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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왜구, 아기발도와 왕직 [장준영의 ‘지피지기’ 일본 역사]
노략질하는 왜구 [일본도쿄대 사료편찬실 제공]

개경에 계엄령 발동

1352년 윤3월, ‘고려 공민왕은 재추에서부터 이서에 이르기까지 사람마다 활 1개, 화살 50개, 검 한 자루, 창 한 자루씩 갖추게 한 다음 숭문관에서 사열하였다’. 고려 조정은 왜구가 강화도에 쳐들어와 수도 개경까지 함락당할 지경에 이르자 마침내 계엄령을 선포했다. 1368년 윤5월에도 왜구는 강화도까지 쳐들어와 고려인 300명을 살해하고 쌀을 무려 4만석이나 약탈해 갔다. (고려사)

‘왜구가 지나간 지역에는 닭과 개도 남지 않고 연해 수천 리에 밥 짓는 연기가 끊겼다’. 왜구들의 침탈로 고려 해안선 일대는 살인, 납치, 약탈, 방화로 쑥대밭이 되어 그 참상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왜구의 고려 침공은 1370년대∼1380년대 10여 년 간 가장 치열하게 발생했으며 1350년부터의 40년간은 그 횟수가 무려 591회에 달한다고 이영 한국방송대 교수는 조사·분석했다.

왜구들은 집중적으로 곡창지대를 공략했다. 개성으로 운반하는 조세운반선을 탈취하고 세금으로 걷은 쌀, 세곡미 저장창고를 약탈했다. 흉흉해진 민심으로 인해 수도를 옮겨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원의 속국이었던 고려는 원의 간섭과 감시로 인해 자체적으로 자주국방을 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이틈에 왜구가 침공을 해오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고려 왕조(918년~1392년)의 운명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였다.

남원 황산대첩비 터 [네이버 제공]

아기발도, 이성계를 역사의 무대에 등장시켜

바로 이때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이 고려 장군 이성계다. 1380년 8월, 함선 500척, 1만5000명에서 2만 명으로 추산되는 왜구의 대규모 병력이 진포 앞바다(전북 군산과 충남 서천 근처 해안으로 추정)로 침입한다. 고려 측은 최무선이 만든 화통과 화포로 왜구들의 함선을 불태워 격퇴한다. 고려 수군의 화포 공격으로 함선을 잃은 왜구들은 남원 방면으로 도주하다가 고려군과 조우했다. 고려군 총사령관 이성계가 이들을 맞았다.

왜구를 진두지휘하는 두목은 아기발도라는 자였다. “나이는 겨우 15~16세이나 사납고 날렵함이 비길 데가 없다. 흰 말을 타고 창을 마음대로 휘두르니, 그가 가는 곳마다 감히 맞서는 이가 없었다. 우리는 그를 아기발도(阿其拔都)라 불렀다”〈조선왕조실록 태조총서 1권〉. 아기발도는 갑옷과 투구를 목과 얼굴에 감싸고 있어서, 쏠 만한 틈이 없었다. 이성계는 활을 쏘아 그의 투구 쪽지를 맞히자 투구가 마침내 떨어졌다. 그 순간 이성계의 부하 이두란이 바로 활시위를 당겨 그를 쏘아서 죽였다. 기세가 꺾인 왜구들은 지리멸렬 패주했다. 이를 역사에서는 황산대첩이라고 부른다. 황산대첩은 12년 후인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는데 중요한 정치적 발판이 됐다.

왜구 두목 아기발도는 누구였는가? 당시 일본은 천황이 둘로 쪼개져 내란 상태에 돌입한 일본 남북조시대(1336년~1392년) 극도의 혼란기 와중이었는데 남조 고다이고 천황의 아들 가네요시 장군이 규슈지방을 장악하고 있었다. 아기발도는 남조 진영의 수괴들 가운데 한 명이거나 그의 아들일 것이라는 주장이 한일 일부 학자들에 의해 제기된다. 심지어 아기발도는 고다이고 천황의 손자이자 가네요시 장군의 아들일 것이라는 주장을 내놓는 이도 있다. 남조 측 왜구들이 북조 측과의 전투에 필요한 군량미를 확보하기 위해 규슈에서 가장 가까운 한반도 곡창지대에 침입하여 쌀 운반선과 세곡미 저장창고를 약탈했다는 것이다. 필자는 대체로 이 주장에 동의하는 편이다. 1383년 가네요시가 사망하자 남조 세력은 몰락하고 왜구의 움직임도 급속히 둔화되어 갔다.

