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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바젤에 있는 국제결제은행 본부 [AFP] |
자본 요건 완화, 다음 금융 위기의 불씨될 것
은행의 규제 주기는 위기로 구분할 수 있다. 보통 위기가 닥치면 규제가 강화된다. 그러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위기는 기억 저 편으로 사라지고 정책 입안자들은 규제를 완화하라는 은행 로비스트들의 끈질긴 압박에 굴복한다. 그러면 완화된 새 규정이 허용하는 대로 은행은 위험을 더 많이 감수하고, 십중팔구 다시 은행 위기가 닥친다. 그때 가서 사람들은 왜 아무도 위기를 예견하지 못했냐고 묻는다.
여기에 역설이 존재한다. 자본 요건이 까다롭고 충실히 집행되면 시스템 전체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지므로 실제로 은행권 전반이 혜택을 본다. 그렇지만 은행 대부분이 민간 주주 소유의 주식회사인 나라에서는 은행 로비스트들이 상황에 아랑곳없이 항상 규제를 완화해달라고 요구한다. 단기적으로 보면 그런 로비 활동은 합리적이다. 다른 여건이 모두 같다면, 레버리지가 많아질수록 은행의 자기자본 이익률은 높아지고 주주는 더 큰 만족을 즉각 얻을 수 있다. 은행의 보상 인센티브 구조상, 은행가 자신의 보수도 올라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은행가는 고용주의 장기적 이익을 위해 로비 하지 않는다. (이론적으로는 지나친 자본 요건이란 것이 존재할 수 있지만, 은행과 모종의 관계가 없는 분석가라면 현재 수준이 지나침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는 데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이 주기는 반복해서 관찰됐다. 1920년대 일본, 그리고 1930년대 유럽과 미국에서 대규모 금융 위기가 발생한 뒤 건전성 체계가 강화됐고, 1970년대까지 금융 안정성이 널리 확산됐다. 그 후, 규제 완화 주기가 시작되면서 위기가 갈수록 빈번해졌다. 한국은 1997년에 외환위기를, 유럽과 미국은 2000년대 말 대규모 금융위기를 겪었다. 이 때, 미국의 베어스턴스와 리먼 브라더스, 영국의 스코틀랜드 왕립은행, 독일의 베스트도이체주립은행 등 주요 기관들이 쓰러졌다. 이에 세계 각국의 건전성 당국이 스위스 바젤에서 열리는 바젤은행감독위원회 정례 회의에서 요건을 강화하자는 새로운 합의를 도출했다. 이 합의로 탄생한 일련의 규칙이 우리가 알고 있는 바젤 III다. 바젤위원회는 2010년말부터 2017년 말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바젤 III 기준을 발표했으며, 2017년 말에 발표된 최종안이 이른바 바젤 III 엔드게임이다.
2008년 북대서양 금융위기가 최고조로 치달은 후 이제 겨우 16년이 흘렀다. 혹자는 여전히 그 때 기억이 생생하니 규제 완화 쪽으로 균형추가 기우는 불상사는 없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안타깝지만 그 생각은 틀렸다. 정책입안가들이 과거 뼈아프게 체득한 교훈을 한 세대도 지나기 전에 빠르게 망각하고 있다는 지표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지고 있다.
마이클 바 미국 연방준비제도 부의장은 지난 9월, 바젤 III 엔드게임의 이행 기준을 당초 예고안보다 훨씬 완화할 거라고 발표했다. 아직 세부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미국 정치가 극도로 양극화된 지금, 이번 발표는 미국 건전성 당국이 거센 은행 로비에 버티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
유럽연합의 경우, 은행권이 보유한 총 자산이 미국 은행권보다 훨씬 많은데도, 최근 바젤 III를 제대로 준수하기에 턱없이 모자란 법안을 채택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더 완화하라는 요구가 나온다. 마리오 드라기 전 유럽중앙은행 총재와 같이 권위 있는 인물조차 목소리를 보탰다. 그는 최근 한 보고서에서 EU는 “곧 바젤 III가 시행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지금의 건전성 규정이 EU에서 견고하고 국제적으로 경쟁력 있는 은행 시스템을 만드는데 적절한지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난 9월, 프랑스, 독일 및 이탈리아 재무장관은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에 공동 서한을 보내어 “특히 은행, 그리고 은행이 경제에 자본을 조달하는 능력을 중심으로 금융 부문의 경쟁력에 더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두 사례에서 언급된 은행권의 경쟁력란 결국 자본 요건을 완화하라는 요구로 풀이되고 있다.
콜로라도주 웨스트민스터의 한 은행 창구에 연방예금보험공사(FDIC) 및 기타 은행 정책을 설명하는 표지판이 붙어 있다. [로이터] |
앞서 언급한 역설대로, 미국의 초대형 은행들은 10년간 전반적으로 더 엄격한 자본 요건을 감당하느라, 드라기가 보고서에서 인정했듯이 유럽 은행들에 비해 훨씬 뛰어난 경쟁력을 갖게 됐다. 바젤위원회가 2014년에 발표한 마지막 평가에 따르면 미국은 바젤 III의 1차 기준을 “대체로 준수”한 반면 EU는 “실질적으로 미준수”했다. (한국은 2016년에 대체로 준수한다고 평가받았다). 한 가지 다른 부분은 EU가 자체적인 바젤 기준을 규모에 관계없이 모든 은행에 적용하는 반면, 미국은 초대형 은행에만 적용한다는 점이다(바젤위원회는 기준의 적용 대상이 국제적인 대형 은행이라고 밝혔을 뿐, 그런 은행의 범위를 정하는 양적 기준은 마련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당연히 미국의 중간 규모 은행들은 금융 안정성에 취약하다. 지난 해 실리콘밸리은행(SVB) 같은 은행들이 파산하며 발생한 짧고 굵은 위기가 이 사실을 증명한다. 그러나 미국의 지역 은행들은 정치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기 때문에, 건전성 당국은 은행의 총자산 규모가 수천억이 넘는 경우에도 바젤 기준을 감히 확대 적용하지 못했다.
EU가 바젤 III을 준수하지 않는다는 것은 특히 당혹스럽다. 바젤위원회 28개 회원국에는 EU와 더불어 EU 회원국이 무려 8개국(벨기에,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스페인, 스웨덴)이나 포진하고 있어 과대 대표되고 있다. 이 중 스웨덴을 제외한 7개국은 유로존에 속하며, 따라서 은행 연합에 속한다. 은행 연합은 설립된 지 10년이 지난 기구로서 유로존 내 개별 국가는 더 이상 독립적인 감독 정책이 없음을 의미한다. 더군다나 EU는 스스로 국제 기준과 국제법에 기반한 경제, 금융 질서를 매우 성실히 따르고 있다고 자평해 왔다. 엄연히 과대 대표되고 있으면서도 준수 실태는 엉망이라는 사실은 황당하기 짝이 없다.
대통령 선거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는 지에 따라 미국에서는 이 질서가 앞으로 더욱 지켜지지 않을 위험이 있다. 그러나 결국, 미국이나 EU와 같은 국가들이 바젤 기준을 준수해야 하는 이유는 그저 탄탄한 글로벌 거버넌스를 위해서가 아니다. 자신들 각자의 이익이라는 명확하고 구체적인 목표를 위해서고, 그 목표는 바로 장래에 은행 위기가 불러올 파탄을 피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미국은 바젤 III의 적용 범위를 중간 규모 은행으로 확대해야 하며, EU는 바젤 기준을 충실히 준수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안타깝지만 적어도 가까운 미래에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양쪽 모두 희박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