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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투데이> 본고사-학력고사-수능 ‘땜질 손질’…백년대계 ‘쳇바퀴’ 만 돌았다
해방이후 대입제도 16차례나 변경
1961년 대입자격 국가고시제 도입
1969년 대학입학 예비·본고사로
1988년 ‘선지원 후시험’방식 채택
1994년부터 대입시험 ‘수능’으로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라 하기엔 우리 교육정책은 졸속으로 수많은 변화를 거듭해왔다. 말이 좋아 변화이지, 거칠게 표현하자면 앞을 종잡을 수 없을 만큼 혼란스러운 ‘땜질방정식’ 같았다. 특히 ‘교육=대학입시제도’로 바라보는 학생, 학부모, 일선 교육 현장의 시선에선 교육정책이 ‘널을 뛰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학입시제도는 해방 이후부터 지금까지 16차례 큰 손질을 거쳤다.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새로운 입시제도를 들고 나섰다.

그만큼 교육정책이 집권세력에 큰 중요도를 가졌다는 의미일 테지만 새로운 시도가 긍정적인 반향만 거둔 것은 아니다. 도리어 입시제도의 변동은 교육 현장에 예측 불가능의 변수를 더했고, 그럴수록 공교육이 소외되는 역효과를 낳았다.단재 신채호 선생이 역사를 ‘아(我)와 피아(彼我)와의 투쟁의 기록’이라 표현했다면 우리 대학입시제도의 변천사는 교육의 공공성과 대학의 자율성 사이의 투쟁, 공교육과 사교육 사이의 투쟁이라 부를 만하다. 입시 부정을 막겠다고 국가가 주도하는 시험의 성적으로 일률적으로 학생을 뽑으라는 교육당국, 자유경쟁을 표방하며 대학별 고사를 통해 우수 인재를 선발하려는 대학 측의 입장이 엇갈려 이를 절충ㆍ보완하는 과정이 진행돼온 것이다. 애초 해방 직후엔 대학 신입생 선발과 관련한 입시관리 운영 전반에 걸친 권한이 대학의 자율에 맡겨졌다. 대학별로 국어ㆍ영어ㆍ수학ㆍ사회를 필수과목으로 하는 필답고사와 신체검사, 면접고사를 통해 학생들을 선발했다. 이때만 해도 대학입학 자격자나 지원자가 절대 부족해 정원미달 사태가 속출했지만 대학 자율에 맡긴 입시방식은 이내 부작용을 낳았다. 대학들이 대학생 병역특전을 악용해 입학자격이 미달되는 정원외 학생들을 선발하는 학사 부조리가 불거진 것이다.

1961년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사정부는 이 문제부터 손을 댔다. 입시관련 부정ㆍ비리로 대학에 대한 불신이 심해지자 교육쇄신 방안으로 대입자격 국가고시제를 도입한 것이다. 각 대학이 이 국가고시 성적에 기초해 신입생을 선발토록 한 것이다.

그러나 대학 자율성을 침해한다는 비판이 일어 1964년부턴 또다시 대학별 단독 시험제가 치러졌다. 하지만 얼마 못돼 사학(私學)의 정원관리 부실 행태가 되풀이됐고, 대학별 입시 기준에 따라 특정 과목에 편중된 입시교육이 이뤄지는 폐단도 낳았다.

정원에도 미달하던 대학생의 양적 팽창이 이뤄지던 시기 대학교육의 질적 저하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동시에 문란한 대학정원 관리도 바로잡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1969년부턴 다시 국가가 관리하는 대학입학 예비고사를 도입했다. 교육 당국이 의도했던 바는 달성했다지만, 자격시험 성격의 예비고사보다는 대학별 본고사에 무게가 실리면서 의도치 않은 부작용을 불러왔다. 특정교과에 집중한 고학력 경쟁시험의 성격을 띤 본고사가 사교육을 조장했던 것이다.

결국 본고사는 1979년 12ㆍ12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던 전두환 장군 등 신군부가 ‘과외’에 철퇴를 가하겠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폐지됐다. 1980년 7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교육 정상화 및 과열과외 해소 방안’이란 교육개혁을 단행하면서 이듬해부턴 대학입학학력고사 성적과 고교 내신성적으로 대학 신입생을 선발토록 했다. 1986년엔 탈교과적 성격의 논술고사가 전형에 포함되기도 했다. 그러나 무한 복수지원을 허용했던 당시 전형방식으로 인해 눈치작전이나 정원미달, 전국 대학ㆍ학과 간 상대적 서열화가 극심해지는 현상을 빚기도 했다.

이에 1988년엔 ‘선지원 후시험’ 방식이 채택됐다. 동시에 고교 과정상의 전 과목에 대해 시험을 치렀던 학생들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학력고사의 과목을 필수 5과목, 선택 4과목으로 축소했다. 채점의 객관성ㆍ신뢰성 문제가 대두된 논술고사도 폐지됐고 대신 대학별 면접고사가 다시 실시됐다. 이처럼 학력고사ㆍ내신ㆍ면접을 병행하는 입시제도는 1993년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학력고사도 대학의 필요와 거리가 멀고, 암기위주의 입시교육을 유발한다는 비판을 피할 수는 없었다. 이에 1994년 입시부터 지금의 대학수학능력시험이란 새로운 형태의 대입 시험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이처럼 대학 입시제도 변천사는 교육의 공공성과 대학 자율성 사이 조화와 균형을 위한 끊임없는 시도로 점철돼 있다. 그러나 그런 선의와는 별개로, 위정자나 학부모 스스로 100년을 내다보는 안목이 없다면 입시제도는 ‘쳇바퀴’ 도는 신세를 면할 수 없는 것이다. 변화무쌍한 입시제도가 아니라 교육철학 부재가 문제란 것이다. 

백웅기 기자/kgungi@heraldcorp.com

대학입시제도는 해방 이후부터 지금까지 16차례 큰 손질을 거쳤다.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새로운 입시제도를 들고 나섰다. 현 정부가 들어선 후 이명박 정부가 도입한 수준별 수능을 폐기하고 국가영어능력시험(NEAT)을 수능 영어로 대체하려던 구상도 백지화했다. 대합입시제도 땜질식 손질로 인해 학생과 학부형 혼란만 더 가중시키고 있다. [헤럴드경제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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