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엔 3%로 급전직하
환란이후 경상수지 흑자로
가계-기업 소득불균형 심화
저축없이 고령화사회 진입땐
저성장·사회불안 야기 불보듯
한국경제가 선진국병인 ‘저축률 0% 함정’에 빠져들고 있다. 1988년 24.7%로 최고치를 기록했던 우리나라 순가계저축률은 IMF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급락하기 시작해 현재(2010년 말 기준) 3% 수준으로 떨어진 상태다.
가계저축률 추락은 1990년대 이후 선진국에서 나타난 공통된 현상이지만 우리나라와 같이 단기간에 급락한 예는 없다. 한국은행 분석에 따르면 최근 가계저축률을 1990년대 이후 최고 수준과 비교한 결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이 평균 4.5%포인트 하락하는 동안 우리나라는 약 20%포인트나 떨어졌다.
특히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의 가계저축률이 0%대에서 6%대로 상승하고 독일과 프랑스가 12~13%인 데 반해 우리나라는 2008년 2.6%에서 2009년 4.1%로 잠시 높아졌다가 지난해에는 3.9%로 다시 추락했다. 올해는 3%대 중반으로 하락할 것으로 추정된다.
가계저축률 급락은 우리나라 모든 거시경제 문제의 결과물이다. 경제가 성장하는 것만큼 가계소득이 늘어야 하는데, 외환위기 이후 우리 경제의 구조는 그 반대였음을 의미한다. 특히 갈수록 커지는 가계와 기업 간 소득 불균형이 결정적이라는 게 거시경제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지적이다.
지난 14일 한국투자증권이 내놓은 보고서를 보면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 우리나라의 ‘국민처분 가능소득’ 중 법인 몫으로 돌아간 부분은 3.4%였는데, 지난해에는 13.8%로 10.4%포인트나 늘어났다. 반면 같은 기간 개인 몫은 73.6%에서 63.2%로 급감했다.
한국투자증권 전민규 이코노미스트는 “2000년대 중반 이후 기업의 이익이 급증한 것은 단순히 경제성장 때문이 아니라 기업의 몫이 커진 결과”라며 “특히 자영업이나 소규모 개인기업의 소득 증가가 상당히 부진했음을 의미한다”고 평가했다.
국회예산정책처 박종규 경제분석실장은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서 “우리 경제는 저축의 주체여야 할 가계가 부채의 주체가 됐고, 2004~2005년 무렵부터는 부채의 주체가 돼야 할 기업이 저축의 주체가 돼 경제가 거꾸로 가는 현상이 지속됐다”고 평가했다.
그렇다고 외환위기 이후 기업과 개인 간 소득 불균형을 ‘기업의 탐욕’에 따른 수익증가 탓으로만 돌리는 건 잘못된 시각이다. 소득 불균형의 근간에는 ‘IMF 트라우마’가 있었다.
외환위기 이전 우리나라는 만성적으로 경상수지 적자에 허덕이다가 IMF 구제금융이라는 상처를 입었다. 그 후 기업들은 외형성장에 치중하던 관행에서 벗어나 수익성 중심으로 기업경영의 목표를 수정했다.
기업의 경영방식 변화는 우리나라가 그동안 경상수지 흑자를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지만, 뜻밖에도 가계와 기업 간 소득 불균형이라는 부작용을 초래했다. 가계저축률이 유례를 찾기 어려운 수준으로 급전직하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유야 어찌됐건 가계저축률 하락을 이대로 방치해선 안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3년 전 세계 경제를 침체의 나락으로 몰아넣었던 글로벌 금융위기도 미국의 가계저축률이 0%대 수준으로 떨어진 데서 비롯된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한 나라의 가계부채가 자산보다 빠르게 증가하면 거시건전성을 유지하기 어려워진다. 특히 우리나라는 급속한 고령화 등 인구구조의 변화로 가계저축률이 지금보다 더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가계저축이 뒷받침되지 않은 상황에서 고령화가 진전되면 일본과 같이 저성장ㆍ저물가 구조로 귀착되거나 영국에서 보듯이 높은 연금갭으로 인해 사회 불안요인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박종규 실장은 가계저축률 회복을 위한 재정의 역할을 주문했다. 박 실장은 “개인 이자소득세율을 현행 14%에서 10%로 인하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며 “단 4000만원 이상인 경우 현행 종합과세를 유지하면 세수 감소는 628억원에 불과하다”고 강조했다.
<신창훈 기자 @1chuns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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