이 시기에 왜구가 발호하게 된 데에는, 중국의 원·명 왕조 교체기에 따른 정국 혼란, 고려의 피폐함, 일본의 남북조시대 내란 등 한중일 동아시아 3국 모두가 극도의 정치적 혼란상태에 빠져 동아시아 질서가 붕괴된 게 큰 요인이었다. 그후 1392년 조선 건국과 일본의 남북조 통일, 그리고 명 왕조의 출범 등 동아시아 3국 공히 정권이 안정을 되찾게 되자 자연스럽게 왜구도 자취를 감추게 됐다. 이 시기의 왜구를 ‘전기 왜구’로 분류한다.

명군과 싸우는 왜구 [일본도쿄대 사료편찬실 제공]

‘죽음의 상인’ 왕직

16세기 명왕조의 최대 과제 가운데 하나는 중국 동남부 해안지역에서 해적 행위를 일삼으며 반명운동을 벌이는 장사성과 방국진 등 해적세력 토벌이었고 이들과 왜구와의 결합을 차단하는 일이었다. 명 조정은 외부 세력을 차단하기 위해서 대외 무역과 해외도항을 금지하는 해금정책을 강화했다. 한편 명 왕조는 세금을 은으로 납부토록 징세 정책을 바꿨다. 은은 원거리를 운반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이는 밀무역을 조장하는 결과를 낳아 왜구의 활동을 자극하게 됐다.

때마침 일본에서는 이와미 은광에서 대량의 은이 발견됐다. 세계 은 생산량의 1/3에 해당되는 막대한 양이었다. 이 때문에 다량의 은이 일본에서 중국으로 흘러들어갔다. 왜구들에게 엄청난 돈벌이 기회가 찾아왔다. 왜구들은 저장성 육횡도 쌍도항에 거점을 구축하고 있었다. 16세기 왜구를 ‘후기 왜구’라고 부르는데 그 주요 구성원은 남부 후젠성과 광둥성, 안후이성 출신의 중국인이었는데 여기에 일본인, 그리고 대항해시대 개막에 따라 동아시아에 진출한 포르투갈, 스페인 상인 등도 왜구에 가담하고 있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중국인으로서 ‘오봉’이란 호를 가진 왕직이었다. 그는 왜구의 거점인 육횡도 쌍도항에서 활동한 말단 하급 왜구였다. 왜구 두목들이 명 관군들의 소탕 작전에 의해 차례로 체포, 처형당하자 명 관헌의 단속을 피해 활동 거점을 일본으로 옮겼다. 그는 일본 나가사키현 고토 열도에 거점을 마련하고 왜구 잔존 세력과 결탁하며 일본과 중국 간의 밀무역에 나서 거액의 부를 거머쥐었다. 조총에 쓰이는 화약 원료인 초석을 일본에 대량으로 공급하고 일본으로부터는 은을 챙기는 거래 방식이었다. 그는 1543년 무렵 일본에 최초로 조총을 전래하는데 관여한 것으로 기록에 남아 있고 포르투갈 상인들을 왜구의 소굴 히라도에 끌어들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후 왕직은 저장성 총독 호종헌에게 항복하며 구명을 요청했으나 명 왕조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1559년 12월 그를 처형했다. 한편 일본에서는 천하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해적단속령을 내리자 규슈 연안을 근거로 한 왜구의 활동도 마침내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일본에서는 왕직에 대해서 ‘명나라에서는 범죄 수배자이지만 일본의 무역에 도움을 준 고마운 손님’으로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시각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는 조선에게는 심대한 해악을 끼친 왜구 두목이었다. 1555년 ‘을묘왜변’의 왜구 두목이 ‘오봉’으로 일컬어지는 왕직이었으며, 조총의 일본 전래에 깊숙이 관여하고, 화약 원료 초석을 일본에 대량 공급한 장본인도 그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전쟁은 그로부터 단초가 열렸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는 게 필자의 견해다.

다음 회에서는 남원 사람들과 일본 간에 얽혀 있는 역사적 사연을, 그들의 망향가 ‘오나리 오나이소서’란 제목으로 소개하여 올리고자 한다.

bons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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