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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영상의 세상읽기] 신진서가 소환한 ‘이창호의 상하이 대첩’

승부의 세계에서 절대 강자는 고독한 법이다. 어쩌다 지면 따가운 눈총이 쏟아진다. 컨디션 난조라는 핑계는 사치일 뿐이다. 그래서 절대 강자는 외롭고 또 외롭다. 인공지능(AI)급 바둑을 둔다고 ‘신공지능’이라 불리는 신진서 바둑 프로9단의 경우가 그럴 것이다.

신 9단이 절대 강자임은 기록이 말해준다. 신 9단은 2023년 마지막 12월 랭킹에서도 1위를 차지하며 48개월 연속 랭킹1위 자리를 고수했다. 지난달엔 한해 100승을 달성하기도 했다.

연간 100승 기록은 한국 프로바둑 역사상 처음이다. 특히 신 9단은 지난 8월 ‘바둑올림픽’으로 불리는 세계 최대 기전인 응씨배를 손에 쥐며 14년만에 한국에 우승을 선사하는 강렬한 인상을 줬다. 현재 신 9단의 승률은 89%가 넘는다. 앞으로 남은 기전에서 전승을 기록할 경우, 꿈의 90%대 승률 달성도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신 9단 앞에 숙명의 과제가 놓였다. 절대 강자의 고독한 운명에 주어진 숙제다.

신 9단은 지난 4일 부산 동래구 호텔농심에서 열린 제25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 9국에서 중국의 셰얼하오 9단에게 133수 만에 흑 불계승을 거뒀다. 박정환, 변상일 프로 등 초일류 한국주자 4명이 탈락한 뒤의 천금같은 1승이었다.

숱한 승리를 만끽한 신 9단이었을지라도 이날 승리가 대단한 의미가 있었던 것은 셰얼하오 9단의 8연승을 저지했다는 점에 있다. 최근 열린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 8강전에서 셰얼하오 9단에게 패배의 일격을 당한 후여서 승리의 기쁨은 배가됐다.

바둑팬들은 이번 25회 농심배에서 ‘혹시나’하는 기적을 바라고 있다. 신 9단이 나머지 판들도 파죽의 연승을 거둬 한국에 우승컵을 안겨줄 것이라는 일말의 희망이다.

물론 확률은 ‘낙타 바늘구멍’만큼 작다. 신 9단이 우승컵을 품으려면 일본의 이야마 유타를 시작으로 커제, 딩하오 프로 등 중국의 초고수 4명을 쓰러뜨려야 한다. 제아무리 신공지능이라 불려도, 알파고가 아닌 이상 지구촌 최고강자급 다섯명을 연달아 이기기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런 기대감을 갖게되는 것은 ‘돌부처’ 이창호 프로의 ‘전설의 우승’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20여년이 흐른 지금도 회자되는, 그 유명한 ‘상하이 대첩’이다. 이창호 9단은 2005년 제6회 농심배에서 마지막 주자로 출전해 5연승 후 우승이라는 기적(?)을 일궜다. 당대의 고수였던 뤄시허, 장쉬, 왕레이, 왕밍완, 왕시 프로를 연달아 쓰러뜨림으로써 한국에 우승컵을 안겼다.

이 9단은 2010년 농심배에서도 마지막 주자로 나서 류싱, 구리, 창하오 프로를 연달아 제압하고 끝내기 3연승으로 한국 우승에 기여함으로써 ‘농심배의 사나이’란 칭호를 얻기도 했다. 이런 대역전 우승의 꿀맛을 목도한 경험이 있는 바둑팬들 사이에서 예전 ‘이창호 신화’ 데자뷔를 다시 보고 싶다는 기대감이 싹트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신 9단은 겸손했다. 그는 “겨우 한판 이긴 것이기에 우승에 대한 욕심보다는 한판 한판 둔다고 생각하고 싶다”고 했다. 본인 말처럼 한게임 한게임 대국 자체를 즐기면서 전력을 다하길 바란다. “신공지능, 너무 부담 갖지 말고 최상의 컨디션에서 좋은 플레이 보여주세요.”

ys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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