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6시에 태어났고 2분 후 25살이 된다. 역사적인 순간에 난 뛴다. 몸 안의 수분이 모두 빠졌다. 기분이 아주 좋다. 오늘은 삐삐가 올 일이 없겠지….” (영화 ’중경삼림’ 中)
‘삐삐’라는 단어에 향수를 느끼는 세대가 있는가 하면 고개를 갸웃이는 10대들도 있다. 무선호출기 ‘삐삐’는 90년대 노래 가사처럼 한 때 ‘도시인’의 상징이었다. 당대 가수들의 노래 가사에 숱하게 쓰였는 것은 물론, ‘중경삼림’과 같은 유명 영화의 대사에도 등장했다.
1982년 태어나 90년대 중반 전성기를 맞았던 삐삐는 공중전화 근처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단거리 휴대전화 ‘시티폰’에 밀려났다. 본격적으로 이동식 장거리 통화를 보장하는 일반 휴대폰이 등장하면서 시티폰은 이내 자취를 감췄다. 또 ‘손 안의 컴퓨터’라는 혁신을 일으킨 PDA는 600만명의 국내인구가 사용하는 스마트폰으로 진화했다. 이처럼 이동통신기기는 진화를 거듭하면서 삐삐를 고대 유물로 만들었다.
그렇다면 삐삐가 아직 살아있긴 한 걸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삐삐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국내 유일의 무선호출기 사업자인 서울이동통신의 집계에 따르면, 지난 해 12월 기준 양방향 무선호출 서비스 가입자는 2만1000여명인 것으로 조사됐다. 이들 대부분은 병원 근무자 등 긴급 호출이 필요한 직업에 종사하는 이들인 것으로 파악됐다.
물론 자발적 삐삐 사용자들도 있다. ‘삐삐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다음 카페에는 여전히 3000여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실질적으로 삐삐를 사용하는 회원들은 많지 않지만 삐삐 시대의 추억을 나누고자 하는 이들이 카페의 명맥을 잇고 있다. 지난 해까지 삐삐를 사용했다는 A씨는 “원래 기계들에 큰 애정이 없다. 회사 업무 때문에 휴대전화를 쓰고 있는데 빠른 답변을 강요하는 전화와 문자메시지에 심리적인 압박감을 느낀다”며 “게다가 요즘엔 광고성 전화와 스팸 메시지의 스트레스도 크다”고 고개를 내저었다.
A씨처럼 삐삐를 추억하는 이들에게 스마트폰은 지나치게 빠르고 영악하다. 메시지의 주인공이 누굴까 궁금해하며 공중전화를 찾는, 단 몇 분이라도 설렜던 순간이 사라진 것이다. 삐삐 세대들은 숫자의 조합으로 열 마디 말보다 묵직한 뜻을 만들어냈던 에피소드를 추억하기도 한다. 1004(천사), 8282(빨리빨리)와 같은 기본적인 암호는 물론, 1010235(열렬히 사모), 17171771 (I Love U), 1177155400(I Miss You)와 같은 번호를 은근히 남겨 수줍은 고백을 대신하기도 했다.
현대인은 늘 초조하고 불안하다. 십여년 전만 해도 상대의 회신을 여유 있게 기다릴 줄 아는 느긋함이 있었다. 불필요한 광고와 정보의 홍수에 노출될 염려도 없었다. 이제는 메시지의 답이 조금만 늦어도 신경이 쓰이고, 집에 휴대전화라도 두고 온 날이면 온종일 안절부절 못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뜨는 소액대출 광고 메시지는 짜증을 유발한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빠르게 진보하는 디지털 세상에서 삐삐를 다시 불러올 순 없는 일이다. 다만 시도때도 없이 조급증이 밀려들 때면, 당시의 자유로움과 낭만, 여유를 한번쯤 돌이켜볼 필요가 있겠다.
<이혜미 기자 @blue_knigh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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