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晁錯, 기원전 200∼154년)는 경제(景帝)가 ‘지혜 보따리’란 뜻의 ‘지낭(智囊)’이라 부르던 총신(寵臣)이었다. 삼국지 조조(曹操)와는 다른 사람이다. 법가 사상을 공부했고, 개혁성향이 강했다. 박학다식했지만 사람이 엄격하고 각박해 제후들과 기득권 세력에겐 눈엣 가시였다.
전한 초기에는 황제의 친인척과 공신들이 주요 지역을 직접 다스리렸다. 황제의 신하였지만 ‘왕’으로서 사실상 독립국처럼 운영했다. 이른바 군국제(群國制)다. 이들 왕의 땅은 나라의 절반에 달했다. 특히 구리와 소금을 독점하다시피 한 오(吳)는 군사력은 물론이고 경제력으로도 황제에 버금갔다. 중앙 행정력도 통하지 않았다. 조조는 이를 중앙집권의 군현제(群縣制)로 바꾸려 했다. 이른바 삭번(削藩) 정책이다. 이에 제후들이 일으킨 반란이 ‘오초7국(吳楚七國)의 난(亂)이다’. 명분은 ‘황제와 골육을 이간하는 간신 조조를 제거하자’였다.
조조는 당시 실세였지만 반란에 신속히 대응하지 못한다. 이 때 라이벌 원앙(袁)은 경제에게 “조조를 참수해 난을 가라앉히라”고 진언한다. 다급했던 경제는 조조의 목을 베었지만 난은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무력으로 진압해야 했다. 진압군 사령관인 개국공신 하우영(夏侯)이 경제에게 직언한다.
“조조를 죽여도 반란이 가라앉지 않으니 잘못된 판단이었습니다”
경제도 이를 깨달았으나 때는 늦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난을 진압하면서 군국제를 폐지, 중앙집권을 강화했다. 덕분에 아들인 무제 때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 원앙조조 열전(列傳)에 “옛것을 바꾸고 떳떳한 도리를 어지럽히면 죽지 않으면 망한다”라로 조조를 평가했다.
법가의 대부격인 상앙(商)이나 병가(兵家)의 대표인물인 오기(吳起)도 전국시대 진(秦)과 초(楚)의 개혁을 이끌었지만 기득권의 반발에 목숨을 잃었다. 개혁가의 최후는 종종 이렇다. 자칫하면 역적이다. 그나마 개혁의 성과는 후대에서야 인정받곤 한다.
최흥식 원장에 이어 김기식 원장까지 물러나면서 금융감독원이 민망해졌다. 하지만 정막 중요한 것은 임명권자의 선택이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이 직접 나서 대기업 금융계열사에 대해 비금융계열사 지분을 정리하라고 압박했다. ‘김기식’은 갔지만, 문재인 정부의 금융개혁 의지는 여전해 보인다.
다시 오초7국의 난으로 돌아가보자. 오왕 비(吳王 ) 열전에는 반란 참가를 독려하기 위해 펼친 논리가 실려있다.
“미워하는 것이 같으면 서로 돕고(助), 좋아하는 것이 같으면 서로에게 머무르며(留), 뜻이 같으면 함께 이루려 하고(成), 이익을 같이 하면 서로를 위해 목숨을 내던진다(死)”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승리에서 중요한 것은 힘이지만, 명분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결국 여론이다. ‘중구삭금(衆口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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