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역위축, 외채부담·재정압박 커져
중국 경제난 가중도 신흥국에 악재
원화값 급락 韓경제 펀더멘털 반영
후진 지배구조로 기업 경쟁력 약화
구조조정·혁신 못하면 또 외환위기
환율이 경제 핵심 이슈로 부각했다. 원화 가치가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수준까지 폭락하면서다. 지금이 당시와 같은 위기 상황까지는 아닌 듯한데 왜 비슷한 현상이 나타날까? 원인을 면밀히 분석해보면 단순히 환율의 문제가 아니다. 신흥국에 경제위기가 닥칠 수 있다는 위기 신호다. 우리나라 경제구조가 이대로는 지속 가능한 성장을 하기 어렵다는 경고다. 한 마디로 온 나라가 경제에 집중해도 극복이 쉽지 않은 상황이라는 경고다.
최근 원화 환율 급등의 표면적 이유는 미국의 기준금리 인하 연기다. 미국은 고용과 소비를 바탕으로 경기가 뜨겁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최근 올해 미국 경제 성장률 전망을 2.5%에서 2.7%로 높였다. 우리나라(2.3%) 보다 높다. G7 가운데 미국을 제외하면 캐나다가 1.2%로 성장률 전망 2위다. 나머지 국가들은 1% 미만이다. 경기가 좋은데 연방준비제도(Fed)가 기준금리를 내리기는 어렵다. 높은 금리가 계속되면 달러 강세가 지속되며 다른 통화들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하락하게 된다.
통화가치가 하락하면 수입물가가 상승한다. 물가상승을 억제하려면 중앙은행은 금리를 높은 수준에서 관리해야 한다. 이자 부담이 커지면 가계는 소비를 줄인다. 기업들은 투자를 꺼리게 된다. 유효수요가 줄면 무역도 위축되기 마련이다. 한 나라의 통화가치가 하락하면 그 나라를 상대로 수출을 하는 다른 나라까지 영향을 받는다. 미국이 독주(獨走)를 할수록 다른 나라들은 강제로 독주(毒酒)를 들이켜야 하는 구조다. 경제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국가일수록, 대외 채무가 많은 나라일수록 더 많은 독주를 마셔야 한다.
세계적으로 수출을 많이 하는 나라로는 한국, 독일, 일본이 대표적이다. 외환시스템이 다르다. 독일은 달러 다음으로 많이 통용되는 유로화를 사용한다. 변동성이 적다. 일본은 미국과 무제한 통화스와프를 맺고 있다. 일본은행이 엔화를 찍어내 달러로 바꿀 수 있다.
미국은 기축통화여야만 스와프를 체결한다. 기축통화의 조건은 외환시장 24시간 100% 개방이다. 한국은 이 모두에 해당하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무역을 통해 필요한 달러를 자급해야 한다. 글로벌 외환시장의 움직임에 원화 가치가 유달리 크게 요동치는 이유다.
달러 강세로 인한 글로벌 경제 위축은 재정에도 영향을 미친다. 경제 활동이 줄면 세수가 감소한다. 세수 감소 폭 만큼 재정지출을 줄이지 못하면 재정적자다. 고령화, 친환경 전환 등으로 주요국 재정지출은 사실상 줄이는게 불가능한 상황이다. 글로벌 금융위기와 코로나19 극복 과정에서 늘어난 정부 빚도 이미 상당하다. 금리가 높아지면 정부도 이자 부담에 시달리게 된다. 강력한 긴축재정을 펼치기도 어렵다. 자칫 경제성장이 멈출 수도 있다. 선거를 치러야하는 민주정치를 택한 나라에서는 택할 수 없는 선택지다.
미국의 재정적자가 국내총생산(GDP)의 8.8%(2023년 기준)에 달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인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자비용이 정부 수입의 10%를 이미 넘었고 2026년에는 그 액수가 1조 달러를 상회할 것이란 전망까지 나올 정도다. 미국은 기축통화인 달러를 발행하는 나라이고 기술혁신과 투자도 지속된다는 점에서 경제성장을 통해 재정적자를 줄여갈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IMF는 미국의 재정적자가 올해 6.5%로 줄고 2029년에는 6%까지 낮아질 것으로 전망했다.
문제는 미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이다. IMF가 계산한 전세계 정부의 평균 재정적자는 2023년 기준 GDP의 5.5%다. 미국을 제외한 선진국이 3%,신흥국이 5.4%다. 신흥국 수치를 높인 주범(?)은 중국이다. 지난해 7.1%에서 올해 7.4%로 높아지고 2029년에는 7.9%에 달할 전망이다. 중국 정부 입장에서는 지방정부를 포함한 공공부분의 막대한 부실을 흡수해야 하고 디플레이션(deflation)에 빠진 경제도 부양해야 한다. 엄청난 재정이 필요하다. 통화를 더 발행할 수도 있지만 화폐가치 급락을 피하기 어렵다. 해외로부터의 자본유입이 필요하다.
