 누가 어떤 자리에 앉든 상관이 없다. 그만큼 편한 자리라는 뜻이다.
금융권의 채용비리 논란과 일부 노조의 일자리 대물림 논란에 대한 법적 판단은 사법부의 몫이다. 이와 별도로 특혜채용에도 조직이 끄떡 없다면 정말 ‘대단한’ 조직이다. 엄청나게 사업모델이 뛰어나 개인 역량이 크게 중요하지 않거나, 아니면 법과 제도의 보호를 받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전자라면 괜찮지만 후자라면 문제다. 일단 들어만 가면 별 노력 없이 일자리를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법과 제도의 보호를 받으려면 ‘공공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은행은 유사시 공적자금이 투입되는 곳이다.
일제강점과 민족분단을 불러온 조선왕조 말기에는 매관매직이 성행했다. 특히 고종 때는 관직을 팔아 재정을 충당한다는 명분(?)까지 등장했다. 유능하지 못한 관리들이 정치를 하니 나라가 잘 될 리 없다. 투명한 과정을 거치지 않은 일자리는 부패하거나 무능하기 쉽다. 공정(公正)이 경쟁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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