중국이 달러를 벌어들이는 방법은 2가지다. 무역흑자와 투자유치다. 전자를 위해서 최근 저가 수출공세를 최근 펼치고 있다. 각국은 관세 등을 통해 제동을 걸 태세다. 방치할 경우 중국과 경쟁하는 자국 기업들의 생존이 위협받을 수 있어서다. 후자는 더 막막하다. 우선 미국의 견제로 해외투자가 이탈하고 있다. 정부가 위안화 환율을 통제하고 있는 점도 걸림돌이다. 위안화 가치는 올해 2.25% 하락했다. 엔(9.67%), 원(6.56%), 대만달러(6.04%)는 물론 유로(3.64%) 보다 낮다. 경제 전망도 어두운 중국에 투자하려고 비싼 값에 위안화를 사려고 누가 달러를 넣을까.
한때 4조 달러를 넘던 중국의 외환보유고는 3조 달러 초반까지 줄었다. 달러가 부족하다는 뜻이다. 중국의 달러 부족이 일으킬 글로벌 경제의 파장도 상당할 수 있다. 당장 중국에 원자재 등을 수출해 돈을 벌던 나라들이 어려워진다. ‘일대일로(One belt, One road)’ 등을 통해 중국에서 돈을 빌려 경제개발을 하던 나라들의 사정도 곤란해진다. 미국의 강 달러가 계속될 수록 위안화 가치 왜곡, 즉 중국의 달러 부족은 심각해질 가능성이 크다. 최근 시진핑 주석이 이례적으로 미국 기업인들과의 직접 만남에 적극적인 사정이 이해된다.
최근 원화 값 폭락의 외부 요인은 미국의 강 달러와 중국 경제의 부진이다. 내부 요인 역시 만만치 않다. 수출이 어려우면 내수라도 키워 성장을 이어가야 한다. 우리나라 가계와 기업 빚은 GDP 보다 많지만 정부는 55% 수준이다. 선진국(111%)의 절반이다. 내년에는 재정 적자에서도 벗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정부가 살림을 잘해서일까? GDP 대비 정부 수입(2023년)은 23.9%로 선진국(35.5%)에 한참 못 미친다. 정부 지출도 24.9%로 선진국(41.1%) 보다 크게 낮다. 수입은 11.6%포인트(p) 적은데 지출은 16.2%p나 작다.
정부 수입이 적은 것은 세금부담이 낮다는 뜻도 되지만 국가의 자원 재분배 기능이 약하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재정지출이 적은 것은 사회안전망 미비로 풀이할 만하다. 우리나라 복지는 대부분 기업과 근로자 부담이다. 사실 대한민국의 재정 건전성은 자랑하기 보다는 반성해야 할 대상이다. 일각에서는 정부 부채가 계속 늘어나는 상황을 우려한다. 인구감소와 고령화를 감안하면 자연스런 현상이다. 정부 부채비율 증가 보다 더 비중을 둬야할 것은 경제성장이 멈추거나 둔화됐을때 국민이 감내해야 할 고통이다.
1997년과 2008년의 환율 급등은 그 주요 원인이 달랐다. 전자는 우리 경제 펀더멘털의 하자, 후자는 미국 금융시스템의 부실이다. 최근 원화 가치 급락은 외부 요인과 내부 요인이 겹친 결과다. 앞서 짚은 것처럼 우리나라의 수출 시장은 수요 부족과 경쟁 심화로 설상가상이다.
기업들은 경쟁력 한계에 봉착했다. 반도체는 주도권을 잃고 있고 자동차는 미국, 독일, 일본에 이어 중국과도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한다. 철강, 화학 등 장치산업도 전세계적 증설로 공급과잉이 우려된다. 전자제품과 조선 부분에서도 이미 중국에 밀린 지 오래다.
국내 자본의 해외 이탈은 가속화되고 있다. 주요 산업은 국내 보다 해외투자에 더 적극적이다. 불투명한 지배구조와 부족한 주주환원 등 ‘코리아디스카운트’가 해결되지 않으면서 해외투자자는 물론 국내 투자자도 우리 증시를 외면하고 있다. 이미 금융투자 시장에서는 ‘한국 보다 미국’이 대세일 정도다. 달러 벌이는 신통치 않은데 나가는 달러는 많으니 원화 가치가 폭락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원화 가치를 회복시키지 못하면 고금리 상황이 지속되고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가계부채, 좀비기업 등 우리 경제의 ‘약한 고리’들에 잇따라 불이 붙을 수 있다. 기업들의 경쟁력을 회복시킬 수 있는 지배구조 혁신이 시급하다. 고금리 상황이 지속될 가능성에 대비한 차입 축소(deleveraging)도 필요하다. 변화 과정에서 고통도 크겠지만 우리 경제의 미래가 밝아져야 달러 유입이 늘어나며 환율이 안정될 수 있다. 미국과의 무제한 통화스와프가 가능할 정도의 외환시장을 가질 경제 펀더멘털을 구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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